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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24위 순교성지

[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25> 진주 진영, 진주 옥터

by 파스칼바이런 2015. 1. 29.

[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25> 진주 진영, 진주 옥터

정찬문·윤봉문 복자 순교 터로 전해져,

두 순교자 시복 위한 현지 신자들의 현양 열기 식을 줄 몰라

2015. 01. 25발행 [1299호]

 

 

▲ 진주 진영과 진주 옥터 자리.

 

 

울산에 경상 좌병영이 있었다면, 진주에는 경상 우병영이 자리했다. 임진왜란이 계기였다.

1592년 10월과 1593년 6월에 벌어진 진주성 1, 2차 전투로 호남으로 통하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진주의 위상이 부각되면서 1602년 경상우도 병마절제사영, 곧 경상 우병영이 창원 합포(마산)에서 진주성 안으로 옮겨온 것이다.

 

이에 앞서 경상 우병영이 진주로 옮겨지기 이전부터 설치돼 있던 진주목은 성 밖에 그대로 뒀다. 한동안은 두 직책을 경상 우병사가 겸직했지만, 나중엔 따로따로 임명됐다.

 

이 때문에 경상 좌병사가 울산 도호부사를 겸직하던 경상 좌병영, 곧 울산 병영은 순교지가 됐고, 최근 들어 순교성지가 조성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경상 우병영은 순교지가 되지 않았고, 진주 목사가 집무하던 치소, 곧 진주 진영이 순교지가 됐다. 정3품인 진주 목사는 종2품인 경상 우병사보다 품계가 낮았지만, 문관인데다 행정권에 사법권, 병권까지 갖고 있어 산하 부서인 진주 진영장을 통해 사학죄인이던 천주교 신자들을 문초하고 형벌을 집행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병인박해 때 순교한 정찬문(안토니오, 1822∼1867)과 124위 순교복자 중 가장 늦게 순교한 윤봉문(요셉, 1852∼1888)은 진주 진영과 진주 옥에서 순교했고, 리델 신부 복사였던 구한선(타대오, 1844∼1866)은 진주 진영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집으로 돌아와 장독으로 이레 만에 선종했다.

 

2016년으로 150주년을 맞는 병인박해는 먼 과거의 일이 됐다지만, 6ㆍ25전쟁 당시 진주시는 진주성 촉석루까지 불탈 정도로 초토화된 터여서 순교지의 흔적이 남아 있을 리 없다. 그러기에 지난해 8월 시복된 정찬문ㆍ윤봉문 두 순교복자의 순교 터를 찾는 순례 여정은 힘겹기만 하다. 순교성지를 관할하는 마산교구 옥봉동본당 정은교(루치아노, 68) 전 총회장과 진주문화연구소장으로 활동하는 김수업(토마스 아퀴나스, 76) 전 대구가톨릭대 총장의 도움으로 겨우 진주 진영 터와 진주 옥터를 찾을 수 있었다.

 

▲ 대구가톨릭대 총장을 역임한 김수업 교수가 지금의 진주중앙요양병원에 자리에 있었던

옛 진주 진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18세기 진주성 공북문 앞 대사지 인근에 정찬문 순교복자 등이 신앙을 증거하고

피를 흘린 순교 터인 진주 진영이 자리잡고 있었다.  

 

 

충절의 땅에서 순교의 얼 담은 고장으로

 

남강을 끼고 진주로 가는 순례 길은 비단을 펼쳐놓은 듯 매혹적인 여정이다. 덕유산에서 발원, 경호강과 덕천강 등과 합류한 뒤 진주에서 북동쪽으로 유로를 틀어 낙동강과 합류하는 남강의 풍광은 순례자들에겐 덤이다. 그 강을 따라 펼쳐진 사적 제118호 진주성 성곽과 촉석루, 논개의 충절이 아로새겨진 의암바위에 국립진주박물관 관람까지 일품이다. 이러니 2012년 CNN에서 선정한 ‘한국에서 가봐야 할 아름다운 관광지 50선’에 뽑히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싶다.

