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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전례 & 미사

전례의 쇄신 - 요셉 라칭거 추기경과 비토리오 메쏘리의 대담

by 파스칼바이런 2013. 3. 14.

전례의 쇄신

<요셉 라칭거 추기경과 비토리오 메쏘리의 대담>

정종휴 옮김(전남대학교 법과대학 교수)

 

후에 '요셉' 라칭거 추기경은 제265대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선출됨

 

 

보존해야 할 풍요한 재산

 

“추기경님, 잠깐 전례의 개혁에 대해 이야기하실까요? 이 문제는 가장 많이 다루어지고 가장 성가신 문제 중에 하나입니다. 또한 이 문제는 악마와 이단의 냄새가 난다면서 전례의 몇몇 쇄신에 반항하는 주교, 마르셀 르페부르 몬시뇰의 비장한 전일주의가 보이는 반공의회적 전통주의적 반응의 하나입니다…….”

 

추기경은 정확히 표현하려고 내 말을 바로 가로막는다. “전례 개혁의 특정한 구체적인 종류에 대하여는, 그리고 무엇보다 일정한 전례론자들의 입장에 대하여 곤혹과 불쾌를 느끼는 사람들의 범위는 반공의회적인 전통주의자들의 범위보다 훨씬 넓습니다. 달리 말하면, 그만한 불만을 털어놓는 모든 이가 그렇다고 이미 전일주의자인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극단적인 전통주의를 멀리하는 가톨릭 신자에게도 공의회 이후의 일정한 전례론에 대하여 의심을 품거나 항의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지요? 향수에 빠지지 않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완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된 가톨릭 신자에게도 말입니다.”

 

라칭거는 답한다. “전례 이해의 다양한 방법의 이면에는 거의 언제나 그렇듯이 교회의 이해, 따라서 하느님의 이해,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 이해의 다양한 방법이 있습니다. 전례의 문제는 결코 주변 문제가 아닙니다. 전례가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이라는 점을 상기시킨 것은 다름아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였습니다.”

 

로마에서의 소임이 중요하다보니, 요셉 라칭거는 (시간도 기회도 모자라서) 하고 싶어하는 학술 논문과 저서의 출간을 계속할 수 없는 입장이다. 전례라는 주제가 그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는 그가 근자에 공간한 몇 안되는 저적의 하나가 이 주제를 다룬 것이라는 사실이 보여 준다. 그의 ‘신앙의 향연’(Das Fest des Glaubens)이라는 책이 바로 그러하다. 그 책은 그가 벌써 제2차 공의회 종료 10년 후에 경악하여 표명한, 전례와 ‘적응’(aggiornamento)의 한 특정한 이해야 관한 짧은 논문집이다.

 

나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10년’을 주제로 한 제명제”라는 1975년의 원고에서 한 절을 뽑아 읽는다. “민족어로의 전례의 개방은 근거 있고 정당한 것이다. 트리엔트 공의회도 그 가능성을 제시한 바이다. 새로운 전례 양식의 교육은 트리엔트 공의회와 모순된다고 일부의 전일주의자들과 함께 주장함은 참으로 그릇된 것이다. 전례 개혁의 개별적인 발걸음들이 얼마나 진정한 개선이었는지 아니면 오히려 깎아 내린 것이었는지, 그것들이 사목상 현명했는지 어리석었는지 아니면 무모했는지는 이 자리에서는 미결인 채로 남아 있음에 틀림없다.”

