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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WCA 위장결혼식 '홍성엽'씨 사후 8년만에 무죄

by 파스칼바이런 2013. 3. 28.

YWCA 위장결혼식 '홍성엽'씨 사후 8년만에 무죄

연합뉴스 | 입력 2013.03.28 04:35

 

 

(서울=연합뉴스) 이상현 기자 = 지난 1979년 이른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서 신랑 역할을 맡았던 고(故) 홍성엽(1953∼2005)씨가 학창시절의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에 대해 사후 8년 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를 받았다.

 

서울고법 형사3부(임성근 부장판사)는 1974년 대통령 긴급조치 제1호 위반 혐의로 징역 5년의 확정 판결을 받은 홍씨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28일 밝혔다. 재판부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는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인 표현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 헌법상 보장된 청원권을 심각하게 제한해 위헌"이라며 "피고인의 사건은 범죄가 되지 않는 경우에 해당돼 무죄를 선고한다"고 판시했다.

 

연세대 문과대학 사학과 73학번인 홍씨는 1974년 학내 역사 연구 모임인 '동곳회'에 가입해 유신헌법 반대와 긴급조치 철회를 주장하는 내용의 벽보를 제작, 교내에 배포한 혐의로 기소됐다. 홍씨는 비상고등군법회의에서 징역 5년의 확정판결을 받고 옥살이를 하다가 이듬해 석방됐다. 이후 홍씨는 1979년 11월24일 '명동 YWCA 위장결혼식'에서 신랑 역할을 맡아 다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란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신군부 세력에 반발해 윤보선, 함석헌 등의 주도로 서울 YWCA 회관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펼쳐진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를 말한다.

 

당시 신군부 세력에 반기를 든 첫 군중집회로 평가받는다.

 

2005년 홍씨가 투병 끝에 지병인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2010년 그의 동생이 재심을 청구했으며, 법원은 작년 11월 '당시 수사관들이 수사 과정에서 피고인에게 가혹행위를 가한 사실이 인정된다"면서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다. 한편 헌법재판소는 지난 21일 유신체제하 박정희 정권에서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된 긴급조치 1·2·9호에 대해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린 바 있다.

 


 

 

'YWCA 위장결혼식' 홍성엽 씨 사후 8년 만에 무죄

 

서울고등법원 형사3부는 지난 1974년 이른바 'YWCA 위장결혼식' 사건과 관련해 긴급조치 1호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을 받았던 고 홍성엽 씨에 대해 사후 8년 만에 열린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재판부는 "대통령 긴급조치 1호가 민주주의의 본질적 요소인 표현의 자유와 신체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해 헌법에 위배된다"며 무죄를 선고한다고 밝혔습니다.

 

연세대 사학과 73학번인 홍 씨는 지난 1974년 학내 역사 연구 모임인 '동곳회'에 가입해 유신헌법 반대와 긴급조치 철회를 주장하는 내용의 벽보를 제작해 교내에 배포한 혐의로 기소돼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복역했습니다. 홍 씨는 또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신군부 세력에 반발해 윤보선, 함석헌 등의 주도로 서울 YWCA 회관에서 결혼식을 가장해 펼쳐진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에서 신랑 역할을 맡았다가 옥고를 치렀습니다.

 

홍 씨는 지난 2005년 지병인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난 뒤 동생이 재심을 청구했으며 법원은 지난해 11월 "당시 수사관들이 피고인에게 가혹행위를 가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재심 개시 결정을 내렸습니다.  앞서 헌법재판소는 유신체제 아래 박정희 정권에서 민주화 요구를 탄압하는 도구로 사용된 긴급조치 1·2·9호에 대해 지난 21일 재판관 전원 일치로 위헌 결정을 내렸습니다.

 


 

 

YWCA 위장결혼식 홍성엽씨 별세

한겨레 | 입력 2005.10.05 22:02

 

 

 

[한겨레] 1979년 박정희 정권 붕괴 이후 최초로 신군부에 정면으로 도전했던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서 신랑역을 맡았던 홍성엽씨가 5일 오전 10시30분 서울 강남성모병원에서 백혈병으로 별세했다. 향년 53.

 

연세대 사학과 73학번인 고인은 재학 시절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구속됐다 석방됐으며, 와이더블유시에이 사건으로 두번째 옥고를 치렀다.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민주화운동 단체에서 김근태 현 보건복지부 장관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헌신했다. 당시 민주화운동 인사들 사이에서 '꽃미남'으로 불릴 정도로 외모가 준수했던 그는 결혼을 하지 않고 독신으로 지내다 5년 전 발병해 힘든 투병생활을 해왔다. 장례식은 7일 오전 9시30분에 치러지며, 장지는 충북 충주시 노은면 선산이다.

