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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24위 순교성지

124위 순교지를 가다 (11) 춘천교구 포천 순교지

by 파스칼바이런 2014. 8. 11.

124위 순교지를 가다 (11) 춘천교구 포천 순교지

목마른 이에게 영원의 샘물 전한 포천의 사도 순교자 홍인

 

 

 

▲ 포천 순교지 약도

 

포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군사도시다. 육군 제6군단 사령부와 예하부대가 주둔하고 있고, 옛 포천성당도 군 원조로 지었다. 옛 성당도 1955년 6군단장이던 이한림(가브리엘, 1921∼2012) 장군이 주도, 육군 1110야전공병단이 건립했다.

 

그런데 포천에서 순교한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123위 중 홍인(레오, 1758∼1802)의 시복이 결정되면서 군사도시 포천이 춘천교구의 첫 성지가 됐다. 지난 6월 1일 자로 포천성당(주임 윤헌식 신부)이 교구 ‘전대사 지정 성당’이 된 것이다.

 

‘교구의 첫 성지성당’이라는 영예를 안은 포천성당에 들어서니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길가에서 볼 때는 방주 형상의 특이한 성당이다 싶을 뿐인데, 경내로 접어드니 소박하고 아늑한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왕방산 기슭에 1992년 새로 지은 성당을 시작으로 홍인의 세례명을 따 지은 레오회관, 시원하게 펼쳐진 주차장, 그 사이를 돌아 오르면 나타나는 옛 성당이 하나로 묶이며 단아한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특히 옛 성당은 마치 로마의 고대 유적처럼 고풍스럽다. 비록 1990년 방화사건으로 소실돼 화강암 외벽체와 종탑만이 남았지만, 석조성당 건축의 전형적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어 2006년 등록문화재 제271호로 지정 보존되고 있다.

 

 

 

▲ 홍인 레오가 신앙을 증거한 포천현 관아 터 및 감옥 터 표지판.

 

 

‘포천의 사도’ 된 홍교만ㆍ홍인 부자

 

포천의 순교자는 홍인, 단 1위뿐이다. 그러나 홍인을 거론하면서 그의 부친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38∼1801)을 빼놓을 수 없다. 홍인이 복음을 접한 것도 홍교만을 통해서였고, 그가 포천에 살게 된 것도 한양에 살던 부친의 이주 때문이었다. 포천을 근거지로 근기(近畿), 곧 경기도 양근(현 양평)과 광주 일대 양반들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던 홍교만은 1791년께 고종사촌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1792)에게서 교리를 배워 아들에게 가르친다.

 

서학을 신앙으로 받아들인 건 홍인이 먼저다. 부친에게서 교리를 배웠는데도 홍인은 부친보다 먼저 신앙을 진리로 받아들인다. 입교 뒤 세속의 꿈을 접고 하느님을 섬기며 교리를 전하는 데만 열중하던 홍인은 아버지를 신앙의 길로 이끌어들인다. 1794년 말 주문모(야고보, 1752∼1801) 신부가 입국하자 홍인은 부친과 함께 찾아가 세례를 받고 5촌 당숙 홍익만(안토니오, ?∼1802),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 등과 교류하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 특히 하느님에 대한 그의 열정과 겸손한 성품은 포천을 복음화하는 원동력이 돼, 이로써 홍교만ㆍ홍인 부자는 ‘포천의 사도’가 된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로 이들 부자의 삶은 풍비박산이 난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 1760∼1801)의 책상자를 집안에 숨겨뒀다가 옮기던 중 발각된 것을 빌미로 체포됐다. 이미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돼 있던 홍교만은 한양에 끌려가 그해 4월 8일 서소문 밖 형장에서 참수된다. 아들 홍인은 포천현 관아로 끌려가 문초를 받다가 경기감영, 포도청, 형조를 거쳐 다시 고향 포천으로 보내져 1802년 1월 30일 참수형을 받는다.