 

나는 당시 아직 신학 교수이던, 그러나 이미 교황청 국제 신학자 위원회의 위원이던 요셉 라칭거의 논문을 더 읽어 간다. “분명한 것은 전례를 단순화하고 되도록 이해할 수 있게 하면서도, 교회의 행위 속에 하느님의 역사하심의 신비가, 즉 사제와 공동체에게는 건드릴 수 없는 전례의 핵심이 미리 주어져 있다는 것과 그 전교회적 성격은 고스란히 지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칭거 교수는 경고한다. “전례를 본당의 동아리 모임으로 전락시키고 전례를 사진판 일간지를 이해하는 수준으로 깎아 내리는 합리적 천박화, 쓸데없는 잡담, 사목적 유치함에 대하여는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훨씬 단호히 대처해야 한다. 현재 진행 중인 개혁도, 특히 예식 부문에서의 개혁도 그러한 관점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내가 추기경의 이 논술을 읽고 있는 동안 추기경은 언제나처럼 주의 깊고 인내롭게 내 말을 듣는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다. 이러한 경고의 저자는 이젠 단순한 학자가 아니고, 교회의 정통성에 관한 파수꾼이다. 오늘의 라칭거, 신앙교리성 장관은 이 점을 확인할 것인가?

 

그는 지체없이 내게 답한다. “철두철미 그렇습니다. 제가 이 글을 쓴 이래, 보존되어야 할 많은 측면이 오히려 소홀해졌고, 당시까지만도 남아 있던 많은 보배가 허비되어 버렸어요. 1975년 당시에는 많은 동료 신학자들이 제 이야기에 분노하거나 적어도 깜짝 놀랐지요. 지금은 그 가운데 많은 분들이 제 이야기가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옳다고 인정하고 있습니다.”

 

6년 후, 위에서 언급한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보다 심각한 (전례상의) 오해와 오류가 확인되었다고 하겠다. “사람들로 하여금 공의회 후의 맥빠진 전례를 느끼게 하는 차디찬 분위기, 알맹이 없는 인위적인 내용을 가진 진부한 평준화 취향에서 비록한 전례의 지루함이…….”

 

미사 중의 언어

 

그의 견해로는 전례 부분은 - 전문가의 작업과 구체적인 적용에서도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순수한 문헌이 말하는 바와 그것이 이해되고 적용된 방법간의 차이가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는 사례의 하나입니다.”

 

너무도 잘 알려지고 또 남용의 위험에 처한 한 예는 라틴어의 사용이다. 이에 관하여 공의회 문헌은 명백히 말한다. “특수법을 제외하고 라틴어 사용은 라틴 의식에 있어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전례 헌장 36조). 뒤이어 공의회 교부들은 주위를 환기시킨다. “신자들로 하여금 미사 통상문 중에 그들에게 속하는 부분을 역시 라틴어로도 외우거나 노래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전례 헌장 54조). 훨씬 뒤에서 , 동일하 sans서에서는 “여러 세기에 걸친 라틴 전례의 전통에 따라, 성직자들은 성무일도를 바침에 있어 라틴어를 보존하여야 한다”(전례 헌장101조 1항 1문).

 

라칭거 추기경과의 대화의 목적은, 서두에 말했듯이, 나(메쏘리)의 견해를 전면에 내세우는 게 아니고, 물음에 대한 그의 의견을 소개하는 데 있다.

 

그럼에도 - 비록 하찮은 것일지라도 - 개인적으로 나는 ‘미망인’이나 ‘고아’처럼 영영 사라져 버린 과거만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의 의견을 좀 특별난 것이라 본다. 나에게는 다되어 가는 마지막 단계에서 알게 된 라틴어에 대한 양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의회의 문헌들을 읽으면 라칭거 추기경의 관심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전례상의 언어의 문제로만 한정한다 하더라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문헌과 그에 기준하여 나오는 구체적인 적용례들이 명백한 대조를 보이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다.

 

한탄하자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균열이 도대체 어느 정도로 진행된 것인지 높은 양반으로부터 들어 보자는 것이다.