 

조기원 기자 garden@hani.co.kr ⓒ 한겨레(http://www.hani.co.kr),

 


 

 

[사회]민주주의와 결혼한 '영원한 신랑'

주간경향 | 입력 2005.10.14 10:32

 

 

 

YWCA 위장결혼식 주인공 홍성엽씨 타계… 1988년 운동권 떠나 '도인'으로 살아그는 끝내 '영원한 신랑'으로 남았다. 26년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의 주인공 홍성엽씨가 지난 10월 5일 지병인 백혈병으로 53년의 짧은 삶을 마감했다. '신랑'의 임종을 지킨 사람은 '신부'가 아니라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몇몇 동지들이었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란 박정희 대통령 사망 이후 신군부 세력에 반기를 든 첫 군중집회이자 시위를 말한다. 10·26 이후 재야·운동권의 정세 판단은 두 갈래로 나뉘었다. '결국 문민화 쪽으로 갈 것이니 과격행동을 자제해야 한다'는 신중론과 '심상찮은 신군부 세력의 등장을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는 강경론이 맞섰다. YWCA 위장결혼식은 후자가 대세를 이루면서 당시 청년세력인 민주청년협의회(민청협) 주도로 결행됐다.

 

계엄 하였던 당시 당국의 허가를 얻어 집회를 여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민청협은 결혼식을 위장해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보궐선거 저지 민주화 촉구대회'를 열기로 했다. 일시는 1979년 11월 24일 오후 5시 30분, 장소는 서울 명동 YWCA 1층 강당, 대회장 함석헌, 주례 박종태씨(전 공화당 국회의원) 등 모든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제가 희생할 때가 왔습니다"

 

문제는 주인공인 신랑을 누가 맡느냐는 것이었다. 가장 위험한 역인 데다 본인은 물론 가족·친지까지 끌어들여야 하는 신랑을 맡겠다는 자원자가 없었다. 이때 "제가 희생할 때가 왔습니다"라며 나선 사람이 바로 민청협에서도 막내 축에 드는 홍성엽씨였다.

 

홍씨는 서울 태생으로 보성중·고를 나와 1973년 연세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전형적인 서울 양반 집안의 자제로 젠틀한 '꽃미남'형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자기관리에 엄격하고 과묵한 스타일"로 기억한다. 출신 성분이나 성향으로 봐서는 운동권에 몸담을 인물이 아니었다. 가족이나 대학시절 선후배 동료들이 기억하는 그의 면모는 오히려 '세상사에 초연한 도인'의 풍모였다.

 

하지만 시대 상황은 그에게 고고한 삶을 허락하지 않았다. 유신 첫 세대인 그는 학내 운동권의 주류인 한국문제연구회의 후신 '동곳회'에 가입해 활동한다. 2학년 때인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이 터진다. 이때 그는 같은 과 1학년 후배인 조형식씨(전 MBC 뉴미디어팀 차장)와 함께 학내에 벽보를 붙인 일로 구속돼 5년 징역형을 받는다. 연세대 민청학련 사건의 핵이었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김영준 전 사료관장과 송무호 현 기념사업본부장에 따르면 그의 행동은 조직적인 것이 아니라 '돌발적이고 자발적인' 것이었다.

 

그와 민청협 활동을 함께 했던 최열 환경재단 상임이사는 이에 대해 "다른 사람이 안 하려는 일은 늘 그가 하겠다고 나섰다"고 회고한다. 위장결혼식의 신랑역을 자청한 것도 그의 이런 성격에서 비롯된 것 아니겠느냐는 해석이다. 즉, 시대 상황이 달랐다면 벽보를 붙이지도, '가짜 신랑'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신랑이 확정되자 신부는 가공인물인 윤정민으로 정해졌다. 이들의 염원인 민정(民政)의 글자를 뒤집어 이름을 '정민'으로 한 것이다. '홍성엽군과 윤정민양이 여러 어른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라는 청첩장이 재야·운동권은 물론 홍씨의 친지들에게 전달됐다.

 

위장결혼식 전 홍씨는 어머니에게 "큰일을 하고 죽어야 하는데 동의해주셔야겠다"며 그 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는 일이 어떻게 될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묵인했다. 여동생 홍성재씨(50)는 "담당 형사가 몇 번이나 찾아와 '아들이 정말 결혼하느냐'고 물었다"며 "그때마다 어머니께서 분명히 '한다'고 대답했다"고 말했다.

 

대회 당일 홍씨 부모와 여동생은 정장을 하고 참석했다. 그 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신랑 입장'을 끝으로 결혼식은 '통대선거 저지대회'로 돌변하고 무자비한 연행과 고문이 자행됐다. 연행자 140여명에 대한 참혹한 고문은 재판을 통해서도 드러났고, 그를 비롯해 백기완·이우회·최열·양관수씨 등 14명이 구속돼 실형을 받았다. 윤보선 전 대통령과 함석헌·김병걸씨 등은 불구속기소됐다.

 

홍씨 가족이 '결혼식'을 마치고 귀가하니 담당 형사가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신랑' 홍씨가 보안사에서 당한 고문의 강도는 그 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진다. 하지만 그는 계엄군법회의 재판의 최후진술에서 "폭행당한 내용을 전부 말하는 것은 군의 체면을 위해 그만두기로 하겠다"며 말을 아꼈다.

 

민주화 투사보단 '고결한 삶'

 

1년여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홍씨는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이 의장으로 있던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에서 활동했다. 민통련 분열 후 1987년 대선 때는 백기완 후보 진영에 몸담기도 했다. 하지만 이를 끝으로 그는 운동권을 떠나 세상을 뜰 때까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운동권을 떠난 뒤 그는 원래의 자신으로 되돌아갔다. 국선도·천도교 등 종교적·도인적 삶에 심취했다. 그와 민청협 활동 등을 같이 했던 문국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상임이사에 따르면 도인으로서 그는 손을 대지 않고 다른 사람을 진맥할 정도로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

 

의료보험증을 만들지 않을 정도로 건강했던 그가 백혈병 진단을 받은 것은 1997년이다. 골수이식수술 등 2차례 수술을 하며 8년을 투병하는 동안에도 그는 주변에 알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철저히 사회와 단절한 채 지낸 것이다.

