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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관련>/◆ 성 경 관 련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 김혁태 신부 역

by 파스칼바이런 2017. 10. 23.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참목자의 목소리

 

 

부활절과 성령 강림 대축일 사이의 주일들은 예수님 부활의 열매를 보여 줍니다. 곧 제자들도 부활합니다. 이 시기에 봉독하는 사도행전 독서들을 보면,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열린 마음으로, 혼란에서 단결로, 내적인 분열에서 자신들 앞에 놓인 과제에 대한 전적인 투신으로 나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도시에서 그들은 백성 앞에 나섭니다. 그리고 공공연히 예수님을 선포하고 그분이 메시아라고 증언합니다. 이는 그들이 목숨을 대가로 치러야 하는 일일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생명의 주인으로 믿는 사람은 그 무엇에도 더 이상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지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 자신들의 말이 마음속 깊은 곳까지 파고든 사람들을 얻습니다. 루카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많은 수의 유다인들이 몹시 근심하며 사도들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사도 2,37)

 

사도들의 말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을 강타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들은 토론을 시작하지 않습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지도 않습니다. “당신들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들은 정말로 아주 좋은 생각들이군요. 그에 대해 한번 곰곰이 심사숙고해보겠습니다.”

 

바로 그렇게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들려준 것도 생각이나 관념이 결코 아니었고요. 그들은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에 대해, 새로운 현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메시아를 통해 몸소 행동하셨다는 것, 그 행동은 죽음보다 더 강할 만큼 힘이 셌다는 것,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시민들은 실제로 일어난 사실에 대해 들었기 때문에, 이제 그들 자신도 사실에 토대를 두고자 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러면서 그들은 이제, 새것을 이미 경험한 이들에게 다가갑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들이 해야 할 다음 발걸음에 대해 알려 주기를 청합니다. 믿음이란 그저 생각들을 쌓아올린 멋진 건축물이 아닙니다. 단지 새로운 의식에서 그치고 마는 것도 아니지요. 그것은 먼저 아주 단순하게, 한 걸음 한 걸음씩 행동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는 구절에서 주목할 점은 또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하지 않고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말합니다. ‘우리’라는 말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믿음은 단순히 각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개별적으로 자신의 믿음을 관철시킬 수는 없습니다. 사회적 압력과 사회적 이상들이 각 개인보다 훨씬 더 강력합니다. 서로 함께 믿을 때만, 자신의 주위에 진을 친 불신앙의 유혹에 맞설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믿을 때만, 우리는 믿음의 온전한 기쁨을 경험합니다.

 

예수님의 목소리를 알아듣다

 

이런 모습은 양 떼의 표상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앙인들은 부활 대축일과 성령 강림 대축일 사이의 시기에 교회가 거행하는 전례를 통해 그러한 표상을 접합니다. 물론 이 표상이 현대인에게는 당장 낯설게 다가온다는 점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매력적이기보다는 거부감을 일으키는 표상입니다. 인간을 가축 떼에 비유하다니요! 현대인은 다른 양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붙어 다니며 울어대는 한 마리 양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말하려는 바는 그런 게 결코 아니지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서로 함께해야 한다는 것, 바로 이 점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이들은 일치로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아가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요한 복음서 10장에 나오는 착한 목자와 양 떼의 표상을 올바로 번역한다면, 바로 이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믿음에서 오는 함께함, 사회는 알지 못하는 그런 연대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누구도 더 이상 혼자가 아닌 곳에서 이루어지는 연대성이 있습니다. 언제나 각자 자신의 고유한 이름으로 불리는 곳, 말하자면 각자의 소명과 길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고, 그럼으로써 누구나 온전히 각자 자신으로 존재하는 곳, 그러면서도 더불어 구성원 모두가 공동의 과제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이끄시는 원대한 역사에 함께 동참하는 곳, 그런 곳에서 이루어지는 함께함이 있습니다.

 

이때 여기에, 참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이들을 앞장서 가십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압니다(요한 10,4 참조). 그들은 그분의 목소리를 알아듣습니다(요한 10,3 참조).

