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위 순교지를 가다 (12) 해미 순교지 순교자 피 흘리던 박해의 땅이 교황 함께하는 신앙의 중심지로
▲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을 앞두고 손님맞이 준비에 한창인 해미읍성의 남문인 진남루.
140여 년 만의 대반전이다. 1866년부터 7년간 이어진 병인대박해 때만 해도 숱한 신자들이 “예수 마리아”를 부르며 죽어간 생매장터 ‘여숫골’이 해미순교성지로 성역화됐다. 해마다 10만 명이 찾는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앞두고 성지 여기저기에는 교황 방한을 환영하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날마다 수십, 수백 명의 순례자들이 ‘신앙의 묏자리’ 해미를 찾아 순례한다.
1989년 서울세계성체대회 이후 25년 만에 방한하는 교황도 솔뫼를 거쳐 해미성지로 향한다. 우연인 듯 자신이 시복식을 주례하게 될 김진후(비오, 1739~1814) 순교자가 나고 자란 솔뫼를 거쳐 오는 17일 124위 중 김진후와 해미의 첫 순교자 인언민(마르티노, 1737∼1800), 이보현(프란치스코, 1773∼1800) 등 3위가 피를 흘린 해미에서 아시아ㆍ한국 청년대회 폐막미사를 주례한다. 순교의 땅에서 교황이 주례하는 아시아ㆍ한국 청년대회 폐막미사 실황이 매스컴을 통해 전세계에 알려진다. 해미는 이제 국제적 성지로 떠오르고 있다.
이에 해미순교성지(전담 백성수 신부)는 아시아청년대회 폐막에 앞서 이뤄질 아시아 주교들과의 만남과 함께 인언민ㆍ이보현ㆍ김진후 순교자의 시복 기념비 축복식과 교황의 순교자 유해 참배 등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다.
해미읍성이 생겨난 건 1407년의 일이다. 당시 정해현과 여미현을 합쳐 해미현이 됐다. 내포로 이어지는 중심도시였기에 11년 뒤인 1418년에 병마절도사영이 설치됐고, 1491년에는 돌로 성을 쌓았다. 그 읍성이 524년의 풍상을 견뎌왔다. 1651년 청주로 병마절도사영이 옮겨가기까지 160년간 해미는 내포의 중심지였으며, 그 이후에도 토포사를 겸하는 종3품 겸영장을 둠으로써 군사요충지로 남았다. 그러했기에 1801년 신유박해가 시작되면서 70여 년간 해미는 피의 박해 현장이 됐다.
해미는 그리스도인의 씨앗을 내고
‘박해의 현장’ 해미 순교지는 사적지 1곳과 순교성지 3곳으로 이뤄져 있다. 해미는 특히 솔뫼와 합덕, 신리, 여사울, 홍성 등 상부 내포 여러 고을 중 유일하게 진영이 설치돼 있어 크고 작은 박해가 끊이지 않았다.
▲ 해미순교성지에서 해미읍성을 잇는 순례길 약도. 1.3㎞ 길 곳곳에는 순교자들이 겪은 고통을 함께 느낄 수 있는 십자가의 길이 자리하고 있다.
해미 순교지를 제대로 느끼고 호흡하려면 사적지인 ‘한티고개 압송로’를 따라 읍성까지 걸어야 한다. 덕산과 예산, 삽교, 신창, 고덕, 신리 등지에서 붙잡힌 신자들이 포승에 묶인 채 끌려가던 한티고개 압송로를 걷는 길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해미성지를 먼저 돌아보고 한서대 입구에서 대곡리 마을 주유소 및 석재사를 거쳐 한티고개 입구 압송로 푯말에서 한티고개까지 걷는 1㎞ 거리다. 또 하나는 덕산 읍내에서 해미 쪽 한티고개 순교자 압송로를 시작으로 한티고개 정상까지 십자가의 길 14처를 걷는 2㎞ 거리다.