 

홍씨가 운동권과 절연한 이유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와 가장 터놓고 지낸 여동생 홍성재씨조차도 "누구도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할 정도였기 때문이다. 그를 잘 아는 주변 동료들은 "그가 투사가 된 것은 시대 상황 때문이지 본래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그가 운동과 결별한 1988년은 직선제 헌법에 의해 노태우 정부가 들어선 해였다. 비록 가짜 신부이긴 하지만 자신의 반려자인 윤정민, 즉 민정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진정 자신이 살고 싶던 삶으로 복귀함으로써 상상의 신부인 민주주의와 달콤한 결혼생활을 시작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민주화 투사로서보다 '고결한 삶'으로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다. 착하고 순수하고 자기절제가 강한 그를 기억하는 인사가 많기 때문이다. 최열 상임이사는 "소위 운동하는 사람에게는 특별히 부족한 점이 있는데 그는 그런 게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결코 남의 신세를 지지 않는 성격은 투병 중에도 여실히 드러났다.

 

동생 홍성재씨는 "오빠가 마지막 3개월 동안 거동하지 못할 때 정말 보고 싶은 사람들은 만나봐야 하지 않느냐고 했지만 한사코 반대했다"며 "장례도 조용하게 치른 뒤 화장해 충주 선산의 나무 밑에 뿌려달라고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뜻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의 장례는 민주사회장(장례위원장 오충일)으로 치러졌다. 이해찬 국무총리,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 등 과거 민주화운동을 함께 했던 많은 동지들이 그의 빈소를 찾았다. 그의 유해는 마석 모란공원에 안장됐다. 민주주의와 결혼한 영원한 신랑, '운동권 꽃미남'의 고결한 삶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

 

<신동호 편집위원 hudy@kyunghyang.com> ⓒ 경향신문 & 미디어칸(www.khan.co.kr)

 


 

 

민주주의와 결혼’ 홍성엽씨 28년간 쓴 '생전 일기' 책으로

한겨레 | 입력 2006.10.25 22:56

 

 

 

[한겨레] 70~80년대 숨쉬기조차 힘들 만큼 자유를 억압받던 한국 사회의 모습을 깨알 같은 글씨로 생생하게 기록한 한 운동가의 일기가 발견돼 빛을 보게 됐다. 1979년 계엄 당시 결혼식으로 가장한 민주화 시위였던 '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위장 결혼식 사건'에서 신랑 구실을 맡았던, '민주주의와 결혼한 남자' 고 홍성엽씨가 주인공이다.

 

홍씨와 함께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던 지인들은 8년 동안 백혈병과 싸우다 지난해 10월 세상을 떠난 홍씨의 유품을 정리하다 1977년부터 2005년까지 써내려간 일기를 발견했고, 성금(061-01-144003, 농협 김학민)을 모아 10월 말께 책으로 펴내기로 했다.

 

1979년 9월26일치 일기를 보면, 성산대교 공사를 위해 작은 가게를 강제로 철거하는 장면이 나온다. 발을 동동 구르던 집주인 아주머니는 식칼을 꺼내 자해를 시도하다 결국 기절하고 말았다. 다섯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는 "엄마, 엄마" 하며 울고만 있다. "집을 헐던 사나이들도 역시 같은 서민들이었지만, 먹고살기 위해 하는 일들이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에 스스로도 긍지를 가질 수 없었다. 멋쩍고 무표정한 그들이었다."

 

같은해 9월22일치 일기를 보면, '고난받은 근로자를 위한 기도회'에서 동일방직 노동자들이 연극 공연을 한 뒤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들에 의해 참석자들이 연행되고 두들겨 맞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조화순 목사도, 백기완 선생도, 문익환 목사의 부인 박용길 장로도 무참히 구타를 당하며 연행됐다.

 

홍씨는 이날 일기 끝에 이렇게 썼다. "우리는 이렇게 폭력 앞에서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단 말인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몇배, 몇십배로 되돌려줄 것이다. 하룻밤 자고 나면 이 울분과 분노와 슬픔이 잊혀질까 두렵다." 그가 꼼꼼히 하루하루의 기록을 남긴 이유다.

 

유신재 기자 ohora@hani.co.kr

 


 

 

'YWCA 위장결혼식' 홍성엽의 일기

연합뉴스 | 입력 2006.11.15 16:34

 

 

'맑은 영혼 홍성엽' 출간

 

(서울=연합뉴스) 김정선 기자 = 1979년 11월 'YWCA 위장결혼식' 사건에서 신랑 역을 맡았던 고(故) 홍성엽(1953-2005)씨의 일기와, 동학의 역사적 배경과 원리 등에 대해 그가 집필한 '동학'을 함께 엮은 유고집 '맑은 영혼 홍성엽'이 출간됐다.