 

현대인은 끝없이 많은 목소리들에 둘러싸여 삽니다. 특히 무수한 대중매체들이 혼란스럽게 뒤죽박죽 쏟아내며 들으라고 강요하는 목소리들에 둘러싸여 지냅니다. 많은 목소리가 자신을 현명하고 중대하며, 도덕적이고 참신한 것으로 내세우지만, 대부분은 완전히 빈 깡통이자 자기 연출, 두려움과 공격적 충동의 목소리일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목소리는 외부에서만 오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쉴 새 없이 텔레비전 리모컨을 누르거나 인터넷을 클릭하며 그런 목소리들을 찾습니다. 이처럼 외부적인 작용 외에도, 그런 목소리들은 우리 자신 안에서 나오기도 합니다. 지극히 다양한 목소리들이 자주 우리 안에 켜켜이 쌓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예수님의 목소리에 신뢰를 두고 싶어 합니다. 그 목소리를 믿고, 착한 목자를 따라가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우리 내면에서 다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불신과 두려움, 저항의 목소리가 솟아납니다. 세상 안에, 그리고 우리 안에 그처럼 수많은 목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한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마다 우리 각자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 그 소리를 듣고 우리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래, 바로 그분의 목소리야!”

 

이 목소리는 하늘에서 수직으로 낙하한 게 아닙니다. 그 자체로 주술적인 것도 전혀 아닙니다. 그 목소리는 아주 인간적입니다. 낮은 목소리이고, 그럼으로써 우리가 자유롭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마침내 고요하게 될 때, 그런 다음 기도 안에서 우리 마음을 열 때, 우리는 그 목소리를 감지합니다. 복음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그 목소리를 알아차립니다. 무엇보다 우리가 믿음 안에서 함께 모여 있을 때, 우리는 그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것은 진리와 생명의 목소리입니다. 그리고 이 목소리는 세상의 다른 모든 목소리들과는 구별됩니다.

 

그것은 바로 이렇게 말씀하시는 분의 목소리입니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10)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4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성령은 누구이신가?(Wer ist der Heilige Geist?)

 

 

빈자리 하나 없이 꽉 들어찬 비행기를 혼자서 타본 적이 있으신가요? 너무 비좁아 아마 고생을 많이 했을 것입니다. 고생은 비행기가 이륙하기도 전에 이미 시작되지요. 출입구에서부터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 자체가 이미 힘겨운 일입니다. 기다려야만 하지요. 자신의 자리를 찾고, 짐들을 내려놓고, 앉을 수 있게 되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드디어 자리에 착석해 안전벨트를 맵니다. 왼쪽 오른쪽, 두 사람 사이에! 거기 그렇게 꼼짝없이 앉아 있어야 합니다. 자리는 너무 비좁아서 신문 한 장 넘기는 것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양쪽에 앉은 사람에게 말을 건네기도 난감합니다. 둘 다 그럴 마음이 전혀 없어 보이니까요. 다른 낯선 사람들과 붙어 앉아 있는데, 그들과의 거리는 엄청나게 멉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자주 벌어집니다. 대형마트 계산대 앞에 길게 늘어선 줄에서, 좌석이 매진된 극장 안에서, 그리고 지하철에서! 이때 공간적으로 가까이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누군가와 공간적으로 아주 가까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와는 세상 저편에 떨어져 있습니다. 연관성이라곤 전혀 없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와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두 사람을 생각해봅시다. 그들은 얼마 동안 떨어져 있습니다. 어쩌면 수천 킬로 넘는 거리를 두고…! 통신에 장애가 생겨, 그들은 전화를 할 수도 없고 메일을 주고받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 먼 거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까이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를 생각합니다. 상대방이 지금은 무엇을 하고 있을지 혼자서 생각합니다. 상대방을 바로 눈앞에 그려봅니다. 서로 함께 있음을 느낍니다. 다시 만나서 함께하게 되면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들을 적어보기도 합니다. 마음으로 서로 대화를 나눕니다.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는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에게 가까이 존재하기도 합니다. 그 모든 공간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마음과 영 안에서’ 사랑하는 이 바로 곁에 있을 수 있습니다.