덕산면과 해미면을 가르는 해발 678m의 가야산 끝자락에 자리 잡은 한티고개는 교우촌인 면천 황무실과 덕산 용머리, 배나드리 마을 등지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압송되던 ‘죽음의 길’이었기에 순교신심을 묵상하며 걷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번 아시아ㆍ한국청년대회 도보순례는 한서대에서 해미성지까지 4.37㎞의 비교적 짧은 거리를 걷는 것으로 대신하기에 다소 아쉬울 법도 하다.
아시아 청년들, 순교 현장에서 만나다
한티고개를 내려오면 사적 116호 해미읍성이 한눈에 들어온다. ‘역사의 현장’ 해미읍성은 길이 1800m, 높이 5m, 성내면적 20만 3592㎡(6만 1587평)의 타원형 성곽이다. 밖은 돌로, 안쪽은 잡석과 흙으로 채운 읍성 안에는 동헌과 내아, 객사 등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이들 시설물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해미옥(獄)과 그 앞에 있는 호야나무다. 인언민ㆍ이보현 순교자는 해미옥에서 갖은 문초와 형벌을 다 받으면서도 ‘한결같은 마음으로’ 신앙을 고백하다가 1800년 1월 9일 매를 맞다 순교했고, 김진후 순교자 또한 해미옥에서 10년간 옥고 끝에 1814년 12월 1일 옥사했다. 이후로도 해미옥에서 태형이나 자리개질, 생매장으로 순교한 신자들은 어림잡아 20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 교회 측 기록에 67위, 관변 측 기록에 65위 등 132위나 된다. 수령 300년 호야나무는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의 목을 매달아 처형하는 교수형이 집행됐던 나무로, 2008년 4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2호 ‘서산 해미읍성 회화나무’로 보호받고 있다.
▲ 해미읍성을 가로지르는 읍내 십자가의 길 14처 중 제7처.
해미에는 읍내를 관통하는 특별한 ‘십자가의 길’이 있다.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했던 해미읍성 동헌을 시작으로 호야나무, 서문 안팎, 해미면사무소, 해미농어촌공사, 해미순교성지로 이어진다. 순례자들은 누구나 자유롭게 읍내를 따라 성지까지 1.3㎞를 걸으며 처마다 기도를 바칠 수 있고, 본당이나 단체별 순례자들은 해미성지에 요청해 옛 복식과 형구를 들고 실제로 순교자들의 순교 여정을 체험해 볼 수도 있다.
‘죽음의 길’은 ‘영광의 길’이 되고
읍성에서 해미순교성지까지는 금방이다. 읍성 서문인 지성루 밖 순교지가 군문효수와 백지사형, 교수형, 동사형, 자리개질 등 온갖 혹형과 처형이 이뤄진 순 교지라면, 생매장터인 여숫골과 진둠벙 또한 그에 못지 않다.
▲ 두 팔을 뒤로 묶은 채 천주교 신자들을 강제로 물속에 밀어넣어 죽인 해미순교성지 진둠벙.
▲ 해미순교성지 전담 백성수 신부가 순교자들의 처형 도구로 쓰인 자리개돌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뒤에 보이는 건축물이 해미순교성지 대성당이다.
1866년부터 1873년까지 진행된 병인박해기에 이르기까지 읍성 동구 밖 서쪽 숲정이에서 많은 순교자가 생매장됐는데 이곳을 여숫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또 생매장터로 가는 길에 있는 개울에서는 두 팔을 뒤로 묶인 채 끌려온 신자들을 물에 밀어 넣어 죽였는데, 이를 일러 ‘죄인 둠벙’이라고 불렀고, 훗날엔 이 이름이 ‘진둠벙’으로 바뀌었다.
바로 이 순교지에 해미순교성지가 조성돼 있고, 대성당과 소성당을 중심으로 순교전시관, 자리개돌, 진둠벙, 노천성당, 순교현양탑, 무명 순교자의 묘, 순교탑, 야외제대, 유해발굴지 등이 들어서 있다. 성지에선 날마다 오전 11시에 미사가 봉헌된다. 충남 서산시 해미면 성지 1로 13. 문의 : 041-688-3183
글ㆍ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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