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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전례 & 미사

궁금해요 전례 - 한분도 베네딕토 신부

by 파스칼바이런 2017. 10. 20.

궁금해요 전례 (1) 일반 포도주는 미사주로 사용할 수 없나요?

 

 

미사를 거행할 때마다 사제는 빵과 포도주를 성체와 성혈로 축성합니다. 신자들은 성체를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고, 생명의 양식으로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힘을 얻게 됩니다.

 

미사 중 봉헌시간은 성찬전례의 시작을 알리게 되고, 예물행렬이 시작됩니다. 이때 가져가는 예물은 기본적으로 ‘빵과 포도주’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주님의 잔치를 거행하기 위하여 언제나 방과 물을 섞은 포도주(vinum cum aqua)를 사용하여 왔습니다. 그리고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 신자들이 물질을 통해 봉헌에 참여를 합니다(「미사 총지침」 101항 참조). 이때 사제가 축성하게 될 예물인 빵(제병)과 포도주의 조건에 대해서는 몇 가지 지켜야 할 규정이 있습니다.

 

우선은 성찬전례 거행에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실제로 먹을 수 있는 음식이어야 합니다(postulat). 성찬전례에 쓰이는 빵의 크기는 백성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가 미사 중에 실제로 제병을 여러 조각으로 떼어 나누고, 나눈 조각들을 적어도 몇 신자들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 만큼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성찬례 거행에 쓰일 빵은 순수하게 밀가루로 만든 신선한 것이어야 하며, 가톨릭 교회의 오랜 전통에 따라 누룩이 들어있지 않은 빵이어야 합니다. 이 모두는 성경에 근거한 규정입니다.

 

또한 성찬전례 거행에 쓰일 포도주는 포도나무 열매로 빚은 것으로 다른 물질이 섞이지 않은 순수한 자연 포도주이어야 합니다(「미사 총지침」 322항). 그래서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미사주로 사용될 포도주를 따로 제조하여 각 성당으로 공급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찹쌀이 들어 있는 떡이나, 다른 열매나 곡물로 만든 술로는 미사가 불가능합니다. 혹시 누룩이 조금이라도 들어있는 빵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거나 집에서 만든 포도주, 혹은 시중에서 구입한 포도주를 사용할 경우라면 사제는 교구 직권자에게 허락을 득한 후 일시적으로 사용할 수 있겠습니다.

 

본래 초기 교회에서는 미사 전에 신자들이 예물을 성당에 미리 가져다 놓았었습니다.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늘면서 행렬이 생겼는데,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4세기에는 행렬 성가가 생겼습니다. 이후 11세기에는 신자들의 예물이 금전으로 바뀌었습니다. 중세기에는 행렬과 봉헌성가가 사라지고, 봉헌기도문만 남았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초기교회 모습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 의해서 봉헌행렬과 이때 부르는 성가가 되살아났습니다. 이렇게 예물 봉헌에도 큰 의미가 있는 만큼 단순히 헌금을 내는 행사(?)가 아닌 그리스도의 희생제사 준비의 의미를 잘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 ‘궁금해요, 전례’를 연재하는 한 분도 베네딕토 신부는 가톨릭대학교 대학원에서 전례학을 전공하고 현재 프랑스 파리에서 교포사목을 하고 있다.

 

[2017년 1월 15일 연중 제2주일 빛고을 4면, 한분도 베네딕토 신부(교포사목, 프랑스 파리)]

 

 


 

 

궁금해요 전례 (2) 성체는 하루에 몇 번 모실 수 있나요?

 

 

초세기에는 매일 미사가 거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자들의 영성체 횟수에 대한 규정이 없었습니다. 4세기 초 그리스도의 신성을 거부하는 아리아니즘에 대항해서 교회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면서 영성체 횟수가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라테라노 공의회에서는 적어도 1년에 한 번 성체를 영하도록 규정하게 되었고, 그 관습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사제도 실제로 하루에 한 번 미사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하루에 한 번 영성체를 하는 것이 원칙이며, 특별한 미사 때 한 번 더 영성체 할 수 있습니다(교황청 성사성성, ‘무한한 사랑’ Immensae Caritatis, 1973년 1월 29일).