 

비슷한 예들을 우리는 모두 잘 압니다. 공간적으로 아주 가까이 있지만 그 거리는 전혀 좁힐 수 없는 경우! 반대로, 공간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서로 바로 곁에 있는 경우! 이 바로 곁에 있음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그처럼 깊은 일치를 이루어줄까요? 물리적으로는 측량할 수 없으며, 그 어떤 파동이나 진동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은 그 일치를! 그럼에도 실제로 존재하며, 그래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그 일치를!

 

모든 간격을 이어주시는 성령

 

성령이 누구이신지 알기 위해서는 그러한 경험들이 분명 큰 도움이 됩니다. 성령께서는 신앙인들을 서로 이어주는 그 ‘사이’이십니다. 성령께서는 그 어떤 간격도 다 이어주십니다.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든 독일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든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서로 가까이 존재하게 해주십니다. 우리가 서로 하나의 뜻을 지닐 수 있도록 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교회가 여러 민족으로 이루어진 한 하느님 백성이 되게 해주십니다. 교회 공동체들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게 해주십니다. 성령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 각자는 사실 믿을 수 없을 만큼 서로 다르기도 하고, 원래 본성적으로 공통점이 별로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 우리를 성령께서는 하나가 되게 이끌어주십니다.

 

성령께서는 예수님의 업적을 계속해서 펼쳐 나가십니다. 바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을 건네시기 때문이지요. 성령께서는 땅의 얼굴을 새롭게 하십니다. 성령은 창조주 하느님의 영이시기도 하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은 그렇게 세상을 그 목적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물론 성령은 보이지 않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분의 작용들을 보고 우리는 성령을 인식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러한 작용들을 성령의 열매라고 일컫지요. 그가 손꼽는 성령의 열매들은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갈라 5,22-23)입니다.

 

성령의 열매인 친절

 

성령의 이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저는 여기서 ‘호의’(아래에서는 ‘친절’로 번역함 - 옮긴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먼저, 친절과 성령 사이에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것일까요? 물론 당연히 관련이 있지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친절은 겉치레에 그치고 마는 그저 순전히 피상적인 친절이 아닙니다. 그런 친절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에만 목적을 두며, 전원을 켜고 끄듯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서만 웃음을 짓고 이내 다시 싸늘해집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친절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친절을 의미합니다. 다른 이를 위해서, 그를 이해할 수 없을 때조차도 그가 잘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친절은 온유하고 선한 마음과 충만한 애정을 지녔습니다. 다른 이 역시 하느님께서 창조하셨고, 나 역시 그에게 하느님의 친절을 조금이라도 전해주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여기서 말하는 친절은 용서할 줄 아는 친절입니다. 위로를 건넬 줄 알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도와주며, 다른 이를 위해 자신의 시간을 내는 친절, 다른 이가 존재함을 기뻐하는 친절입니다. 바로 이러한 친절이 성령에게서 오는 친절입니다. 이러한 친절은 상투적이고 애매모호한 인본주의(Humanismus)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이 친절은 “우리 구원자이신 하느님의 호의와 인간애”(티토 3,4)라는 빛을 반사하기 때문이지요.

 

성령 강림 대축일 미사의 입당송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님의 영은 온 세상을 채우시고…” 이 말씀은 본래 지혜서 1장 7절에서 따왔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 바로 앞에 “지혜는 다정한 영”(지혜 1,6)이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다정한 영, 곧 인간에게 친절한 주님의 영이 온 땅을 채우신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과 교회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이 성령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그들에게 선사하는 친절을 통하지 않고서 다른 방법이 있을까요? 성령에게서 오는 친절을 통하지 않고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다른 이를 선의와 친절이 가득한 마음으로 바라보며 그에게 좋은 것만을 바라는 사람은 이미 그 자체로, 성령께서 계시고 하느님의 이 영이 세상을 변모시킨다는 사실을 증명해 보이는 사람입니다.

