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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교리 & 영성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 에디트 슈타인

by 파스칼바이런 2016. 1. 22.

최대환 신부의 인물과 영성 이야기 (2) 에디트 슈타인

어두운 세상, ‘숨은 삶’에서도 잃지 않았던 주님의 빛

발행일 : 가톨릭신문 2016-01-10 [제2977호, 10면]

 

 

유다인 출신으로 진리추구 관심 가지며 철학에 입문

영적 갈망 키우다 근원적 회심 체험 후 수도원 입회

아우슈비츠서 사망… 수난 예감하면서도 ‘희망’ 드러내

 

 

▲ 철학자 에디트 슈타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데딕타 순교자.

 

 

철학자 에디트 슈타인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십자가의 성녀 데레사 베데딕타 순교자(1891~1942, 축일 8월 9일)는 지금은 폴란드에 속해있지만 당시는 독일이 지배하고 있었던 슐레지엔 지방의 중심도시 브레슬라우(오늘날은 브로츠와프라고 불리움)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프로이센 시대 이래 문화와 학문의 중심지인 이곳에서 자라나고 교육받은 그녀는 교양과 철학에 심취하면서 어느덧 자신의 민족의 신앙에 등을 돌리게 되었고, 어떤 면에서는 신에 무관심한 젊은 시절을 보내게 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녀는 언제나 매우 관조적이며, 진리를 추구하는데 열정적인 성품과 성향을 가진 이였습니다.

 

내면의 빛을 찾고자 하는 그녀의 갈망은 그녀를 철학으로 인도하였습니다. 실지로 그녀는 철학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고 많은 성취를 해냈지만 삶에서 만나는 실존적 문제들과 철학적 이성에서 해명되지 않는 영적 갈망들이 점점 자라나면서 그녀는 근원적인 회심을 체험하고 하느님의 신비와 일치하는 영성적 삶으로 다가갑니다. 이렇게 시작된 영적 여정은 마침내 쾰른 가르멜 봉쇄 수녀원 입회로 결실을 맺고 나치에 의해 죽임을 당할때까지 그녀는 가르멜 수녀로서 여덟 해 동안 봉헌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녀가 남겨놓은 철학자로서의 자취, 그녀의 회심의 계기들, 수도자로서 살던 시절의 영적이고 정신적 유산을 음미하는 것은 우리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인물과 영성’이 연재되는 가운데 몇 번 다시 에디트 슈타인과 만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호에서는 다만, 그녀의 삶의 마지막 날들을 떠올리며 그녀가 주님 공현의 신비를 묵상하며 수도원 자매들과 나눈 묵상을 음미하고자 합니다. 대림에서 성탄, 그리고 주님 공현에 이르는 강생의 신비를 전례주년의 시간안에서 체험한 우리에게 에디트 슈타인의 묵상은 그러한 신비를 실제로 살아가고 주님 섭리에 신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합니다.

 

에디트 슈타인의 마지막 날들

 

“1942년 8월 2일 오후 5시, 에히트 가르멜 수녀원의 수녀들이 성당에서 시편을 읊고 있을 때 두 명의 독일 장교가 원장을 면회실로 불러 베네딕타 수녀를 불러 달라고 했다. 그들이 스위스 입국 비자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 원장은 베네딕타 수녀를 보냈다. 독일 장교는 5분 내로 수도원에서 나오라고 명령했다. 베네딕타 수녀는 말했다.

 

“봉쇄규칙에 따라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장교가 대답했다.

“그런 것 따윈 집어치우고 나오시오.”

 

베네딕타 수녀는 조용한 어조로 “체포해야 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자 장교는 원장을 불렀다. 베네딕타 수녀는 가대로 돌아와 성체 앞에 엎드렸고, 원장은 장교와 협상했다. 장교는 말했다.

 

“슈타인 수녀는 스위스 비자를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러나 장교는 “그런 모든 것은 나중에 결말짓겠습니다. 담요 한 장과 3일간의 양식을 주시오”라고 했다.