 

한 번 더 영성체 할 수 있는 날은 다음과 같습니다.

 

토요일 저녁이나 의무 축일 전날 저녁에 미사 참례 의무를 이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이미 아침에 영성체하였더라도, 다시 영성체할 수 있습니다.

 

부활 성야 미사와 성탄 밤 미사에서 영성체하였더라도, 부활 대축일의 두 번째 미사와 성탄 대축일 낮에 거행되는 한 미사에서 영성체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성유 축성 미사 때에 영성체를 하였다 하더라도, 주님 만찬 성목요일 저녁 미사에서 영성체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평일미사, 혹은 주일미사를 참석했다 하더라도 두 번째로 영성체할 수 있는 경우는 다음과 같습니다.

 

- 세례성사, 견진성사, 병자성사, 성품성사, 혼인성사를 집전하는 예식 미사와 첫영성체 미사에서,

- 성당이나 제대 축성 미사, 또는 수도 서원 미사와 ‘교회법적 사명’ 수여 미사에서,

- 죽은 이를 위한 미사 가운데, 장례 미사, 사망 소식을 들은 뒤에 또는 죽은 이를 마지막으로 묻을 때에 드리는 미사, 첫 기일 미사에서,

- 그리스도 성체 성혈 대축일과 사목 방문 날에 주교좌나 본당 사목구의 성당에서 거행되는 중심 미사에서, 수도회의 교회법적 방문과 특별한 회의나 모임을 하는 기회에 상급 장상이 거행하는 미사에서,

- 국제적, 전국적, 지역적, 교구적 차원의 성체 대회나 성모 대회의 중심 미사에서, 성지 순례 미사에서 모실 수 있습니다.

 

위에 언급된 경우 외에도, 지역 직권자들(교구장 주교)이 특별한 상황 때문에 다시 영성체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인정하는 그때마다 같은 날 두 번 영성체하는 권한을 임시로 부여할 수 있습니다.

 

[2017년 2월 12일 연중 제6주일 빛고을 4면, 한분도 베네딕토 신부(교포사목, 프랑스 파리)]

 

 


 

 

궁금해요 전례 (3) 금육을 꼭 지켜야 하나요?

 

 

육식을 금하는 금육재는 모든 신자들이 만 14세부터 죽을 때까지 해당되며 신자들의 영성적 삶을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는 교회의 규율에 해당됩니다.

 

그리스도 교회에서 금요일에 육식을 금하는 관습은 이미 초세기부터 지켜져 내려왔습니다.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에 동참하고 영적인 완적을 위한 고신극기의 의미를 가진 관습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이집트의 성 안토니오(250-356)와 그 제자들은 육식을 절제하고 빵, 물, 소금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까지도 많은 관상수도회에서는 일 년 내내, 또는 거의 일 년 동안 금육을 하고 있답니다.

 

5세기에는 단식재도 의무였는데요, 사순기간 동안에 모든 신자들은 낮 동안은 단식을 하고 해가 진 후에 한 끼를 먹었습니다. 물론 이때도 연중 금요일에는 금육재를 지키기 위해 고기, 술, 우유, 계란, 생선, 기름도 금했습니다. 이후 생선과 기름이 제외되고 9세기부터는 우유와 계란 정도는 허용되었습니다.

 

이후 1966년에 교황 바오로 6세는 금육재에 관한 교령을 발표했습니다. 연중 금요일의 금육을 폐지하고 재의 수요일과 사순절 중 매주 금요일과 예수 수난 금요일에만 금육하도록 했는데요, 이는 현대 사회에서 금요일 금육재 실천이 잘 지켜지지 않고, 이에 따라 의미가 없는 것으로 판단해서 폐지한 것이 아닙니다. 금육을 하거나 그 대신 다른 선행을 행하거나 그 금액으로 이웃을 돕도록 좀 더 적극적인 방향으로 실천하도록 권유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신에 따라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는 2002년 8월 1일에 “한국교회의 교회법 보완 규정”을 통해 “참회 고행의 날 규정”을 따로 발표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연중 금요일 재는 금육이나 금주, 금연, 선행, 자선, 희생, 가족 기도로 지킬 수 있다.