 

당신께서 오시도록 청하기를 바라시는 성령

 

성령에 대해 이야기할 때, 또 한 가지 아주 중요한 점이 있습니다.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 위로 성령께서 어떻게 임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여기서 그의 묘사는 눈에 그리듯 아주 선명하지요. 하지만 이에 앞서 그가 묘사하는 또 다른 장면이 있습니다. 곧 그에 따르면, 갓 생겨난 공동체는 늘 다시 모여 한 마음으로 기도에 전념하였다고 합니다(사도 1,14 참조). 그들은 하느님께 간청하고, 기도 안에서 기다렸으며, 그렇게 기다리고 기도하는 가운데 충실히 머물렀습니다. 마침내 성령 강림의 날이 오기까지!

 

이 사실이 루카에게 왜 그토록 중요했던 것일까요? 성령 강림 전까지 이처럼 먼저 열흘 동안이나 공동체가 모여 기도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고 열흘 뒤에 성령 강림이 일어난 것으로 전한다 - 옮긴이). 왜 예루살렘 공동체는, 그리고 우리 모두는 성령께서 오시기를 청해야만 하는 것일까요? 어찌하여 성령께서는 당신께서 오시도록 청하기를 바라시는 것일까요?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느님의 영은 최고의 자유이시기 때문이지요. 이 때문에 성령께서는, 자유 안에서 당신을 갈망하는 이들에게만 오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유는, 곧 정말로 성령을 고대하고 성령께 자신의 전부를 열어 보일 수 있는 자유는 기도 안에서만 달성할 수 있습니다.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광기를 대중에게 강요할 수 있습니다. 협박과 폭력, 압제와 강압, 테러를 통해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도 한 마음으로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치는 그릇된 일치, 말 그대로 전도된 일치일 뿐입니다. 조작과 억압을 통해서만 달성할 수 있는 일치이지요.

 

반면에 성령께서는 순전한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진짜 사랑은 언제나 다른 이의 자유를 바랍니다. 이 때문에 성령께서는 조용하고 부드럽게, 흔히 나지막이 침묵 가운데 오십니다. 우리의 사랑을 기대하시며!

 

믿는 이들이 자유 안에서 당신을 받아들일 때만 성령께서는 임하십니다. 그분 자신이 자유이시기 때문이지요. 그 어떤 강압도, 그 어떤 협박도 모르는 절대적인 자유이시기 때문이지요.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5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엘리야의 후계자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그분을 위한 자리조차 없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이미 모든 자리가 꽉 들어차 있는 것이지요. 우리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의 삶을 계획해 놓고 있습니다. 자신만의 생각들과 자신만의 소망과 갈망들, 자신만의 꿈들로 가득합니다. 가능한 모든 수단과 대책들을 미리 세워 두고 있지요. 자신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러니 거기 하느님을 위한 자리는 없습니다. 사실 그분이 우리의 개인적인 삶에 끼어들 권리조차 있기나 한 것일까요? 어떤 이는 말합니다. “나는 우리 부모에게 온통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 돼!” 또 다른 이는 말합니다. “드디어 내가 가정을 이루게 되었어!” 또는 이렇게 말하는 이도 있지요. “나는 업무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어!” 또 “나는 집을 짓고 있는 중이야!”라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다들 말합니다.

 

“시간이 없어!” ‘혼인 잔치’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에서, 초대받은 이들이 말합니다(루카 14,18-20 참조). “내가 밭을 샀는데 나가서 그것을 보아야 하오.” “내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길이오.” “나는 방금 장가를 들었소.” 시간이 없다고, 다들 하나같이 양해를 구합니다. 태만에서 나온 핑계들이 전혀 아니지요. 말 그대로 충분한 근거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늘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생각에, 하느님은 늘 너무 늦게 오십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것은 이 세상에서 이미 끝장난 것처럼 보입니다. 이처럼 ‘나’라는 집이 이미 다 들어차 있기 때문에, 하느님을 위한 자리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분이 오시어 문을 두드릴 때, 우리는 모두 무언가에 정신없이 열중하고 있지요.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또 전혀 달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렇기 때문에 정말로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그런 기적들 때문에 교회는 살고, 세상도 삽니다.