 

추기경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것도 - 근년 들어 유감스럽게 빈번해진 - 공의회의 문헌, 교회의 정통 구조와 그 예식 간의 모순, 한편으로 현실의 순간적인 사목상의 필요와 다른 한편으로 일정한 성직자 계층의 구체적인 응답 간의 모순의 사례에 속합니다. 그렇지만 전례상의 언어는 어느 때이건 붓적인 사안이 아닙니다. 라틴계 서방과 그리스계 동방 간의 분열의 발단에는 언어적으로 서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전례상의 공통어의 소멸은 필시 다양한 가톨릭 지역에서의 원심적인 힘을 강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즉각 덧붙였다. “옛 공통의 전례 언어의 빠르고 거의 전면적인 포기를 밝히려면 기본적으로 서양에서 일어난 공공 교육의 문화적 변이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60년대 초만 하더라도 저는 교수로서 독일 고등학교를 마친 젊은이들에게 라틴어 교재를 읽힐 수 있었지요. 오늘날은 이미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양한 전례 형태

 

마침 라틴어 이야기가 나왔다. 우리들의 대화가 있덨던 날에는 1962년의 로마 미사 경본에 따라 라틴어로 미사를 봉헌하고자 하는 사제들에게 문제된 ‘관면’을 허용하는 (1984년 10월 3일자로 된 경신성 장관 대리가 서명한) 교황의 결정은 아직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것은 (명백히 한정된 것이라고는 해도) 앞 시대의 형식에의 회귀 가능성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서한은 말하기를 경본의 적법성과 교의적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의 관점에 어떤 형식으로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공적으로도 분명히 할 때만, 그리고 옛 예절에 따른 미사 성제는 “지역 주교가 예외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한 소교구 성당에서 행해져서는 안되며, 주교에 의해 지정된 성당과 경당에서 행해질” 때만이라는 제한이 가해져 있다. 이러한 제한과 엄격한 경고(“어떤 방식으로도 관면의 부여는 전례 개혁의 충실한 관할에 영향을 미치는 의도로 전용되어서는 안된다.”)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결정은 논쟁을 불려일으켰다.

 

나도 - 사실을 말하자면 - 당황했다. 그러나 나는 라칭거 추기경이 브릭슨에서 말한 바를 보고해야 한다. 비록 그가 - 명백히 벌써 결정되어 있었고 확실히 그가 잘 알고 있었던 - 그 조치를 언급하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에게 하나의 그러한 가능성을 암시했다. 그에게 이 ‘관면’은 ‘회복’의 연장 선상에서 봐야 할 것이 아니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그 해석자가 강조한 저 ‘정당한 다원주의’의 풍토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추기경의 말을 직접 들어 보기로 하자.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에는 교회 안에서 예식과 전례의 다양성이 허용되었습니다. 트리엔트의 교부들은 로마 시의 전례를 전교회에 명하고 서구의 전례 가운데 200년 이상 지속되었던 전례만 끌어들였습니다. 이를테면 밀라노 교구의 암브로시오 전례가 그러합니다. 그것이 많은 신자들의 종교성을 촉진하고 일정한 가톨릭 계층의 경건함을 존중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면, 저는 개인적으로는 옛 상태로의 회귀, 즉 일정한 전례상의 다원주의를 지지하고 싶습니다. 물론 개혁된 예식의 정당성이 명시적으로 확인되고 공의회 이전 전례를 허용하는 예외적인 사례의 범위와 종류가 분명히 주어졌을 때만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한 달 이내에 실현되도록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희망 이상의 것이었다.

 

그 밖에 그는 그의 ‘신앙의 향연’에서 상기시키기를, 전례의 영역에서 ‘가톨릭 교의의 공번성’은 ‘획일성’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지적하였다. “기묘하게도 공의회 후의 다원주의는 적어도 한 가지 점에서만, 즉 그것이 표현의 일정한 높이를 이제는 허용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획일적인 것으로 되어 버렸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가톨릭 전례의 통일성 안에서 가능성의 다양성은 인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거룩한 것을 위한 자리

 

일반적인 문제로 돌아가자. 장관은 현대의 일정한 전례에 무엇을 책하고 있는 것인가?(아니면 어쩌면 공의회 후 시기의 일정한 남용이 줄어든다는 견해를 갖고 있기에 오늘날의 전례를 탓하지 않는 것인가?)