2. 재를 지킴으로 절약된 몫은 자선 사업에 사용하도록 한다.

 

우리가 사용하는 금육재라는 말은 옛말 ‘소재(小齋)’에서 바뀐 말인데요, 소재, 재계 등 교회의 오랜 가르침들은 주님의 사랑을 바탕으로 한 신자 개개인의 영신적 훈육을 위한 것이며 구체적으로 실행할 수 있도록 권유합니다. 따라서 그 규정 안에 들어있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을 느끼고 그것을 읽어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신자로서 해야 할 희생과 극기입니다. 그러므로 금육과 단식의 말마디에 쫓겨 맹목적으로 지키는 것보다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자신과 이웃들의 죄를 보속하는 정신으로 스스로 절제하는 것이 금육과 단식의 올바른 정신이라고 하겠습니다.

 

[2017년 3월 12일 사순 제2주일 빛고을 4면, 한분도 베네딕토 신부(교포사목, 프랑스 파리)]

 

 


 

 

궁금해요 전례 (4) 고해성사 후 보속을 안 하면 성체를 못 모시나요?

 

 

가톨릭 교회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힘 중의 하나는 바로 고해성사입니다.

 

인간은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에 죄를 짓게 됩니다. 죄라는 말의 어원은 내가 주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길에서 이탈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해성사는 세례를 받은 신자가 세례 이후의 죄들(본죄)에 대하여 사제를 통하여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으며, 죄로 인하여 상처를 입혔던 교회와 공동체에 다시 화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치유와 화해의 성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고해성사를 통하여 마음의 평화와 영적인 힘과 위로를 얻음으로써 다시금 그리스도인답게 생활할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가톨릭 교리는 고해성사가 다섯 단계의 요소를 가지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곧 성찰과 통회(상등통회, 하등통회), 정개(定改)와 고해 그리고 보속이 그것입니다. 이 다섯 요소들 모두가 고해성사가 가진 필수적인 단계들입니다. 하지만 이 요소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통회와 죄의 고백, 그리고 사죄경입니다. 즉 하느님께로부터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반성과 함께 다시는 반복하지 않겠다는 철저한 결심이 필수적이고, 또한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위임받은 죄의 용서에 대한 사죄권(마태 18,18 참조)이 있는 사제에게 죄를 고백하고 그 사제로부터 사죄경을 받는 것이 고해성사의 핵심입니다. 이렇게 죄의 용서는 고해자 자신의 통회와 고백, 사죄경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고 따라서 고해성사 후에 보속을 안했다고 해서 주님의 용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마땅히 고행성사의 완성을 위해서는 보속으로 끝맺는 것이 맞지만 보속을 못했다고 해서 고해성사가 무효가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속은 고해성사 안에서 어떤 위치를 가질까요?

 

보속이란 죄의 결과에 대해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르는 일입니다. 즉 죄를 지은 결과로 인한 인간의 벌(잠벌, 暫罰)을 기워 갚는 행위로서 죄의 용서 후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실천 행위입니다. 결국 우리가 사심판과 연옥에 가게 될 때 받아야 할 벌을 이 지상에서 갚아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해서 보속은 일반적으로 고해자의 영신적 이익을 위해 주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고해성사 후에 보속을 미처 행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고해성사를 다시 하실 필요는 없고, 또한 성체를 영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고해성사의 완성을 위하여 지금이라도 보속을 하시되, 만일 내 보속이 무엇인지 잊어버렸다면 다음 고해성사 대에 고해 사제에게 보속실천을 하지 못했던 이유 등을 고해하시면 다시금 보속을 받고 실천해서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다.