 

겉옷을 벗어 걸쳐주다

 

이스라엘 북왕조 시대에 엘리야라는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계속 참하느님에게서 떨어져 나가 주위의 훨씬 더 편하고 안락한 신들에게 정신이 팔려 있던 시절이었지요. 이때 엘리야가 거의 혈혈단신으로 하느님의 것을 대변합니다. 그는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에 탄식합니다. 한없지친 나머지 죽기를 간청합니다(1열왕 19,4-5 참조). 그러자 하느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너에게는 이미 후계자가 있다. 나는 너의 일을 이어받을 사람을 이미 보아두었다.”(1열왕 19,16 참조) 뒤이어 곧바로 엘리야는 엘리사를 만나게 됩니다(1열왕 19,19-21 참조). 엘리사는 겨릿소를 앞세우고 밭을 갈고 있던 참이었지요.

 

엘리사는, 대개 이런 종류의 부르심이 늘 그렇듯이,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예언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농사꾼이었고, 부농의 아들이었습니다. 그 부모의 농토는 척박한 산기슭이 아니라 비옥한 평지였습니다. 한꺼번에 여러 쌍의 겨릿소를 부려야 밭을 갈 수 있었지요. 엘리사는 마침 여러 명의 일꾼들과 여러 쌍의 소들을 감독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을 앞세우고 엘리사 자신이 마지막 ‘열두 번째’ 겨릿소를 부리고 있었으니까요. 맨 뒤에서 그 자신도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엘리야가 길을 지나다가, 밭을 갈고 있던 엘리사에게 자신의 예언자 겉옷을 걸쳐줍니다. 이는 예언자적 표징 행동이지요. 곧 하느님께서 너를 부르신다는 뜻을 나타냅니다. 바로 이런 뜻이지요. 너는 그를 도와야 한다. 세상에 구원을 가져다주시려는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에 너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 일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을 필요로 하신다. 바로 너를 필요로 하신다. 그분이 너에게 당신의 영을 주신다. 너를 덮는 외투처럼 당신의 영으로 너를 감싸신다. 와서 도와라!

 

엘리사는 내면 깊숙이에서 흔들립니다. 이 일이 하느님의 것과 관련됨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것보다 중요하며, 열두 겨릿소와 부모의 경작지보다도 더 중요함을 알아차립니다. 엘리사의 마음이 불타오릅니다. 그는 엘리야를 따르기로 작정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막상 그리 단순하지 않은 여러 이유들이 그에게 떠오릅니다. 먼저 부모에게 가서 작별 인사를 고해야 합니다. 본문의 글자 뜻대로 하면, 그는 마지막으로 부모에게 입맞춤을 해야 합니다(1열왕 19,20 참조). 어쨌든 그는 전반적으로 부모와 상의해야 합니다. 정리해야 할 일들도 아주 많고, 여전히 심사숙고해야 할 사항들도 넘쳐납니다.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떠난다? 말처럼 그리 간단하지 않습니다.엘리사의 마음속 움직임을 엘리야는 이해합니다.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하였다고 그러느냐?”(1열왕 19,20)라고 엘리야는 말합니다. 무슨 뜻일까요? 말하자면 이런 뜻입니다. “다녀오너라. 너는 전적으로 자유롭다. 사명을 맡기실 때, 하느님께서는 그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으신다. 네가 원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은 우리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될 것이다. 선택은 너의 자유다.”