 

홍씨는 연세대 사학과 2학년이던 1974년 유신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다음해 석방됐으며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이후 재야인사들이 대거 반정부 시위를 벌였던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또 다시 수감됐다. 이후 민주화운동청년연합 등 사회단체에서 재야 인사들과 반독재 민주화 운동에 투신했던 홍씨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으며 동학에 심취해 연구활동을 펼쳤다.

 

백혈병으로 투병생활을 하다 지난해 10월 홍씨가 숨진뒤 그의 유품을 정리하던 지인들이 일기를 발견한 것을 계기로 이번에 책이 출간됐다. 홍씨가 몸 담았던 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 민청학련운동계승사업회, 민청련동지회 등이 책 발간에 도움을 줬다. 책에는 1977-1978년, 1986-2005년 홍씨가 경제적 불균형, 민주화운동, 근무환경 개선을 촉구하는 노동자 운동, 자신의 투병생활 등에 대해 쓴 일기가 실렸다.

 

"GNP의 고도성장을 추구하며 살아갈 이 시대. 목표한 바 대로 경제적 富를 지닐 수 있을 때 문제는 해결될 것인가? (중략) 현격한 불균형의 경제적 성장이 가져오는 가공스런 문제의 돌발에 예비해서 어떤 일들을 서둘러 해야 할 것인가? 밑바탕부터의 문제해결이 있어야만-현실 사회체제의 근본적 변화가 있어야만-더 이상의 불행으로 예측되는 일들이 문제로서 대두되지 않을 것이다."(1977년 1월18일) 일기와 함께 수록된 '동학'은 '경전으로 본 세계의 종교'(2001)에 실렸던 글이다. <학민사. 620쪽. 2만8천원.>

 

jsk@yna.co.kr

 


 

 

민주투사 '맑은 영혼 홍성엽'

뉴시스 | 입력 2006.11.19 08:52

 

【서울=뉴시스】1953년에 태어나 2005년 10월5일, 52세의 한창 나이에 백혈병으로 숨진 홍성엽의 유고집이다. 고인은 '운동권'이었다. 1974년 연세대 사학과 2학년 때 박정희 독재에 항거하다 민청학련사건으로 투옥됐다.

 

79년 전두환 독재구축 기도에 맞선 명동YWCA 위장결혼식에서 '가짜 신랑' 역을 맡은 이가 바로 홍성엽이다. 역시 가짜였던 주례는 함석헌(1901~1989)이다. 가짜 결혼식의 가짜 신랑은 이후 체포돼 고문을 당했고 다시 수감됐다.

 

짧은 생의 말년은 천도교의 가르침에 따라 수련과 연구에 정진했다. 고인의 친구 김시형씨는 "유고를 모두 포괄하여 보면, 고인이 살아남은 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얘기는 '人乃天(인내천)' 세 자가 아닌가 싶습니다. 고인은 자신만의 진솔한 내면적 기록인 일기에, 줄곧 사람이 곧 하늘임을 잊지 말자고 여러 번 거듭하여 썼기 때문입니다"고 적었다.

 

연세대 한국문제연구회, 민청학련운동 계승사업회, 민청련 동지회, 그리고 연세대 동문들의 도움으로 나온 책이다. 그의 일기와 저서 '동학'을 엮어 두꺼운 책으로 엮었다. 생전의 홍성엽을 따르고 사랑하는 동료와 선후배 그리고 여성은 많았다. 그러나 그는 '민주주의와 결혼한 남자'로 삶을 마감했다. <620면, 2만8000원, 학민사.>

 

신동립기자 reap@newsis.com

 


 

 

[단상] 서슬퍼른 유신정권 시절에..  

 79년도에 민주 투사들의 필연적인 위장결혼식을 한 이유

  - 김형덕 기자 -

 

1979년 11월 이른바 '명동 YW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불구속 기소된 윤보선 전 대통령이

80년 1월 공판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나서고 있다.

 

 

1979.10.26일 유신정권 종식후 민주화의 꿈은 부풀어 올랐다.

1979. 11.24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이 있었다.

 

[기자칼럼] 1979년 10월 26일 유신 정권이 종식되면서 민주화의 꿈은 부풀었다. 하지만 정치적 상황은 민주화운동 세력의 염원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어 갔다. 10월 27일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고, 11월 10일에는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유신헌법대로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하고 그 후 민의를 모아 개헌을 추진한다는 내용의 담화문을 발표하였다. 이에 각계에서는 유신 철폐와 계엄령 해제, 구속자 석방 등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1979년 11월 13일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조선투쟁위원회, 동아투쟁위원회 등 5개 단체가 윤보선 전 대통령 집에서 모임을 갖고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라는 제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긴급조치 9호와 계엄령 해제, 언론자유 보장, 양심범 즉각 석방·복권 등을 촉구하였다. 이 성명으로 이부영은 계엄포고령 1호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서남동, 김병걸, 이우정, 김찬국 등 해직 교수들이 연행되었다.  

 

이어 11월 15일에는 eyc가 유신체제의 조속한 청산과 민주사회 수립을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는데, 이 때문에 송진섭이 구속되었다. 11월 19일에는 정치범 석방을 요구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외신 기자들에게 발표한 윤반웅 목사가 구속되었으며, 유신 철폐와 학원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울대생과 연세대생의 시위와 유인물 살포로 학생 4명이 구속되기도 했다.

