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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124위 순교성지

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23) 전주교구 고창, 김제 순교지

by 파스칼바이런 2014. 12. 16.

[복자 124위 순교지를 가다] <23> 전주교구 고창, 김제 순교지

전주옥에 함께 갇힌 최여겸·한정흠 복자, 각자의 고향 장터로 보내져 참수형

 

 

 

전라도 무장현 ‘개갑장’이 역사에 등장하는 건 1894년이다. 전봉준과 손화중, 김개남 등 동학 접주들과 교도 4000여 명이 그해 3월 개갑장터에 모였다가 인근 구수내(현 구암리) 마을에서 봉기하면서다. 우시장으로는 전국적 지명도를 갖고 있었지만 평범한 시골 장터였던 개갑장이 역사에 남는 현장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에 100년 가까이 앞선 1801년에 이미 개갑장터는 서학, 곧 천주교와 뗄 수 없는 인연을 맺는다. 최여겸(마티아, 1763∼1801) 복자가 무장현을 주 무대로 선교하다가 1801년 8월 27일 개갑장터에서 순교해서다. 이러고 보면 100년 세월을 건너뛰어 서학과 동학이 적잖은 인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개갑장터는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1호 ‘개갑순교성지’로, 구수내 마을은 농민군이 무장 포고문을 선포한 ‘동학농민혁명 기포지’로 조성됐다.

 

최여겸이 순교하기에 하루 앞선 8월 26일엔 한정흠(스타니슬라오, 1756∼1801) 복자가 김제 장터에서 순교했다. 우리나라의 첫 저수지 벽골제로 유명한 김제에서는 그러나 복자의 흔적을 찾기 어렵다.

 

이들 두 복자는 그해 8월 27일 전주 숲정이에서 김천애(안드레아) 복자와 함께 전주옥에 함께 갇힌 인연을 맺고 있었다. 이들은 그 엄혹했던 박해 시기에 같은 감옥에서 서로 신앙을 권면하던 사이였고, 8월 26일과 27일에 하루 시차를 두고 각각 자신의 고향에서 순교함으로써 하느님 사랑과 부르심에 응답한 터였다. 그 열절했던 신앙을 되새기며 순례 발길을 고창과 김제로 돌렸다.

 

 

호남 서남해안 선교 발판 마련하다

 

개갑장터 순교지 관할 본당인 고창성당에 들렀다가 고창군 무장면 성내리 무장읍성으로 향했다. 일제가 무장현을 의병과 독립군 배후 거점으로 지목, 군소재지를 고창으로 옮기면서 쇠락을 거듭한 무장면은 이제 읍성으로나마 옛 영화를 드러낸다. 성벽 복원 공사가 한창인 무장읍성에는 최여겸이 신앙을 증거하던 동헌이 복원돼 있다. ‘취백당’이다.

 

▲ 지난해 9월 축복식을 한 개갑순교성지 제대

 

한산 처가로 피신했다가 체포돼 무장현에 끌려온 최여겸은 무장관아에서 혹독한 문초를 받는다. 갖은 고문에도 최여겸이 굳게 신앙을 증거하던 모습을 지금의 취백당에서 찾아볼 수는 없다. 그렇지만 그의 복음을 향한 열정은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다. 최여겸은 당시 기록에 전교한 사람이 28명이나 나올 만큼 서남해안 지역 선교의 주역이었다.

 

 

1763년 무장현 갑촌(개갑) 태생인 그는 1787년 유항검에게 세례를 받은 뒤 천주교 진리를 더욱 진실하게 믿고자 윤지충(바오로)에게서 교리를 배웠다. 이어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도 교리를 배워 더욱 독실하게 믿음살이를 하게 됐고, 무장과 흥덕, 고창, 영광, 함평 등 전라도 서남해안 일대에서 전교했다. 그랬기에 당시 조정에서도 한산과 무장, 전주를 거쳐 한양 형조에 끌려온 그를 다시 고향 무장으로 돌려보내 백성들이 모두 지켜보는 가운데 처형했던 것이다.