 

밭 한가운데서

 

부농의 아들 엘리사에게 허용된 이 온전한 자유의 순간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텍스트의 이야기는 전해주지 않습니다. 다만 엘리사가 취한 행동에 대해 전합니다. 곧 그는 집으로 가지 않습니다. 일꾼들에게 마련해줄 작별의 식사를 위해 장작과 고기를 구해 올 별도의 시간조차도 따로 내지 않습니다. 한시도 흘려버릴 수 없을 만큼, 엘리사가 하느님의 것에 사로잡힌 것이지요. 그는 쟁기를 잘게 부수게 하고, 불을 지피고 자신의 두 겨릿소를 잡게 합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일꾼들과 함께 밭 한가운데서 작별의 식사를 나눕니다. 그런 다음 엘리야를 따라나서지요.

 

하느님께서는 어쨌거나 세상에서 자리를 찾으십니다. 늘 다시, 당신 것을 위해 자신의 삶을 전환하는 이들을 찾아내십니다. 성경은 그러한 이야기들로 가득합니다. 어부였던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호수에 그물을 던지고 있을 때, 예수님은 그들을 부르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마르 1,17) 그러자 그들은 곧바로 예수님을 따라나섭니다. 한번은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십니다. 그러자 그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지만 연로하신 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그 전에는 좀 곤란합니다.”(루카 9,59 참조)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예수님께 깊은 감명을 받은 또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찾아옵니다. 하지만 그전에 먼저 그는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만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십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루카 9,62)

 

모두 우리 시대의 시민사회적인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그러한 상식과 이해가 정말로 대단한 것일까요? 그것이 이 세상의 문제를 하나라도 제대로 해결해준 적이 있을까요? 가난한 이들은 여전히 굶주립니다. 세상은 난민들로 넘쳐납니다. 전쟁과 전쟁의 위협들은 끊이지 않습니다. 세상을 위한 희망은 오직, 당신께서 몸소 마련하실 구원을 위해 헌신하는 이들을 하느님께서 늘 또다시 찾아내시는 것, 바로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부르심에 마음이 흔들리고, 하느님께 공간을 내어드리는 이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다음에요!” “내년에요!” “제가 이것 이것을 다 끝낸 다음에요!”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찾아내십니다. 보통 우리 인간이 자신만의 집을 이미 다 채워 놓고 있는데도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니 세상에 그보다 더 큰 기적이 있을까요. 이런 점에서 우리가 처음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것도 썩 나쁘지는 않습니다. “말도 안 됩니다. 왜 하필 전가요?” 이런 말도 온전히 정상적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러하니까요. 중요한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을 닫아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열어 두고, 자신에게서 기적이 일어나도록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부르심의 다양한 모습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는 이야기는 많은 점에서 엘리사의 소명 이야기와 닮았습니다. 부르심을 받은 이는, 자신이 지목되었다는 사실을 곧바로 알아차립니다. 온전히 개인적으로 그 자신이 부르심을 받은 것이지요. 그리고 이 부르심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과 관련됩니다. 이 부르심 앞에서 대답을 뒤로 미룰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이런저런 조건이 맞는다면!”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은 그 즉시 다만 “예.”라고 말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엘리사가 그렇게 했지요. 베드로와 안드레아가 그렇게 했고, 사도들이 모두 그렇게 했습니다. 물론 다른 태도도 존재합니다. 부르심을 비껴가는 방법이지요. 바로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를 위한 부르심이라고요? 그것은 사제나 주교들에게 해당되는 일 아닌가요? 또는 수도회에 입회하려는 이들에게나 해당되겠지요. 서약을 하고, 자신의 온 삶을 하느님께 바치려는 이들에게나 해당될 것입니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지요. 저는 ‘보통의’ 그리스도인입니다. 저는 그런 부르심을 받은 적이 없어요. 엘리사 이야기나 사도들이 부르심을 받은 이야기는 저와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논리는 핵심을 벗어납니다. 도피에 지나지 않지요. 하느님을 피하려는 시도입니다. 세례를 받은 이, 견진을 받은 이는 누구나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는 부르심의 다양한 모습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면 가난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부유함의 부르심도 있습니다. 곧 자신의 부를 하느님의 것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하라는 부르심이지요. 하늘 나라를 위해 독신의 삶을 사는 부르심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늘 나라를 위해 혼인의 삶을 사는 부르심도 있습니다. 이는 자신의 혼인과 가정을 하느님의 것을 위해 열어 놓는 것을 의미하겠지요. 교회 안의 수많은 부부가 이미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저는 아퀼라와 프리스킬라의 예를 들고 싶습니다(사도 18,1-4 참조). 그들은 바오로를 자기 집에 맞아들이고, 바오로에게 생계에 필요한 일거리도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바오로의 선교 여행을 지원했지요. 그들이 없었다면, 바오로가 이룬 많은 일들이 아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부르심이 존재합니다. 세례 받은 이는 누구나 자신의 소명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것에 봉사할 자신만의 가능성을 누구나 갖고 있는 것이지요. 각자에게 필요한 것은 다만,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정확하게 감지해내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 자신의 온 실존을 다해 주저함 없이 하느님께 자리를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엘리사처럼!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6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하느님 나라의 식탁 질서