 

고해성사의 시작은 무엇보다 자신의 죄에 대한 통회입니다. 무엇보다 하느님 앞에 내 자신을 낮추고 이웃들과 화해하는 것이 진정한 고해성사의 은총임을 잊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2017년 4월 2일 사순 제5주일 빛고을 4면, 한분도 베네딕토 신부(교포사목, 프랑스 파리)]

 

 


 

 

궁금해요 전례 (5)

축복받은 묵주가 끊어져서 알을 채워 수리를 했습니다.

다시 축복을 받아야 하나요?

 

보통 가톨릭 신자들은 성물들을 구입하거나 선물 받으면 사제를 찾아가 ‘축복’을 받습니다. 옛날말은 ‘방사(放赦)’라고 하고, 잘못 사용하고 있는 말로는 ‘축성’이란 말이 있습니다. ‘축복’과 ‘축성’은 모두 성사와 유사한 은총의 방식인 ‘준성사’에 해당됩니다. 이중 ‘축복’이란 어떤 표지를 통하여 교회가 신자들의 영신적인 유익과 하느님의 은총을 받도록 하는 것이며, ‘강복’이나 ‘안수’도 이에 해당됩니다. 축복의 방식은 영적이고 현세적인 하느님의 은혜가 내리도록 사람이나 물건, 성물 등에 성수를 사용하거나 성호를 긋는 형식인데요, 청하는 이의 정성만이 아니라 교회 권위에 의해 그리스도 신비체 전체의 공로와 기도로써 그 효과를 얻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신자들은 축복된 물건을 사용하여 기도함으로써 구원의 길과 성화되는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하며 열심히 기도합니다. 즉 사제로부터 받는 축복은 축복받은 사람이나 성물, 물건을 통하여 이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교회가 지향하는 하느님의 축복이 전해지기를 비는 것이지요. 이에 반해 ‘축성’은 성당, 사람, 성체, 김름 등에만 사용되는 말이며, 축복과는 엄연히 구분되는 단어입니다.

 

사실 축복(benedictio)은 축성(consecratio)과 함께 그 출발점은 주교의 권한(재치권)에 해당합니다. 양떼들에게 사도들의 권한으로 복을 빌어주고 영신적 힘을 전해 주는 것이 축복이며, 이는 신학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재치권자(교구장)의 교도권(가르침)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축복받아 사용하다가 파괴된 성물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그리고 손에 맞지 않는 묵주반지를 녹여서 새 묵주반지를 만들어 사용할 수 있는지, 또 그 묵주반지는 다시 축복을 받아야 할지 이런 의문이 들 것입니다.

 

답을 드리자면 예전에 축복받은 성물이나 묵주반지라도 파손되거나 사용하기가 곤란한 경우라면 보수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일부 수리하거나 고쳤다고 해서 다시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기존의 금속제품을 녹여서 새로운 다른 성물을 다시 제작했다든지 하는 등(예컨대 묵주반지) 그 본래 형태가 완전히 변화되었다면 새롭게 축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녹이거나 변형될 때 따로 교회에 알리거나 사제에게 허락을 맡지 않아도 됩니다. 만일 완전히 파손되어 사용할 수 없는 성물이라면 조심히 태우거나 부수어 땅에 묻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가 성물을 보관하고 기도하는 것은 축복된 성물 자체의 효력 때문에 성물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성물을 통하여 주님을 기억하고 열심히 기도하기 위한 것임을 잊지 않도록 합시다.

 

[2017년 5월 14일 부활 제5주일 빛고을 4면, 한분도 베네딕토 신부(교포사목, 프랑스 파리)]

 

 


 

 

궁금해요 전례 (6)

감실에 성체는 모셔져 있는데,

왜 예수님의 피인 성혈(포도주)은 모시지 않나요?