 

11월 28일에는 광주 ywca 연합기도회에서 광주기독교 연합회,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전남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전남지부, 민청협 전남지부 등이 공동명의로 통대에 의한 대통령 선거 반대와 민주화를 촉구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여 12명이 연행되기도 했다.

 

 

이러한 가운데 11월 24일, 명동에 위치한 ywca 1층 강당에 민청협의 홍성엽과 윤정민(가상인물)의 결혼식이 열렸다. 최소한 500여 명 이상의 사람들이 결혼식장을 가득 메운 가운데 신랑이 입장하였고, 그와 동시에 유인물이 살포되었다.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가 개최되어 통일주체국민회의를 통한 대통령 선출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취지문이 박종태(전 공화당 국회의원)에 의해 낭독되었고 통대 선출 반대, 거국민주내각 구성을 촉구하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이날의 통대선출저지국민대회는 함석헌을 대회장으로, 김병걸·백기완·임채정·박종태·김승훈·양순직 등을 준비위원장, 그 밖의 해직 교수, 종교인, 헌정동지회, 문인, kscf, 민청협 등을 실행위원으로 하여 조직되었는데, 이들은 유신체제의 전면적 청산, 유정회·공화당·통대회 해산, 거국민주 내각 수립, 김종필·이철승·이후락 등 유신체제 유지에 중추적 역할을 했던 이들과 선우휘(조선일보 주필)·이동욱(동아일보 사장)·한태연(유신헌법 초안자)·정주영(전경련 회장)·김영태(노총위원장) 등 부패특권분자들에 대한 준엄한 심판, 군의 정치적 중립, 외세의 간섭 거부 등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대회장 밖에서 이미 대기 중이던 계엄군이 참석자들을 닥치는 대로 끌어내어 연행하였고, 대회장을 빠져 나온 150여 명의 참석자들은 곧 코스모스 백화점 앞에 모여 “유신 철폐”와 “통대선거 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들 역시 계엄군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고, 일부는 체포되었다.  

 

이날 사건으로 연행자는 모두 140명에 달했으며, 14명이 구속, 4명은 불구속, 67명은 즉결심판에 넘겨졌다. 연행된 이들은 수일간 참혹한 구타와 고문으로 심각한 후유증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이 대회에 참가하고 난 뒤, 충북기장 월례교역자회의에서 이 사건을 폭로하면서 관련 유인물을 배포한 혐의로 정진동 목사와 조순형 전도사가 구속되었다. 감리교 청년 3명(박일성, 김준곤, 이승봉)은 대회의 선언문을 광화문 일대에 살포하려다 즉결심판에 넘겨지기도 했다.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위키백과 -

 

 

YWCA 위장결혼식 사건은 10.26 사건 이후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선출하려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발표에 반발하여 윤보선, 함석헌 등의 주도하에 1979년 11월 24일에 서울 YMCA 회관에서 개최되었던 대통령 직선제 요구 시위였다. 직접 시위는 계엄시의 군부와 경찰을 자극할 것으로 예상하여 결혼식을 가장한 시위였다.

 

전개 과정

1979년 10월 26일, 10.26 사건으로 대통령 박정희가 암살당하자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는 대의원 간선제로 국무총리 최규하를 후임 대통령으로 지명하려고 했고, 이 소식을 접한 재야 인사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면서 대통령 직선제, 유신헌법 폐지, 양심수 석방 등을 골자로 한 문민정부 수립을 촉구하는 대회를 열기로 하였다.

 

직접적인 시위는 계엄시의 군부와 경찰을 자극할 것으로 예상하여 홍성엽과 윤정민의 결혼을 가장한 위장 청첩장을 돌려 사전 준비를 하였다.

 

윤보선, 함석헌, 박종태, 임채정 등의 재야 인사들은 계엄군의 견제를 피하기 위해 대회장을 연세대 복학생인 신랑 홍성엽과 신부 윤정민의 결혼식으로 위장해 계엄군과 통일주체국민회의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 중 연세대 복학생 홍성엽은 실존 인물이었으나, 신부인 윤정민(타계한 윤형중 신부의 성씨에 민주주의 정부의 앞글자를 따서 지은 가상의 여성)은 가공의 인물이었다.

 

결혼식이 시작되고 실내에서 신랑이 입장할 때 민주화를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하였다. 장내에는 환호성과 박수 갈채가 울려퍼졌고 이내 윤보선과 함석헌 등을 각각 미행하던 경찰관들이 행사장에 난입하여 행사장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어 경찰관이 출동하였고 집회는 강제로 해산되었다. 집회 종료 후 경찰관에 의해 140명은 불구속 입건되었고, 주동 인물 중 윤보선, 함석헌 등은 소환조사 및 서면조사를 받았으며, 기타 주동자 14명은 용산구의 보안사령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였다.

 

 

뒷 이야기

 

민주화 운동 유공자 선정

당시 이 집회로 계엄군에 끌려갔던 154명은 국민의 정부 시절 세워진 민주화운동관련자 보상심의위원회에 의해 복권이 이뤄지는데, 주요 복권인사를 보면 아래와 같다.