 

“제가 보기에는, 몇몇 사람들은 그들이 지나치게 멀리 그리고 너무 빨리 나아갔다는 것을 알아차림으로써 새로운 성찰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덧붙인다. “이 새로운 균형 감각은 현재로서는 몇몇 엘리트들에 한정된 것입니다. 일부의 전문가 사이에만 있는 것인데 그들에 의해 형성된 파도가 이제 막 자리를 잡으려 하고 있습니다. 전문가들은 오늘날에는 다른 입장을, 경우에 따라서는 전통적인 입장까지 받아들이는데, 다수의 사제들과 다수의 평신도들은 뒤늦게야 전문가들이 과거에 대변했던 것을 전위적인 것으로 여기고 이에 열중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라칭거에 따르면 완전히 새로 발견되지 않으면 안될 것은 전례 예식의 “미리 주어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는, ‘동일하게 남아야 할’, ‘흔들리지 않는’ 성격”이다. 그는 상기한다. “신자들이 예식이나 미사 참례를 준비할 때면 어떤 방식으로 그날 사제의 ‘독창성’이 발산될 것인지 물었던 해들이 있었습니다. ……” 그는 회상한다. 이것은 공의회의 아주 엄격하고 장엄한 경고에 위배되는 것이다. “거룩한 전례를 조절할 권한은 오직 교회의 권위 즉 교황청과 또한 법의 규정에 따라 주교에게만 있다. …… 그러므로 그 외의 어떤 이도, 비록 사제일지라도 자기 마음대로 전례에 어떤 것을 첨가하거나 혹은 삭제하거나 변경하지 못한다”(전례 헌장 22항).

 

추기경은 말한다. “전례는 천재적인 감독과 유능한 배우를 필요로 하는 쇼나 연극이 아닙니다. 전례는 ‘유쾌한’ 놀랄 거리나 관심을 끄는 ‘발상’으로 살지 않고, 장엄한 반복으로 사는 것입니다. 전례는 현실적인 것과 그 덧없음의 표현일 수 없고, 거룩한 신비의 표현입니다. 전례가 참으로 공동체의 것이 되려면 공동체 전체에 의해 ‘만들어’ 져야 한다고 많은 이들이 생각하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시각적인 효과와 여흥의 종류에 따라 전례의 ‘성공’을 측정하는 결과를 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해서, 우리들이 ‘만드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자리에서 우리 모두 함께 만들어 낼 수 없는 ‘어떤 일이 벌어진다.’는 사실로부터 나오는 전례의 고유성(Proprium)은 소멸해 갔지요. 전례에는 교회 전체로서도 부여할 수 없는 힘,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전례 속에서 선언되는 분은 ‘절대 타자’(der Ganz-Andere)입니다. 그분은 공동체(주인이 아니고 순수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 종)를 통해 우리에게 오시는 것입니다.”

 

라칭거는 계속한다. “가톨릭 신자에게 전례는 공동의 고향입니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원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식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축하심이 드러나는 것이므로, 전례는 ‘미리 주어져’ 있고 ‘동일하게 남아 있어야’되는 것입니다.” 이에 반해 ‘규칙에 얽매인 케케묵은 경직성’이라 표현한 것, 사람들이 그것은 ‘창의성’을 박탈하는 것이라고 비난한 것에 대한 반항은 전례를 ‘너 알아서 하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고, 우리들의 범속함에 맞춰버렸기 때문에, 전례를 범속화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다른 문제점에 대해 라칭거는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공의회는 정당하게도 우리에게 전례란 또한 행의(actio)라는 것, 실행을 뜻한다는 것을 상기시켰고, 공의회는 신자들에게 ‘능동적 참여’(actuosa participatio)가 보증되도록 요구하고 있습니다.”