 

그렇지만 오늘의 진주성은 내성만 남아 있다. 공북문을 시작으로 촉석루까지 이어지며 내성을 에워싸며 쌓았던 외성은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밖에 파놓은 해자 역할을 하던 대사지(大寺池)를 메우고자 1930년대에 허물었고, 그 앞에 있던 진주 진영도 없어졌다. 그 진영이 바로 순교 복자들의 증거 터이자 순교 터다.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에 따르면, 진주 진영 뜰, 곧 영정은 정찬문 복자가 치명한 곳으로 기록돼 있다. 다만 124위 순교복자 약전엔 그가 다시 옥으로 끌려 들어간 뒤 그날 밤에 숨을 거뒀다고 기록돼 있어 정확한 순교 터는 현재로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옛 진영의 정확한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인문지리 전공자인 김덕현(경상대) 교수나 지역사 전공인 김준형(경상대) 교수에 따르면, 지금의 진주시 촉석로 178 진주 중앙요양병원 자리로 추정된다. 진주경찰서 뒤쪽이니 찾기도 어렵지 않다. 물론 옛 진영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최근 진주성 외성을 복원하자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고 하니 이참에 진주 진영도 복원되길 바랄 뿐이다.

 

김수업 진주문화연구소장은 “실은 6·25전쟁으로 완전히 폐허로 변해 진주는 옛 자취를 찾기 어렵게 됐지만 현 진주시 교육지원청 자리에 있던 대사지 뒤쪽, 중앙요양병원이 순교지로 추정되고 있다”면서 “군사를 움직이고 토포의 역할을 하던 진주 진영장의 무관이 진주목 관할 12개 군에서 잡혀 온 순교자들을 심문하고 혹형을 가했을 것으로 본다”고 전했다.

 

 

▲ 옛 진주 옥 내에 있던 우물은 시멘트 뚜껑에 덮여 있지만 지금도 진주중앙시장 어물전에

남아 있다. 사진 중앙 우측 부분이 우물을 시멘트로 메운 흔적이다.

 

▲ 옛 진주 옥이 자리잡고 있던 감옥은 현재 진주중앙시장이 됐다.

 

 

진주 옥터 우물은 어물전에 묻히고

 

진영을 나와 진주 옥터로 향했다. 진영에서 500m도 안 되는 자리에 있는 옥터는 정천문 복자가 모진 고문을 받고 순교 치명한 곳으로, 또 거제 회장에 임명돼 로베르 신부를 안내했던 윤봉문 복자가 혹독한 문초를 받으면서도 십계명을 외며 신앙을 굳게 증거하다 교수형을 받고 순교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일제 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진주 옥은 경남 진주시 진양호로547번길 8-1, 지금의 중앙시장 내 어물전에 남아 있는 지름 2m의 우물 인근에 남아 있었다고 한다. 우물 동쪽에 지은 옥사는 중앙시장과 옥봉동성당 사이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어물전 상인 정방자(72)씨에 따르면, 이 우물은 1966년 2월 진주 공설시장의 대화재로 모든 상가가 불에 타자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사람이 지나다니기에 위험하다는 이유로 콘크리트로 뚜껑을 만들어 덮으면서 우물의 기능을 상실했다고 한다. 다만 어렴풋이 그 우물터 뚜껑 표식이 남아 있어 이곳이 진주 옥 우물이었다는 것을 전해주고 있다.

 

진주 진영, 혹은 진주 옥에서 치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정찬문 복자 유해는 마산교구 문산본당 사봉공소 관할 구역 내인 진주시 사봉면 동부로 1751번길 46-6에 안장돼 있다.

 

또 진주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한 윤봉문 복자는 진주 비라실에 안장됐다가 훗날 유족들에 의해 지금의 옥포인 진목정 족박골 산으로 옮겼다가 2013년 4월 경남 거제시 일운면 지세포 3길 69-22로 이장했다.

 

1975년 4월 정찬문 복자 유해 이장에 참여했던 정은교 옥봉동본당 전 총회장은 “시복에 앞서 진주 시내 본당은 물론 전 교구 본당이 시복을 위한 기도 운동을 했고, 지금은 시성을 위해 기도 운동을 펼치고 있다”고 전하고 “진주 시내 본당에서는 다들 이들 복자를 기리고자 해마다 봄, 여름이면 정찬문 순교복자의 묘역으로 도보나 자전거 등으로 순례를 다니고 있다”고 현지의 순교자 현양 운동 열기를 설명했다.

 

글ㆍ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