 

▲ 개갑순교성지를 안내하던 김점동 고창본당 연령회장이 순교자현양탑 아래에서

잠시 기도를 바치고 있다.

 

무장현 개갑장터는 지금의 전북 고창군 공음면 석교리 갑촌 일대다. 옛 무장현, 곧 지금의 무장면에서 공음면 방면으로 12㎞가량 가면 도로변 석교리 186에 ‘개갑순교성지’가 조성돼 있다. 1924년 석교포가 간척되면서 그 영향으로 1930년대 들어 폐쇄된 개갑장은 최근까지 전답으로 쓰거나 벌판으로 방치돼 왔다. 그런데 그 개갑장터 1만6529㎡ 부지를 고창군에서 매입한 뒤 성지로 조성했다. 성지는 지난해 9월 축복식을 한 후 순례자들을 맞아들이고 있다. 성지에는 최여겸의 삶과 승천을 모자이크 색유리 벽화로 장식한 야외 제대와 12m 높이 순교자 현양탑, 여겸 광장, 400m나 이어지는 십자가의 길 14처 등으로 이뤄져 있다. 대부분 원로 유리화가 남용우(마리아)씨의 작품이다.

 

김점동(아타나시오, 67) 고창본당 연령회장은 “오랜 세월 동안 반상의 차별이 남달랐던 무장면 일대 주민들은 한동안 천주교 신자라면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을 정도였다”며 “최여겸 복자는 그런 가운데서도 전교에 힘써 28명이나 선교함으로써 호남 서남해안 선교의 발판을 마련하신 사도였다는 점에서 저희 본당은 자부심을 갖고 성지를 가꿔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지상 삶을 통해 하느님과의 접점을 찾다

 

늦은 시간에 발길을 김제로 돌렸다. 고창에서 김제까지는 50여㎞ 남짓한 여정. 해거름녘 시내로 들어서니 금방 옛 관아가 눈에 들어온다. 김제 동헌이다. 도심 한복판에 옛 관아와 그 살림집 내아가 나란히 들어서 있어 고즈넉한 정취를 자아낸다.

 

한정흠은 김제 출신이긴 하지만 먼 친척 유항검의 집으로 가 자녀들의 스승이 되면서 신앙을 접했고 유항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기에 김제에서 그와 관련한 교회 사적지는 찾기 어렵다. 1801년 8월 21일 사형 선고를 받고 고향으로 끌려온 한정흠이 8월 26일 참수되기까지 갇혀 있던 옥사 터도 어디쯤 있었는지 찾을 길이 없다. 오늘엔 형조에서 남긴 그의 결안, 곧 사형 선고문을 통해 그의 뜨거웠던 신앙의 편린을 느낄 수 있을 따름이다. “그(한정흠)는 죽음을 삶처럼 봤고, 그릇된 도리로 많은 이들을 유혹했다.”

 

 

▲ 한정흠 복자가 순교한 김제 장터 순교지는 이제 공영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다.

 

동헌을 둘러보고 순교지로 향했다. 한정흠의 순교 터는 동헌에서 김제전통시장을 가로질러 380m가량 떨어진 요촌 제1공영주차장(김제시 요촌동 278) 내 디씨몰마트 후문 앞이다. 그 순교 터에는 트럭에서 상품 하역 작업이 한창이다. 당연히 213년 전 뜨거웠던 순교 신심이나 그 체취를 느낄 수가 없다. 그래서 김제 장터 순교지를 관할하는 요촌본당에선 김제시와 함께 김제 관아와 장터 순교 터에 순교비를 건립하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 구자옥 요촌본당 사목회장이 한정흠 순교자가 끌려갔던 김제 동헌과 내아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구자옥(미카엘, 64) 김제 요촌본당 사목회장은 “전에는 관아라는 것만 알았지 증거 터나 순교 터를 알지 못했는데, 지난 8월에 한정흠 순교자께서 시복되면서 김제장터 순교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면서 “그래서 본당 차원에서도 김제시와 함께 순교비 건립을 추진 중이지만 순례를 돕는 기반은 아직 많이 미비하다”고 말했다.

 

글·사진=오세택 기자 sebastiano@pbc.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