 

2001년 10월 18일: 임채정, 박종태, 양순직, 이해동

2002년 6월 12일: 문동환

2003년 9월 9일: 김상현

 

신군부의 자작극설

과거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이었던 한 재야 인사의 증언에 따르면 그와 공화당 시절부터 친했던 보안사령부의 한 장성이 "대규모 집회가 일어나야 국민회의 측에서 대통령간선제를 재검토하게 될 것이고, 이를 위해 보안사에서는 집회를 묵인할 것이다"라는 말로 속임수를 썼다고 한다. 이 정보를 입수한 NCCK의 몇몇 인사들은 집회를 반대했지만, 이것이 함석헌을 비롯한 지도부에 전달되지 않아 참사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기타

사건을 주도한 주요 인물 중 윤보선은 수사에 협조하는 대신 참석자들의 형량을 낮추어줄 것을 탄원하여, 참석자들은 형량이 감경되었다. 그러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대한 정부의 강경 진압 의지는 곧 민주화 여부를 가늠하는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 당시의 주역들

 


 

 

[책갈피 속의 오늘]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

기사입력 2008-11-24 04:51 [동아일보]

 

 

'체육관 선거를 막아라.'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져 있던 1979년 11월 24일 오후 5시 30분 서울 중구 명동 YWCA 강당. 민주인사들이 결혼식을 가장해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 철폐와 계엄 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10·26 총성'과 함께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한 직후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은 박정희 대통령의 국장(國葬)이 끝났음에도 민주화 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979년 11월 10일 최 대행은 당시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이후 민의를 수렴해 개헌을 하겠다는 원론적인 수준의 담화문을 발표했다.

 

유신 반대운동으로 감옥에 다녀온 각 대학 제적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청년협의회(민청)'는 10·26사태 다음 날 긴급 운영위원회를 소집했다. 이들은 통일주체국민회의가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문제는 집회를 어떻게 여느냐는 것이었다. 계엄하이기 때문에 일체의 대중 집회가 불가능했으므로 궁리 끝에 결혼식 형식을 빌리기로 했다.

 

"18년 장기독재에 결연히 저항해 온 민주회복 투쟁이 그 최종적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는 이 역사적 시점에 서서 오늘 우리는 아직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선(先) 대통령 선출, 후(後) 개헌’이라는 기만적인 정치일정을 내걸고 유신독재의 연장을 획책하고 있는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고 민권의 승리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한 전 국민적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기 위하여 여기에 모였다."(‘통일주체국민회의 대선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에서)

 

그런데 대회장은 곧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백골단'이 뛰어들어 단상을 점거한 것이다. 한 달여 후인 12월 27일 계엄사는 '양심과 명분의 그늘 속에서 탐욕을 드러낸 정치집회'라고 이 사건을 규정하고 관련자 가운데 18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으며 계엄군법회의는 피고인 전원에게 징역 3년 등의 중형을 선고했다.

 

피고인과 변호인은 비상계엄과 계엄포고령 1호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최후진술과 변론에 나섰지만 이미 '전두환그룹'에 장악된 군법회의는 이를 묵살했다.

 

안영식 기자 ysahn@donga.com

 


 

 

[책갈피 속의 오늘] 1979년 YWCA 위장결혼식 사건

| 기사입력 2006-11-24 06:07 | 최종수정 2006-11-24 06:07   

[동아일보]

 

'연말' 하면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가 10대 뉴스다.

 

그것은 한 해 동안 국민이 느낀 희로애락을 대표하고 상징한다. 27년 전인 1979년의 한국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동아일보 선정 10대 뉴스의 제목도 '충격의 1979'.

 

①박정희 대통령 서거·최규하 대통령 취임·긴급조치 9호 해제 ②12·12사태(훗날 '12·12쿠데타'라고 불린다) ③부산 계엄령·마산 위수령 선포(지금은 '부마항쟁'이라 칭한다) ④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⑤YH사건·경찰 신민당사 진입 등등.

 

기념비적 민주화운동인 'YWCA 위장 결혼식 사건'(1979년 11월 24일)이 10대 뉴스에 포함되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이해될 만하다.

 

함석헌 咸錫憲, 1901.~1989 사상가,

민권운동가, 문필가

 

'홍성엽 군과 윤정민 양이 여러 어른과 친지를 모시고 혼례를 올리게 됨을 알려 드립니다. 즐거운 자리에 함께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1979년 11월 24일(토) 오후 5:30

※ YWCA 1층 강당(명동성당 앞)’

 

명함 크기의 이 작은 청첩장 500장이 계엄당국의 눈을 피해 재야 민주 인사와 학생들에게 은밀히 배포됐다. 신랑은 민주청년협의회 상임위원이었지만, 신부(윤정민·尹貞敏)는 가공의 인물. '즐거운 자리'는 결혼식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보궐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대회'였다. 400여 명의 참석자들은 더는 '체육관 대통령' '유신 대통령'을 용납할 수 없다며 "조속히 거국민주내각을 구성하라"고 외쳤다.

 

계엄사령부는 불법집회를 했다는 이유로 140명을 연행 조사해 14명을 구속하고 4명을 불구속 송치했다. 다음 해 1월 법정에 선 민주 인사들의 최후진술에는 '서울의 봄' '민주화의 봄'에 대한 기대와 염원이 여전히 녹아 있었다.