 

 

초대 교회 신자들은 최후만찬 중 예수께서 분부하신 말씀을 충실히 따라 주님을 기억하면서 함께 모여 빵을 나누고 성체와 성형을 영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11세기까지 양형 영성체(성체와 성혈을 모두 영하는 방식)가 지켜졌으나, 12세기 말에 이르러 단형 영성체(성체만 영하는 것)가 우세하게 되었는데요, 그 이유는 신자들의 증가로 인해 전례와 영성체 시간이 너무 길어졌기 때문입니다. 이후 신학자들은 단형 영성체 또한 완전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는 온전한 영성체임을 신학적으로 뒷받침하였습니다. 즉 성체 안에는 예수님의 살만 존재하고 성혈 안에는 예수님의 피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체에도 예수님이 온전히 계시고 성혈 안에도 예수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이에 동방 교회에서 서방 가톨릭교회의 단형 영성체 관행을 반박하자 이에 대해 콘스탄티노플 공의회(1414-1418년)에서는 양형 영성체를 금하는 결정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오래전부터 교회는 영성체 방법뿐 아니라 미사 중 영성체를 받아 모신 후 남는 성체에 대한 보관과 병자들의 영성체에 대한 방식을 고민해왔습니다. 그래서 초기교회에서는 성체를 제의실에 보관하기도 했었습니다만, 이후에는 성당에(정확한 위치는 제대 위에) 감실을 설치하도록 하여 그곳에 성체를 모시도록 했습니다. 1917년 교회법전에는 제대 위 감실 설치 규정에 대해 구체적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우리말인 ‘감실(龕室)’은 실제로는 도교에서 따온 말입니다. 라틴어로는 ‘타베르나쿨룸(tabernaculum)’이라 하는데, 이 단어는 천막, 초막을 의미합니다. 교부들은 예수님의 육신을 잉태한 마리아의 태가 바로 최초의 감실이며 모든 감실의 원형이라고도 표현했습니다.

 

이렇게 감실에 성체를 모셔 두는 첫 번째 주 목적은 죽을 위험에 놓인 병자에게 노자 성체를 영해 주는 데에 있습니다. 두 번째 목적은 미사 외에도 성체를 영해 주며,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을 묵상하는 성체조배, 그리고 성체 강복을 위한 것입니다. 때문에 감실은 성체가 모독될 위험이 없도록 보호하고 보존하는 기능을 맡습니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빨간 초나 촛불로 감실 주위를 밝히도록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감실에 성체가 모셔져 있다면 이를 관리하는 이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본당 사제는 그에 대한 첫 번째 책임을 맡습니다.

 

사실 감실에는 미사 후 남은 성체와 성혈 모두를 보관할 수 있습니다. 다만 사목적으로 성혈은 미사 중 사제가 모실 수 있는 만큼만 축성되도록 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성혈은 (성작에 담아) 감실에 오래 보관하기에 적절치 않으므로, 또한 남은 성혈의 이동에 있어서 여러 가지 제약이 많기 때문에 감실에는 성체만 모셔두는 것입니다.

 

[2017년 6월 4일 성령 강림 대축일 빛고을 4면, 한분도 베네딕토 신부(교포사목, 프랑스 파리)]

 

 


 

 

궁금해요 전례 (7) 미사 때 왜 자주 앉았다 일어났다 하나요?

 

 

입대를 한 후 군대 훈련소에는 각 종교별로 종교행사(?)가 있습니다. 그 종교 중 군인 병사들이 싫어하는 종교행사가 바로 천주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종교행사 중에 자꾸 일어섰다 앉았다 귀찮게 해서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전례 중 이러한 동작은 알면 그것만큼 의미 있고 감동적인 동작들이 없답니다.