 

나는 말한다. “아주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는 확인한다. “그렇고말고요. 그건 의심할 바 없는 옳은 개념이지요. 그런데 그것이 공의회 이후 마음대로 해석되는 가운데 치명적인 축소를 보이게 된 것입니다. 즉 ‘능동적 참여’라는 것이 마치 식별할 수 있는 외적인 활발성 - 말하고 노래하고 강론하고 낭독하고 악수하는 것 -에만 있는 것 같은 인상이 생겨났어요. 그러나 공의회는 능동적인 참여 속에, 주님 말씀을 내면적으로 경청하는 것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참으로 깊은 인격적 참여를 허용하는 침묵도 넣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럭저럭 하는 동안 많은 전례에 침묵의 자취가 결여되게 되었습니다.”

 

교회 음악

 

여기에서 바로 추기경의 이야기는 교회 음악, 가톨릭계 서양의 전통 음악으로 이어진다. 가톨릭계 서양의 전통 음악에 관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동시에 ‘교회의 보배’요 따라서 전인류의 보배인 이것을 ‘최대의 주의’를 가지고 보존할 뿐만 아니라 보살필 것을 격려해 마지 않았다. 그런데 이것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가?

 

“공의회에서 정한 대로 하지 않고, 많은 전례학자들은 저 보배를 ‘밀교적’인 것이라고 단정하여 옆으로 제쳐놓았습니다. 그들은 ‘공의회 후의 전례의 어떤 계기에서나 누구에게나 이해하기 쉬움’의 이름으로 그 보배를 등한시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젠 ‘교회 음악’이 아니라 - 기껏해야 주교좌 성당에서의 특별한 행사로나 밀려났어요. - ‘실용 음악’, 가벼운 멜로디, 유행 음악이 통용되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추기경은 사람들이 공의회로부터 이론적으로나 실제상으로나 일탕했는지 어렵지 않게 내보일 수 있다. “공의회의 입장으로 보면 교회 음악 자체가 전례이며, 단순히 전례의 부가적 치장이 아닙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아름다운 것의 포기”가 사실상 “사목적 패배”의 원인임을 쉽게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사람들이 아름다운 것을 내쫓고 자신을 오직 ‘실용’에 내맡길 때 발생하는 경악할 만한 빈곤화가 갈수록 분명해지고 있습니다. 유일한 기준으로서의 ‘모든 이에게 알아듣기 쉬움’으로 후퇴하는 것이 전례를 참으로 보다 알아들을 수 있게 하고 보다 개방적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빈약하게 한다는 것은 경험이 가르치는 바입니다. ‘간소한’ 전례는 시시하거나 저급한 전례를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간소함에는 범속함에서 오는 간소함이 있고, 종교적, 문화적, 역사적인 풍요함에 기인하는 간소함이 있습니다.”

 

그는 계속한다. “여기서도 위대한 교회 음악을 ‘능동적인 참여’라는 이름으로 밀어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참여’는 정신과 오관을 통해 자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요? 경청하고 직감하고 감동하는 속에는 ‘능동적인 것’이란 정말로 아무것도 없는가요? 오늘날 우리 안에 이성적으로 의식화하여 표면에 드러나는 것은 우리의 전체에 비해 한낱 빙산의 일각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여기에는 인간적인 것의 왜소화, 말로 통할 수 있는 것에의 축소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이렇게 자문하는 것은 분명히 모든 이들이 노래부르는 데 반대하고, ‘실용 음악’은 안된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공의회로도, 사목적 필요성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편협성(오직 ‘실용 음악’만이라는)에 반대하는 것이지요.”