 

"군(軍)은 국민의사를 반영하는, 진실로 국민을 위한 군이 되어 달라."(홍성엽)

 

"(유신 독재 때는) 단지 유언비어로 징역 5년형을 받았다. 서울 중심가 한복판에서 감행된 이번 시위 가담에 징역 2년을 구형한 것에 감사한다. 앞으로는 이보다 더 큰 일을 저질러도 전혀 처벌을 받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최민하)

 

"이런 훌륭한 젊은 애국자들에게 상은 줄 수 없을지언정 처벌을 해야 하겠소?"(윤보선)

 

몇 달 뒤 신군부의 군홧발은 이들의 처절한 희망을 무참히 짓밟았다. 피로 물든 비극의 10대 뉴스를 양산하면서….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

 


 

 

YWCA 위장결혼식 사건(1979년)

작성일 : 2004-10-15 10:06:24

 

YWCA 위장결혼사건 관련 수경사의 조사를 받은 함석헌

 

“유신잔당 음모 분쇄” 첫시위 불길댕기다

  

유신의 몰락.

최규하 권한대행의 ‘先대선 後개헌’ 담화.

민주화 실현 기대에 불길한 조짐이 보였다.

‘체육관선거를 막아라’

 

유신반대운동 제적생들이 주축인 ‘민청’은 통대선거 저지 국민선언 집회를 열기로 결정했다. 79년 11월24일 명동 YWCA 강당에서의 위장 결혼식. 유인물을 뿌리고 구호를 외치는 순간 ‘백골단’이 들이닥쳐 집회는 아수라장이 됐지만 종로2가·청계천에서의 가투는 성공적이었다. 계엄사는 140여명을 연행, 유신독재보다 더한 고문으로 18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고 12·12로 권력을 찬탈한 전두환 일당은 사법체계를 무시하고 이듬해 1월25일 전원에게 징역 3년 등을 선고했다.

 

서울 궁정동의 10·26 총성과 함께 유신독재가 종말을 고한 직후 대통령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박정희의 국장(國葬)이 끝났음에도 민주화 일정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1979년 11월10일 그는 당시 유신헌법에 따라 통일주체국민회의(통대)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이후 민의를 수렴해 개헌을 하겠다는 원론적인 수준의 담화문을 내놓았다. 이는 매우 불길한 조짐이었다.  유신반대운동으로 감옥에서 청춘을 보낸 각 대학 제적생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민주청년협의회(민청)’는 10·26 다음날 긴급 운영위원회를 소집했다. 조성우·이우회·최민화·이석표·김경남·이신범·이명준 등이었다.

 

YWCA 위장결혼사건 당시 김병걸

 

그들은 모두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을 3년 이상씩 살고 나온 학생운동 리더들로 10·26 직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예비검거를 피해 도망다니는 신세였다. 이들은 독재자 박정희의 국장을 저지하고 통대가 체육관에서 대통령을 선출하지 못하도록 막는 일이 가장 시급하다는 점에 의견을 모았다. 문제는 집회를 어떻게 여느냐는 것이었는데, 계엄하이기 때문에 일체의 대중집회가 불가능했으므로 궁리끝에 결혼식 형식을 빌리기로 했다.

  

토요일인 11월24일 오후 5시30분 서울 명동 YWCA 강당. 일시와 장소는 쉽게 합의되었으나 신랑·신부를 정하는 게 문제였다. 마침 민청 상임위원인 홍성엽이 신랑을 자청하고 나섰다. 홍성엽은 얼굴이 희고 고운 꽃미남형이었다. 신부는 가상 인물 윤정민으로 정하고 청첩장을 명함 크기로 제작해 널리 뿌렸다. 사건 당일 홍성엽은 진짜 신랑 못지않은 차림으로 나타나 하객을 맞았다. 300석 남짓한 강당도 모자라 복도까지 가득 메운 하객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긴장되어 있었다. 드디어 신랑이 입장하자 여러 곳에서 유인물이 빠르게 손에서 손으로 건네졌다.

  

“18년 장기독재에 결연히 저항해온 민주회복 투쟁이 그 최종적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는 이 역사적 시점에 서서 오늘 우리는 아직도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선 대통령 선출, 후 개헌’이라는 기만적인 정치일정을 내걸고 유신독재의 연장을 획책하고 있는 유신잔당의 음모를 단호히 분쇄하고 민권의 승리를 확실히 보장하기 위한 전국민적 각성과 분발을 촉구하기 위하여 여기에 모였다.”(‘통대선거 저지를 위한 국민선언’에서)

  

결의문 낭독에 이어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회장 김정택이 상기된 얼굴로 ‘통대 선출 반대’ ‘거국내각 구성’ 등의 구호를 선창하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뒤편 출입구로부터 의자와 사람이 한꺼번에 넘어지면서 강당은 수라장으로 변했다. “수백명의 날렵한 쥐색 잠바들이 뛰어들어 단상을 점거하고 대회장을 덮쳤다. 의자가 날고 비명이 들리고 유리창이 깨지고 곤봉에 피가 튀었다.”(이시영의 시 ‘역사의 눈’에서)

 

YWCA 위장결혼사건 배후 조정 혐의로 수경사의 조사를 받은 윤보선 전대통령

 

‘쥐색 잠바’는 바로 경찰이 고용한 백골단이다. 이 아비규환 속에서 큰 키에 안경을 쓴 지성인 풍모의 훤칠한 신사가 뭐라고 큰 소리를 한번 지르고 냉정한 눈으로 침착하게 성큼성큼 출구로 걸어갔다. 그 당당함 때문이었을까. 얼떨결에 백골단이 길을 터주었고 현기영·이호철·조태일·박태순·이문구·이시영 등 문인들이 그를 따라 재빨리 대회장을 빠져나갔다. 그는 서울대 교수 백낙청이었다. 대회장을 용케 빠져나간 일부는 명동 입구 코스모스백화점 앞에서 이미 대기 중이던 민청의 양관수·이상익 등과 합세한다.

