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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9>

by 파스칼바이런 2016. 12. 22.

[빛과 소금 이땅의 평신도]

영원한 레지오 단원 김금룡<9>

레지오 단원과 연령회원의 귀감

평화신문 2016. 12. 18발행 [1394호]

 

 

▲ 6·25 전쟁 때 인민군이 뽑아 산에 내다버린 산정동성당 십자가를 김금룡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벽장에 숨겨 지켜냈다. 오늘날까지 산정동성당을 지키고 있는 옛 십자가.

 

 

당시 김금룡의 충실한 후배들은 그를 이렇게 회상했다. “가이오 단장님께서 상장례에 참여한 사례는 아마 수백 건도 넘을 것입니다. 그러나 단장님은 당신 활동에 관해 이러저러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묵묵히 봉사하시기 때문에 매스컴에 단 한 번도 오르내린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분을 아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입니다. 비록 돌아가셨지만 단장님은 저와 저희 모두에게 늘 살아 있는 착한 그리스도인이셨습니다.”(윤백현)

 

처참한 시신도 주님처럼 모셔

 

김금룡과 후배 연령회원들은 수시(收屍)부터 입관, 출관, 하관 등 상장례의 전 과정을 도맡아 했으며, 본당 묘지관리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외롭게 세상을 떠난 가난한 이들의 시신을 공동묘지에 안장하기도 했다. 아무리 험악한 경우를 만나더라도 절대로 흐트러지지 않고 정중하고 꼼꼼하게 시신을 다루는 김금룡은 후배들에게 염습의 교본(敎本)과 같은 존재였다. 그를 따라다니며 장례의 제반 업무를 익힌 후배들은 어느덧 작은 김금룡이 되어 있었다.

 

“삼복더위에 돌아가신 분들, 물에 빠져 돌아가신 분들, 이런 분들의 시신을 만져 보면 뭉글뭉글해서 살이 묻어날 만큼 참혹합니다. 어떤 분은 얼마나 오랫동안 심하게 앓다가 돌아가셨는지 시신을 움직일 때마다 피가 터져 나올 정도입니다. 이런 시신들도 다른 교우들과 다름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이자 성령의 궁전이었기 때문에 우리 연령회원들은 정성을 다해 수습하고 입관합니다. 레지오 단원과 연령회원은 밀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둘 다 가장 힘들고 괴로운 일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뛰어들었기 때문입니다.”(안현균)

 

김금룡은 이제 목포의 상가(喪家)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그러나 아직 건강하고 젊은 사람 못지않게 왕성하게 활동하던 그를 하느님께서 갑자기 부르셨다. 1988년 4월 20일 74세의 일기로 용당동의 허름한 자택에서 조용히 주님께 돌아간 것이다. 지금은 신부의 아버지가 된 안현균은 신학생 부모 모임 때문에 광주 대신학교에 갔다가 김금룡이 선종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안현균은 지금도 김금룡에게 무엇보다 가장 낮은 자세로 주님의 계명을 실천하는 삶을 배웠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이오 단장님은 늘 가벼운 웃음을 입가에 지니고 모든 사람을 대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꼭 필요한 말씀은 하셨지만 말보다는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 주신 분이십니다. 언젠가 그분의 대자가 냉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단장님께서는 그를 찾아가 말없이 대자의 손을 잡고 그저 하염없이 오랫동안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그 대자도 결국은 울면서 대부님께 용서를 빌고 난 다음부터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그분은 늘 말보다는 행동으로 이끌어 주셨기 때문에 저도 그분의 참된 이웃 사랑을 배우고 실천할 수 있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그분을 아는 모든 사람은 모두 언제나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분을 따랐습니다.”(안현균)

 

레지오 마리애 광주 세나뚜스 전(前) 단장 김영대(루도비코)는 “제가 목포에서 있었던 레지오 마리애 행사 때 김금룡 단장님을 처음 만났는데 ‘선배님, 오늘날의 레지오 마리애가 어떻게 하면 제 갈 길을 제대로 갈 수 있는지 한 말씀 해 달라’고 하자 때 빙그레 웃으시면서 ‘절대 레지오 회합에 빠지면 안 되고, 틈이 날 때마다 열심히 기도하고,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으면 됩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듯이 그분은 늘 말보다 행동이 앞섰던 분이셨습니다. 특히 상가 봉사의 아름다운 전통을 우리 교회에 뿌리내리게 한 훌륭한 선배이셨습니다”라고 회고했다.