 

교회 음악 - 교회 안의 ‘선물 받은’ 아름다움의 현존을 나타내는 상징이라고도 생각되는 -에 관한 이러한 이야기는 요셉 라칭거가 특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만큼, 활기를 띠었다. “‘실용 음악’만 하는 교회의 비실용적인 것으로 전락하여 스스로 무용한 것이 됩니다. 교회에는 보다 높은 것이 맡겨져 있습니다. 교회는 - 구약의 신전에서 이야기되었듯이 - 인류의 가장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소리를 모아 하느님의 귀 앞에 울리는 ‘영광의 도성’이기도 해야 합니다. 교회는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평범한 곳으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교회는 창조주를 찬미함으로써, 우주로부터 창조주의 영광을 드러냄으로써, 우주를 영광스럽게 그리하여 우주를 아름답게, 살 만하게, 사랑스럽게 만듦으로써, 교회는 우주의 소리를 일깨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역시 여기서도 추기경은 라틴어와 관련해서 그랬던 것처럼 ‘문화적 변화’에 관하여, 특히 젊은이들에게서 볼 수 있는, 거의 ‘인류학적인 변화’에 관해 말한다. “젊은이들은 1960년대 초 이래 록 뮤직과 그런 부류에 속하는 산물로 그들의 음악적 청각이 손상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그는 독일에서의 자신의 사목적인 경험을 인용한다.), “젊은이들에게 옛 독일 합창을 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요 듣게 하는 것”도 오늘날에 와서는 어렵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어려움의 인정은 라칭거에게는 교회 음악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예술 전반과, 진리를 계시하는 그리스도교의 기능을 열렬히 옹호하는 데 하등의 장애가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의 유일한 참된 변호는 두 가지 논거로 한정될 수 있지요. 즉 교회가 배출한 ‘성인들’과 교회의 품에서 자란 ‘예술’입니다. 주님은 교회의 인간적인 역사에 유감스럽지만 매우 많았던 어두운 면을 정당화하기 위해 호교론이 만들어 낸 교묘한 구실을 통해서보다도, 거룩함을 통해서, 그리고 믿는 이들의 공동체 안에서 솟아난 예술의 숭고함을 통해서 더 확증되었습니다. 만약 교회가 앞으로도 세상을 변화시키고 더 인간적으로 만들어야 한다면, 교회는 그 전례 안에서, 부활의 사랑과 영광과 밀접히 맺어진 아름다움을 어떻게 포기할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값싸게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교회를 아름다운 것의 - 그러기에 진리의 - 보금자리로 만들어야지요. 아름다운 것이 없이는 세상은 지옥의 첫째 구역이 되어 버립니다.”

 

추기경은 (공의회 이후의 사상적 리더의 한 사람인) 유명한 한 신학자가 그에게 자신을 ‘미개인’으로 느낀다고 어렵지 않게 고백했음을 말하였다. 여기에 그는 이러한 의견을 덧붙였다. “예술, 시, 음악, 자연을 사랑하지 않는 신학자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것에 대한 이 맹목과 무감각은 어떤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그의 신학에 반영됩니다.”

 

장엄함은 ‘개선 영광 편중주의’가 아니다.

 