 

 

복음서들은 식사에 초대받으신 예수님의 이야기를 그야말로 자주 전합니다. 그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지요. 식탁에 자리한 예수님께서 손님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지켜보십니다. 그러고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8-11)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체계

 

초대받은 이들은 말하자면 가장 좋은 자리에 앉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행태가 무엇을 반영하는지 아주 정확하게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비판하십니다. 물론 그분의 비판은 정당하지요. 그리고 이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자신의 위신과 명예에 신경을 쓰는 것만큼 우리 안에 근본적인 욕구도 사실 없으니까요. 자신의 얼굴을 잃는 것, 곧 자신의 존재가 무시당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어느 사회나 자리를 확고하게 나타내는 상징체계들을 마련해 놓고 있지요. 누구나 그 사회에서 각자 차지하는 자리가 있고, 그 자리의 의미는 공공연히 드러나 있습니다. 중세에 그리고 그 이후로도 오랫동안 유럽 사회에는 복장에 대한 공식적인 규율이 존재했습니다. 신분의 차이를 정당화하는 규율이었지요. 물론 여기에는 언제나, 각자가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나타내려는 목적도 있었습니다. 하류층은 삼베와 양털로 짠 옷을 입었습니다. 상류층은 비단과 벨벳으로 된 값비싼 수입품들을 입었지요.

 

옷 색깔도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은 회색이나 갈색처럼 자연적인 색깔의 옷을 입었습니다. 반면 부유한 이들은 외국에서 들여온 귀한 색깔로 물들인 소재의 옷을 입을 수 있었지요. 자주색은 최상위 귀족층만이 입을 수 있었습니다. 금으로 된 장신구도 귀족들에게만 허용되었습니다. 평범한 여인네들은 금으로 치장을 할 수 없었습니다. 설령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그러했지요.

 

이것이 옛 유럽 사회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과거로 눈길을 돌릴 필요조차 없이, 오늘날의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사회적인 차이를 구분 짓는 세밀한 표지들이 여전히 존재하니까요. 예전과 마찬가지로 신분의 차이를 나타내는 상징체계들이 존재합니다. 자동차, 집, 시계, 자기만의 전담 심리치료사, 이런 것들 말입니다. 우리야 초호화 리무진도 없고 제2, 제3의 별장도 없지요. 하지만 윗자리를 차지하려고 애쓰던 이들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신 예수님의 말씀은 곧바로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됩니다.

 

안간힘을 다해 자신의 위치를 남들에게 과시하려는 모습에 우리는 물론 웃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역시 아주 교묘하게 그러한 행동을 합니다. 자신의 약점은 숨기고 공로는 인정받는 데에 생각과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마땅한 자격이 없음에도 칭송받기를 갈망합니다. 다른 이들의 도움은 정색을 하고 거절합니다. 자신의 명성에 누가 된다고 여기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주위의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합니다. 그러고는 너무 쉽게 그들을 깎아내립니다. 은연중 자신을 차별화하고 높이려는 의도가 숨어 있지요. 근본적으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비판하신 바로 그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기심에 가득 차 윗자리를 선망합니다.