 

부호의 딸에서 신앙인의 아내로

 

김금룡의 아내 박기남의 일생에서 가장 가까이 있어야 할 세 남자는 늘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만 해도 무엇 하나 부러울 것 없었지만, 아버지 얼굴을 알만한 나이가 됐을 때는 이미 자기 곁에 없었다. 아버지 박내홍은 투옥만 된 것이 아니었다. 자기 가문뿐 아니라 하동 땅의 명문가요, 부호였던 처가인 신씨 가문마저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다시는 고향 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객지에서 쓸쓸하게 돌아갔다. 박기남은 평소 이런 아버지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자기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남편 김금룡이 밖에서는 멋있고 훌륭한 사람이었지만, 집에서는 늘 손님 같은 존재였다. 젊어서는 풍류를 즐기느라, 주님을 안 다음부터는 불쌍한 이웃의 고통을 덜어 주느라 자연히 아내에게는 소홀했다. 경상도에서 시집온 그녀는 친구도 없었다. 다른 이들은 김장할 때나 장 담글 때 이웃이 서로 품앗이했지만 그녀는 늘 혼자 해치웠다.

 

일제가 패망하기 전후에 박기남이 대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배가 많이 아파 병원에 갔는데 자궁 외 임신으로 나팔관이 터졌던 것이다. 수술이 끝나자 의사는 높은 곳에 전깃줄로 연결한 얼음을 배 위에 얹어 놓고 흘러나온 피가 얼어 굳어 버리면 곧바로 제거하여 염증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다. 지금도 이런 수술은 위험하지만 당시는 의약품이 아주 귀하고, 수술 도중에 정전이 되기도 할 만큼 어려운 시기였으므로 목숨을 잃는 이들이 많았다. 이런 원시적인 조치로 목숨을 겨우 건진 박기남은 한 달이나 병원 신세를 졌다. 김금룡은 어머니와 장모를 모시고 있어서 그럴 필요가 없었는데도 몸소 아내 곁을 지키며 병수발을 다했다. 당시의 보통 남자들처럼 애정을 표시하는 데 미숙했지만 늘 자기 뜻을 거스르지 않고 조용히 따라 주던 아내를 마음 깊이 사랑했던 것이다.

 

▲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 분도의 비석.

 

▲ ▲김금룡과 박기남의 묘지에 서 있는 아들 김성옥.

 

 

막내 아들 잃는 아픔 겪어

 

성옥을 낳은 뒤로 아기가 잘 들어서지 않던 박기남이 늦둥이를 하나 낳았다. 김금룡은 구교우들처럼 세례명 분도(芬道, 베네딕토)를 이 늦둥이의 이름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이 아들은 오래 살지 못했다. 우리나라는 어린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참척(慘慽)이라 하여 거의 버리다시피 했다. 그러나 “어떤 교우는 사회의 풍습을 따라 어린아이의 장례를 합당하고 성대하게 지내지 않는데, 이는 믿음이 적은 까닭이다. 하지만 그 어린아이들이 진정 영화롭게 부활할 것을 생각한다면 크게 공경해야 한다”(「회장직분」)는 가르침대로 정성껏 장례를 치렀다.

 

김금룡은 이미 명절이나 기일에 조상 제사를 지내지 않고 아내와 함께 위령기도를 바치고 있었다. 그는 박해 시절 우리나라 신앙의 선조들처럼 제사보다 위령 기도를 정성껏 바치는 것이 세상을 떠난 영혼들에 훨씬 더 유익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앙심이 투철하고 교회의 가르침 앞에서는 단호한 그였지만 이 아들의 묘소만큼은 자기가 죽고 난 뒤에 비록 고향을 떠난 형일지라도 잘 보살펴 주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먼저 보낸 아비의 심정을 남은 아들이자 분도의 형인 성옥에게 보라는 듯이 묘비에 이렇게 남겼다. “天主公敎信者 金芬道之墓(천주공교신자 김분도지묘)”, “墓主 서울 兄 金 도비아 聖玉(묘주 서울 형 김 도비아 성옥)”

 

성옥은 늘 자랑스러운 외아들이었다. 자라면서 크게 말썽을 피운 적도 없고, 공부는 물론 성당 활동도 앞장서서 잘했다. 예전에는 대부분의 본당이 자정에 시작되는 성탄 성야 미사 전까지는 연극이나 노래, 장기자랑 등을 공연했다. 본당 신자들은 자기 집에서, 공소 신자들은 각각 배정된 회장들의 집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모두 성당에 와서 이 공연을 보면서 대축일 미사를 기다렸다. 이때마다 성옥은 연극 대본을 쓰고 주인공을 맡았다. 이처럼 성옥의 연극 인생은 이미 십 대 청소년 시절부터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기쁨은 딱 고등학교 때까지였다.

 

“아들이기는 해도 1954년에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뒤부터는 부모님과 함께 한 적이 별로 없어서 그 이후로는 부모님께서 어떻게 사셨는지 잘 모릅니다. 학생 때는 방학에 겨우 하루나 이틀 부모님 곁에 머물다 간 정도이고, 학교를 졸업하고 국립극장 전속 단원이 된 이후부터는 명절 때도 공연했기 때문에 1년에 한두 번 찾아뵌 것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신에 어머니는 자주, 아버지는 어쩌다 한 번 아들을 보러 서울로 오시긴 했습니다. 참 불효막심한 외아들이었습니다.”(김성옥)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