이 점에서도 라칭거 추기경은 ‘개선 영광 편중주의’(Triumphalismus)라고 비난하면서 옛 전례의 장엄함 가운데 많은 것을 간단히 내팽개쳤던 사고 방식을 조금도 납득하지 않는다. 그는 말한다. “전례의 장엄함으로 교회는 천주의 영광, 신앙의 기쁨, 오류와 어둠에 대한 진리와 빛의 승리를 표현하는 것인데, 이 전례의 장엄함은 조금도 개선 영광 편중주의가 아닙니다. 전례의 풍요함은 결코 어떤 사제 집단의 풍요가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이의 풍요함, 가난한 이들의 풍요함이기도 한 것이며, 이들은 사실 그 풍요함을 열망하기에 조금도 그것에 걸려 넘어지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민중 신심의 전역사는 가장 가난한 이들까지도 늘 본능적으로 그리고 자발적으로, 아낌없이 아름다움을 가지고 그들의 주님과 하느님의 영광을 현양하기 위해서라면 가장 필요한 것조차 포기할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에 관한 예로서 그는 자기가 지난번 미국 여행 때 들은 이야기를 꺼냈다. “뉴욕의 성공회 지도부가 새로운 주교좌 성당 건축 공사를 종결하기로 결정했어요. 그들은 그 성당이 지나치게 화려하여 신자들에게 실례가 된다고 여겨서, 신자들에게 - 결정에 따르면 - 이미 납부된 금액을 나누어 주도록 했지요. 그런데 그 돈을 거부하고 이 공사를 재개토록 요구하고 나선 것은 바로 그 가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경배하는 데 한도를 둔다든가, 하느님 앞에 서 있을 때, 그 장엄함과 아름다움을 포기할 수 있으리라는 이 유별난 생각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추기경의 고발은, 내가 제대로 이해했다면, 특정한 지적(知的)인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그들에게 고유한 귀족적, 엘리트적 발상법을 향한 것이다. 그들의 발상법은 ‘하느님의 백성’이 실제로 믿고 열망하는 것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어떤 현대적 신 성직자주의에 따르면, 인간의 문제는, 그들이 ‘거룩한 터부’에 의해 억압받는다고 느끼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건 기껏해야 위기에 처한 성직자들 자신의 문제일 따름입니다. 이와 달리 현대인의 비극은 갈수록 비종교적인 세상에서 희망없이 산다는 데 있습니다. 오늘날 퍼져있는 참된 요망은 세속화한 전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의 현존을 재인식하게 하는 예절을 통한 거룩한 것과의 새로운 만남에 대한 요망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은 또한 그가 다음과 같이 묘사하는 것을 향하고도 있다. “그레고리오 1세, 대그레고리오 교황에 따라 만든 모든 것은 데카당의 표지요, 하나의 뗏자국같은 것이니까 떼어 버려야 한다는 어떤 전례학 교수들의 낭만적 고고학주의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전례적 쇄신의 기준이라는 것이 ‘오늘날은 어떠해야 하느냐?’가 아니라 ‘과거엔 어떠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교회가 살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전례는 사람들이 중세기 이전에 로마에서 시작된 것이 화석일 수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중세의 교회는 (또는 다수의 경우에는 바로크 시대의 교회도) 폐지하기에 앞서, 주의 깊게 상세히 검토해야 할 전례 탐구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들은 여기서도 우리들에게 맡겨진 유산의 늘 더 나은 그리고 더 깊은 인식이라는 가톨릭적 원칙을 존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순현대화가 전혀 소용이 안되듯이 순고고학주의는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그리고 라칭거에게는 가톨릭 신자의 전례 생활은 ‘공동체적인’ 측면만으로 축소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즉 그것은 “공식의 전례에 속한 신심을 위한 곳임과 마찬가지로, 개인적 신심을 위한 곳이어야 합니다.”

 

성체 : 믿음의 중심

 

그리고 추기경은 덧붙인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전례가, 오직 ‘형제적 식사’라는 단일한 측면에서 파악되는 성체로만 한정됩니다. 그러나 미사는 빵을 함께 나눔으로써 주님의 최후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형제들 사이의 식사이기만 한 것이 아닙니다. 미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우리에게 당신 스스로를 내어 주시는 교회의 공동 희생입니다. 미사는 그리스도 희생의 성체적 재현입니다. 따라서 그분의 구속하시는 힘은 모든 인간들에게, 참례자들과 멀리 있는 이들에게, 살아 있는 이들과 죽은 이들에게 미칩니다. 우리들은 성체를 영하지 않아도 성체성사는 무가치한 것인 것이 아니라는 의식에 이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의식이 있음으로써 재혼한 이혼자들의 성체 허용과 같은 첨예한 문제가 그 답답한 짐을 극적으로 벗어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실 수 있으신지요?”