 

로제 언니는 봉쇄 문 밖에 무릎을 꿇고 원장의 마지막 축복을 받았다. 베네딕타 수녀는 수방에서 내려와 수녀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장 드 파브레그, ‘성녀 에디트 슈타인’ - 가톨릭 출판사- 중에서)

 

이렇게 에디트 슈타인은 자신이 혈연으로 속해 있었던 유대민족의 운명에 함께 참여하는 수난의 길에 들어섰습니다. 장 드 파브레그는 위의 책에서 에디트 슈타인이 체포된 후 원장에게 간신히 전한, 날짜가 적혀지지 않은 메모를 인용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녀가 자신의 고난의 길에 내적으로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원장수녀님의 배려에 맡겨드립니다. 저는 모든 것에 만족합니다. 참으로 십자가의 무게로 고통당하기 시작할 때만이 십자가의 학문(Scientia cruces)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저는 이것에 대한 확신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음 깊은 곳에서 말씀드렸습니다. 흠숭하나이다, 십자가여 유일한 희망이시여(Ave Crux, SpesUnica!”).

 

숨은 삶과 주님 공현의 신비

 

일찍부터 에디트 슈타인의 인격과 운명이 인류와 교회에 갖는 의미를 주목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그녀를 1998년 성인품에 올렸습니다. 이로써 그녀가 문명의 얼굴을 한 야만의 시대에 자신의 삶과 생명을 다해 정신과 영적신비의 위대함을 증언한 사실이 다시금 인식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죽음을 유다인들과 그리스도인들, 세상의 지성과 영적 신비의 학문의 화해와 폭력에 희생당한 20세기 인류 구성원 모두를 위한 희생제물로 이해한 이들의 직관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교회는 공적으로 확인해 주었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이 사랑하는 언니 로제와 함께 체포되고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독가스 실에서 숨질 때까지, 삶의 마지막 일주일 동안 그녀가 생각하고 체험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전해주는 글은 없습니다. 간간히 그녀의 의연하고 평화스런 모습을 증언하는 생존자들과 목격자들의 증언들이 들려올 뿐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나치가 유대인 박해를 본격화하고, 쾰른 가르멜 수녀원 수녀로 있던 그녀가 생명의 위협 때문에 네덜란드 에히터의 가르멜 수녀원으로 1939년 피신해야 했을 때부터 그녀는 이러한 순간을 마음에 두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녀의 공현 대축일을 위한 묵상은 우리의 마음을 더 깊이 파고듭니다.

 

당시 수녀원 원장은 중요한 축일에 수녀님들을 위해 영적 담화를 하는 관례가 있었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은 원장의 부탁으로 1940년에서 1942년 까지 세 번을 이어서 공현 대축일에 자신의 묵상을 나누었습니다. 1940년, 그녀가 독일어로 쓴 묵상은 그녀가 수난을 예감하면서도 그것이 오히려 주님의 빛을 드러내는 작은 ‘나타남(공현)’이 되리라는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묵상은 처음 읽었던 순간부터 저를 사로잡았었습니다. 그 시작 부분을 함께 나누며 주님의 공현이 우리 각자가 세상이 어두울 때, 숨은 삶에서도 조용히, 그러나 꺼지지 않고 주님을 증언하는 작은 ‘공현’의 촛불이 될 수 있다는 희망을 되새겨 보고자 합니다.

 

“어둡고 차가운 12월의 날들에 대림초의 따스한 불이 켜지며 신비스러운 밤에 신비스러운 빛이 비치면, 위로하는 생각이 우리를 깨웁니다. 하느님의 빛, 성령께서는 이 세상을 비추시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그분은 당신의 피조물들이 그분께 불충하고 그분을 잊는다 하더라도 언제나 당신의 창조에 충실하신 분이십니다. 만일 세상의 어둠이 그분의 빛이, 자신에게 파고들어오는 것을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분은 언제나 그 빛이 시작될 수 있는 몇개의 자리를 어두운 세상 안에서도 발견하십니다.”

 

다음 주에는 복자 추기경 존 핸리 뉴먼을 만나고자 합니다.

 

최대환 신부 (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