 

본래 아주 옛날 성당에는 신자석에 의자란 것이 없었습니다. 의자는 왕이나 주교, 주례 사제만이 앉을 수 있었죠. 신자들은 성당 안에서 서 있거나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교는 미트라(주교관)를 바꿔 쓰면서 전례의 성격, 즉 참회, 기쁨, 축제 때를 알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 중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와 보편 사제직을 강조하면서 전례 안에서 신자들의 동작 하나하나에도 그 의미가 풍부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능동적 참여를 증진하도록, 백성의 환호, 응답, 시편 기도, 따름 노래, 성가와 함께 행동이나 동작과 자세를 중시하여 한다.”(전례헌장 30항)

 

미사 중에 일어서는 것은 존경과 공경의 표시입니다. 초대 교회에서부터 일어선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는 희망과 믿음으로 종말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자세이자, 사제직을 수행하는 이의 자세입니다. 그래서 부활 시기에는 전례 중 모든 무릎 꿇는 동작을 일어서는 것으로 대신합니다. 오늘날 일어선다는 보편적인 의미는 복음을 듣고 하느님께 기도하는 이들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물론 일어서 있을 때 신자들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는 자세를 갖춥니다.

 

반면에 가르치는 이가 앉아 있을 경우에는 스승으로서의 권위와 위엄을 표시하고 있지만, 미사 전례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앉는 자세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경청하는 의미를 갖습니다. 즉 안정된 상태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조용히 듣고 묵상하기 위한 자세이며, 주의 깊게 경청하여 들은 것을 깊이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삶에 옮길 결심을 하기 위한 자세입니다.

 

무릎을 꿇는 자세의 의미는 누군가에게 용서를 청할 때, 또는 무엇인가 간절히 애원할 일이 있을 때 취하는 자세입니다. 아울러 무릎 꿇는 자세는 상대에 대한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그에게 자비를 바랄 때 사용되는 자세입니다. 본래 유럽과 서양에는 한쪽 무릎을 꿇는 동작도 있는데요, 우리나라는 모두 두 무릎을 꿇도록 하고 있고, 혹은 깊은 절로 대신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세들을 잘 알고 있다면 미사 중 전례의 성격을 잘 알 수 있고, 또 이를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더욱 가까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2017년 7월 2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빛고을 4면, 한분도 베네딕토 신부(교포사목, 프랑스 파리)]

 

 


 

 

궁금해요 전례 (8) 성수는 마셔도 되나요?

 

 

각 본당마다 성전에 들어갈 때 성수대에 있는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성호를 긋고 들어갑니다. 세례를 기억하고 참회하며 죄를 씻는 상징입니다. 미사전례에 참석하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성수를 손끝에 묻혀 미아에서부터 가슴 그리고 양어깨로 이어지는 성호경을 긋고 제대를 향해 절을 합니다.

 

본당 입구 성수대 근처에는 성수통이 비치된 본당도 있습니다. 수도 꼭지를 달아 둔 곳도 있고 바가지 혹은 컵을 비치한 본당도 있습니다. 열심한 신자들은 성수 전용 컵을 가지고 다니기도 합니다.

 

성수는 ‘거룩한 물’이란 뜻입니다. 거룩하다고 하는 이유는 사제의 축복 예식을 통해서 거룩하게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본래 물이란 생명과 죽음의 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인간의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요소이며, 노아의 홍수와 모세의 홍해바다 기적에서 보듯이(탈출 14,27-28) 물에 휩쓸리면 사람은 죽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는 세례의 물은 세속에서의 죽음이고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감을 의미합니다. 그 외에 그리스도교에서 물의 신학적인 의미는 풍요, 죽음, 회개의 의미를 갖습니다. 파스카와 부활의 의미도 있습니다. 사제는 거기에 정화와 보존이라는 의미를 지닌 소금을 더 넣어 성수를 축복합니다. 교회는 오래전부터 매월 첫 번째 주일미사 시간에 참회예식 대신 성수예식을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성수를 축복하고 파스카의 의미를 가진 세례를 기억하며 회개의 의미를 일깨우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제를 통해 축복된 성수를 성당 입구에 놓는 이유는 앞서 설명했듯이 먼저 세례를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세례는 언제나 부활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성수는 성스러움을 방해하는 죄스런 악마 등을 쫓음으로써, 더러운 것을 말끔히 씻어 내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수는 부정한 것을 접촉한 사람, 사물 혹은 장소를 정화시키고 질병의 증상을 완화시키는 등 치유의 기적을 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성수를 성당 봉헌식이나 여러 축복식(집, 차 등) 때나 장례예식 등에 사용하며, 신자들도 가정으로 가져가 정성스럽게 보관하다가 환자방문이나 기도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수로 밥을 하거나 마시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습니다. 그리고 미사 후 성당을 나갈 때도 성수로 다시 성호를 긋는 행동도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성수라고 부르는 물은 크게 2가지가 있습니다. 성당 입구에 놓여 있는 성수, 교회의 공식 성모님 발현지, 특히 루르드 성지에서 구할 수 있는 물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하면 성지에서 판매하거나 떠먹을 수 있는 물은 교회 공식 용어인 ‘성수’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2017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일 빛고을 4면, 한분도 베네딕토 신부(교포사목, 프랑스 파리)]