 

그는 설명한다. “만약 미사 성제가 형제들 사이의 공동 식사로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성체 배령에서 제외된 사람은 실제로 형제적 유대로부터 단절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미사의 완전한 이해로 들어간다면(형제적 식사와 동시에, 주님과 믿은 안에서 하나가 된 자를 위한 힘과 효과를 ‘그 안에’ 지니고 있는 주님의 희생), 저 ‘빵’을 먹지 않는 자도 마찬가지로 다른 모든 이에게 배분된 은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라칭거 추기경은 자신의 서명이 들어간 신앙교리성의 최초의 공식 문서의 하나를 미사 성제와 그 (“봉사의 사제직, 즉 교계적 사제직”에서 축성된 자만이 해당된다. 교계적 사제직은 공의회가 새롭게 확인하듯이 “정도의 차이로뿐 아니라 본질적 차이로” ‘신도들의 일반 사제직’과 구별된다(교회 헌항 10항).) ‘봉사자’의 문제에 바쳤다. ‘성체와 교계적 사제직의 필연적 유대를 분리하는 시도’가 있다고 지적하고, 그는 이 성사의 신비에 관한 모종의 ‘범속화’의 또다른 한 측면을 본다.

 

감실 앞의 성체 조배를 폐지하는 데서 라칭거는 바로 이와 똑같은 위험을 본다. 그는 말한다. “성체 조배가 성찬의 심화라는 것을 사람들은 망각했습니다. 성체조배는 ‘개인주의적인’ 신심이 아니라 성체를 영하는 순간의 지속 또는 준비인 것입니다. 신자들에게 그토록 사랑받는 성체 거동의 관행도 보존해야 합니다(제가 있을 때 뮌헨에서는 수만 명이 참가했어요.). ‘전례 고고학자들’은 이 성체 거동이 제1세기의 로마 교회에는 없었다는 것을 들어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서 제가 이미 말한 바를 되풀이합니다. 가톨릭 백성의 신앙 감각에는, 백성들에게 맡겨진 유산에서 나오는 모든 귀결을 세기를 거듭하면서 심화시키고 빛나게 할 가능성이 승인되어야 합니다.”

 

“미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라칭거는 덧붙인다. “성체성사는 우리들의 전례 생활의 중심되는 핵입니다. 그러나 성체가 전례 생활의 중심일 수 있으려면, 신앙 생활의 전체가 필요한 것입니다. 전례 개혁의 성과에 관한 모든 연구가, 미사의 사목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는 미사를 평가 절하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왜냐하면 미사가 홀로 떨여져 다른 전례적 행위에 의해 준비되지도 심화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체는 다른 성사를 전제로 하고 다른 성사들을 지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체는 개인적인 기도, 가정에서의 기도와 전례 외적인 공동체의 기도를 아울러 전제하고 있습니다.”

 

“특히 어떤 기도를 생각하시는지요?”

 

그는 말한다. “성체라는 큰 흐름 속에 언제고 새롭게 들어가는, 그리스도인의 가장 심오하고 가장 효과있는 두 가지 기도를 생각합니다. ‘십자가의 길’과 ‘묵주 신공’이지요. 우리들이 오늘날 아시아적인 무서운 종교적 관습의 유혹에 직면해 있다면, 그 이유로는 우리들이 이 기도들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도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만약 묵주 신공을 바치게 되면, 전통이 가르치듯이, 조용한 리듬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리듬은 우리를 유순하게 하고 균형잡히게 하며 평화의 대표자, 즉 예수, 마리아의 복되신 아들을 줍니다. 조용한 마음의 평화 속에 생명의 ‘말씀’을 감추시고, 사람이 되신 말씀의 어머니가 되실 수 있었던 마리아, 그러기에 마리아는 참된 전례 생활의 이상입니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우리들 예절의 과제와 최고의 목적 - 즉 인간의 성화가 비롯되는 하느님의 영광 -을 지시하시기 때문에도 ‘교회의 어머니’이십니다.”

 

<사목, 1993년 9월호 / 인천교구 시노드 홈페이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