 

 

▲ 포천본당 성지개발위원회 고문 이우숙씨가 신자들에게 포천 저잣거리 한내천변을 가리키며 신유박해 당시 홍인 레오의 순교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증거ㆍ순교 터는 폐허가 되고

 

홍인이 신앙을 증거하고 피를 흘린 옛 터전은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증거 터나 순교 터나 마찬가지다. 포천본당 성지개발위원회 고문 겸 성령쇄신봉사회장 이우숙(아가타, 62)씨와 회원들의 안내를 받아 증거 터와 순교 터로 향했다.

 

우선 증거터인 포천현 관아 터와 감옥 터는 구 군내면사무소 옆 부지다. 포천성당에서 2.57㎞, 현재의 포천시 군내면 청군로 3290번길 13(구읍리 530-4)이다. 군내면사무소가 새 청사를 지으면서 옛 관아 터 또한 황무지가 됐다. 200년의 세월은 박해자나 순교자나 다 잊은 듯하다. 포천본당에서는 포천현 관아 터에 표지판을 세워 홍인의 열절했던 신앙 증거를 기리고 있다.

 

발길을 순교 터로 돌렸다. 관아 터에서 순교 터까지는 2.16㎞. 지금의 포천경찰서와 소방서를 잇는 포천2교 인근 저잣거리의 한내천변 모래사장이다. 행정구역 명으로는 포천시 군내면 호국로 1564(구읍리 723-3). 모래사장이랄 것도 없다. 한창 우기여서 모래톱 사이사이엔 잡풀이 무성하고, 다리 밑에는 노숙자들이 터를 잡고 있다. 순교 터가 어디였을지 도무지 가늠되지 않는다. 그나마 포천성당에서 둑에 세운 표지판이 213년 전 그날의 순교 터가 한내천변이라는 비극의 아픈 역사를 일깨울 뿐이다.

 

그렇다고 순교 터에서 죽음이나 고통만 떠올릴 필요는 없으리라. 오히려 자신의 신앙에 크나큰 자부심과 기쁨을 안고 하느님 품에 안겼을 그의 순교신심을 기억하는 것이 더 뜻깊을 듯하다. 그래야만 그의 순교신앙을 오늘에 녹여내고 내면화하며 실천해 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순교 영성이 부활하는 신심 터전으로

 

포천본당은 홍인 순교자의 시복을 앞두고 성지개발위원회를 꾸렸다. 교구의 첫 성지성당이 되면서 성지 개발 문제가 현안이 됐기 때문이다.

 

우선 포천본당이 소속돼 있는 서부지구와 함께 ‘포천의 사도’ 홍인 레오 안내용 리플릿과 감사기도문을 제작했다. 아울러 시복 환영 현수막을 제작해 일제히 내걸었다. 또한 춘천교구 교회사연구소(소장 김주영 신부) 주최로 지난 7월 20일 레오회관에서 조광(이냐시오) 고려대 명예교수를 초청해 학술 심포지엄을 갖고, ‘포천의 사도 홍인 레오와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부자의 삶’을 조명하는 자리를 갖기도 했다. 시복식 후인 9월 27일 오전 11시 포천실내체육관에서 홍인 레오 시복 감사미사 및 순교자현양대회를 열고, 감옥 터 및 순교 터 순례 행사를 개최할 예정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전대사 지정 순례지성당으로서 포천본당은 순교신심 내면화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를 위해 △홍인 레오 안내용 리플릿 내용 숙지는 물론 △미사 후 홍인 레오 시복 감사기도 바치기 △순교 터ㆍ감옥 터 방문 기도하기 △교황 방한 자료집 「일어나 비추어라」 읽기를 생활화하고 있다. 더불어 매주 수요일이면 본당 성령쇄신봉사회를 중심으로 하느님의 종 홍인 레오를 위한 기도회를 열고 있다. 포천을 찾는 순례자들을 위해 성당 성모자상 앞에는 홍인과 그의 아버지 홍교만을 소개하는 표지판도 세웠다.

 

윤헌식 신부는 “준비도 제대로 못한 터에 시복이 결정돼 늦은 감이 있지만 홍인 레오 순례본당 조성을 위한 성지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홍인 레오 순교자에 대한 역사 자료가 아주 빈약해 어려움이 많았고, 그래서 교구 교회사연구소 주최로 심포지엄을 갖기도 했다”고 밝혔다.

 

글·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