 

 


 

 

궁금해요 전례 (9) 묵주기도 끊어서 바쳐도 되나요?

 

 

묵주기도의 형식에 대한 질문이네요.

 

묵주기도는 라틴어로 로사리오(Rosario, Rosarium)라고 부릅니다. 묵주기도는 묵주를 사용하여 각 단마다 예수님 생애의 중요한 사건들을 묵상하면서 성모님과 함께 바치는 기도를 말합니다.

 

이 형식은 교황 비오 5세 때인 1569년에 공식적으로 정해졌습니다. 즉 환희의 신비 5단, 고통의 신비 5단, 영광의 신비 5단, 모두 15단으로 정하고 각 단은 주님의 기도 1번과 성모송 10번, 영광송 1번으로 기도하도록 했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2002년 10월 16일 교서를 통해 세 가지 신비 외에 예수님의 공생활에서 다섯 가지의 중요한 순간을 묵상하는 ‘빛의 신비’를 새로 넣도록 했는데요, 묵주기도는 단순하고 반복되는 기도이지만 ‘복음서 전체의 요약’이라고 말하셨을 정도로 중요하고 의미 깊은 기도입니다.

 

이 묵주기도 방식의 부리는 본래 사막의 은수자들이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시편 50편, 100편 또는 150편)를 바친 데서(성무일도의 기원)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수도자들이 기도하며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수난, 그리고 성모 마리아의 구원협력에 대한 신비를 구체적으로 나누어 묵상하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형식들이 갖춰졌습니다. 12세기 이후에는 많은 이들이 삼종기도를 바치기 시작하면서 마리아 신심이 깊어지자 신자들은 주님의 기도 대신에 성모송을 50번 혹은 150번 나눠서 바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은 묵주기도를 자주 바쳐야 하고, 일반 신자분들도 묵주(묵주반지)를 항상 가지고 다니면서 기도를 자주 합니다. 그런데 일상에서 묵주기도를 바치다가 보면 5단을 모두 바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화를 받는다거나, 버스 안에서, 혹은 길을 걸으면서도 언제든지 바칠 수 있는 일상의 기도이기 때문에 반대로 돌발 상황도 많이 발생합니다. 그러니 차마 다 바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묵주기도를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금 이어서 나누어 바칠 수 있겠습니다. 또한 9일기도와 40일기도 같은 지향을 가지고 하는 경우라면 하루를 거르게 될 경우 다음날 2일분을 바쳐도 됩니다. 굳이 처음부터 다시 하셔야만 하느님이 그 기도를 인정하시고 좋아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나의 정성과 불안한 마음이 있다면, 그리고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마음가짐이 있다면 처음부터 하시면 더 좋겠지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묵주기도보다, 지향기도의 날짜 일수보다 더 중요한 사항이 있는데요, 그것은 교회의 공식적인 전례(미사와 준성사)와 일곱성사에도 더욱 온전한 정성과 지향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묵주기도와 지향기도의 연결선상에서 완성이 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묵주기도 9일기도를 바치더라도 성당에 와서 미사와 성사를 통해 그 지향을 한 번 더 기도하면 주님의 은총을 온전히, 그리고 더 크게 받을 수 있습니다.

 

[2017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일 빛고을 4면, 한분도 베네딕토 신부(교포사목, 프랑스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