 

핸드마이크를 든 양관수가 번화한 명동 거리에서 “예수를 믿읍시다”라고 신호음을 외치자 ‘유신 철폐’ ‘통대선거 결사반대’ 고함이 울렸고 이들은 을지로 쪽으로 스크럼을 짠 채 200여m를 달려갔다. 같은 시각, 종로2가 화신백화점 앞과 청계천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벌어졌다. 대회장의 안쪽 팀과 바깥 팀으로 나누어 진행한다는 애초의 계획은 그런대로 성공적이었다.

  

그러나 계엄사가 연행자 140여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저지른 고문과 능욕은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김병걸은 몽둥이와 군화발에 짓밟혀 정신착란을 일으켜 실려나왔으며 백기완은 고문 후유증으로 이후 수년간 입원해야 했다. 군인들이 저지른 처참한 고문은 여러 사람을 폐인으로 만들었다. 신랑 역을 자임한 홍성엽은 그 이후 정상적인 사회활동을 할 수 없을 정도의 처절한 고통과 맞서야 했다.

  

사건 발생 한 달 후인 12월27일 계엄사는 ‘양심과 명분의 그늘 속에서 탐욕을 드러낸 정치집회’라고 이 사건을 규정하고 관련자 가운데 18명을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이미 12·12 군사반란으로 전두환 일당이 권력의 핵을 공고히 다진 후였음을 이들 구속자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YWCA 위장결혼사건 배후 조정 혐의로 수경사의 조사를 받고 나오는 윤보선 전대통령

 

이듬해인 80년 1월25일 계엄군법회의는 피고인 전원에게 징역 3년 등의 중형을 선고한다. 피고인들과 변호인 이돈명·박세경·이세중은 비상계엄과 계엄포고령 1호의 무효를 주장하면서 혼신으로 최후진술과 변론에 임했지만 이미 전두환 그룹의 손에 장악된 군법회의는 이를 간단히 묵살했다. 비상계엄과 계엄포고령 1호가 ‘당연 무효’라는 변호인들의 다음과 같은 주장은 비록 군법회의의 담장을 넘지 못했지만 3권분립이 제대로 된 정상적인 사회라면 법리상 숙고할 만한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79년 10월27일 오전 4시에 선포된 비상계엄은 계엄법 4조 비상계엄 선포요건을 갖추지 못했다. ‘전쟁 또는 전쟁에 준하는 사변에 있어서 적의 포위공격으로 인해 사회질서가 극도로 교란된 지역’에 선포해야 하는데 단지 대통령 유고라는 단 한 가지 이유로 평온한 밤을 지난 새벽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이는 사법심사의 대상이다. 또 같은 날짜의 계엄사령관 포고령 1호는 대통령권한대행의 승인없이 발해진 것이므로 그 효력을 인정할 수 없다.”

  

 

관련자들은 이런 요지의 최후진술을 했다. “현재의 비상계엄은 원인적으로 무효이다. 고문에 의한 허위 진술은 법정 기록이 될 수 없다. 이 재판 자체가 부당하며 역사는 우리에게 무죄를 선고할 것임을 확신한다.” (이우회)

 

“긴급조치 9호로 4년 징역을 살고 나왔다. 민주사회 건설을 위해 질경이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으로 좌절과 고난을 이기겠다.” (최열)

 

“유신을 비호해 온 세력은 헌법 개정의 주체가 될 수 없다. 10·26이 아니었더라도 박정권은 80년대에는 도저히 존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백기완)

 

“유신은 거짓과 허구의 역사이다.  우리 당대에 이 치욕을 바로잡지 않으면 다음 세대가 고통을 받는다.” (임채정)

 

“보안사에서의 고문에 경악한다. 수사받을 때 입은 우리의 군복은 피와 군화 발자국으로 범벅이 되었다. 우리 모두 귀와 눈, 입이 찢어졌으며 손발이 짓이겨졌다.” (이상익)

 

“이런 훌륭한 청년들이 있는 한 한국의 앞날은 희망이 있다. 치욕적 유신을 반대하는 애국자를 고문한 자들의 처벌을 요구한다.” (윤보선)

  

이들은 모두 감옥 안에서 ‘서울의 봄’과 5·17 소식을 접했다. 대법원은 80년 8월26일 군법회의 그대로 형을 확정한다.

 

세칭 YWCA 위장 결혼식 사건은 긴급조치 시대를 지나면서 대부분의 조직이 와해된 폐허 위에서 민청이 중심이 되어 조직적으로 집회와 시위를 결행한 유일한 경우이다. 이 소수정예 중심의 조직운동은 이후 80년대에 진입하면서 전국적인 조직화 단계로 발전하게 된다. 엄혹한 암흑기에 인간의 한계를 이겨낸 투혼을 역사는 잊지 않으리라.

  

-기획·집필에 참여한 사람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김명인(문학평론가)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정섭(" 미디어부 기자)

 

[ 출처 : 경향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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