 

불쾌감을 유발하는 본문?

 

그렇다면 우리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권고는 무엇인가요? 우리가 어떻게 달리 행동하기를 바라시나요?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주인이나 귀빈 옆의 윗자리를 고르려 하지 말라고요. 오히려 끝자리에 가 앉으라고요. 그러면 초대한 이가 와서 우리를 더 높은 자리로 안내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이 복음서의 이 대목을 접하면 자주 곤란함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일종의 겸손을 가장한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는 행동을 하라는 말씀으로 들리기 때문이지요. 더 나은 자리를 얻기 위해 일부러 낮은 자리에 가 앉으라니요? ‘속셈이 있는’ 겸손이 아닌가요? 전혀 겸손하지도 않으면서 실제로는 자신이 인정받는 것을 겨냥한 일종의 속임수와 다를 게 무엇이 있을까요? 실제로는 전혀 마음에도 없는, 그저 ‘계산적인’ 자기 낮춤이 아닌가요?  예수님의 말씀을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지요. 특히 머릿속이 심리학적 지식들로 가득 찬 현대인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법도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그분은 여기서 전적으로 실천적인 지혜의 관점에서 생각하십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구약성경적인 삶의 지혜라는 관점에서 생각하십니다. 곧 그분은 지극히 단순하게, 경험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어떻게 행동할지를 이야기하십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을 삼가 행동합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윗자리를 고르려 하지 않습니다. 바로 구약성경의 잠언이 지혜로운 이들에게 권고하는 바를 그대로 행동에 옮깁니다. “임금 앞에서 잘난 체하지 말고 지체 높은 이들 자리에 서지 마라. ‘이리 올라오게!’ 하는 말을 듣는 것이 귀족들 앞에서 하대받는 것보다 낫다.”(잠언 25,6-7)

 

이러한 지혜는 근본적으로 이성적인 권고에 따른 것이지 계산적인 속내와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에서의 실상을 설명하기 위해 여기서 바로 그러한 지혜를 끌어들이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말하자면 본보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곧 보통의 세상에서 지혜로운 이들의 처신이 그러하다면, 하느님 나라에서의 행동과 관련해서는 마땅히 더더욱 그러하다고요.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에서 핵심은, 초대받은 이들의 실제 처신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의 올바른 행동에 대한 비유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비유가 엄하지만 꼭 필요한 말씀입니다. 이 비유는 다음 말씀에서 정점에 달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11) 모든 권력의 질서를 뒤집어엎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의 위치가 얼마나 높은 것인지는 우리 인간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결정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리아가 마니피캇에서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루카 1,52)라고 노래한 바를 정확하게 달리 표현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식탁 질서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된 곳에서는 전혀 다르게 행동할 새로운 가능성들이 존재합니다. 하느님 나라가 피어나는 곳에서는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투쟁할 필요가 없습니다. 거기서는 자리를 양보해도 됩니다.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 사는 새 삶이 시작된 바로 그곳에서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이름이 이미 하늘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지요(루카 10,20 참조). 하느님의 얼굴 바라보며 사는 삶이 시작된 곳에서는 우리의 약점들을 숨길 필요가 더 이상 없습니다. 누구나 다 약하다는 사실이 거기서는 명명백백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모두 복음서가 말하는 가난한 이, 장애인, 다리 저는 이, 눈먼 이들이기 때문입니다(루카 14,13 참조). 거기서는 이제 모든 상처가 치유될 수 있기에, 누구나 기꺼이 자신의 상처들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초대받은 식탁에서의 올바른 처신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언뜻 예의범절에 관한 이야기로 보이지만, 사실은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띤 비유의 말씀입니다. 초대받은 이들의 구체적인 행동이 그분에게는,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 사는 삶이 근본적으로 어떤 것인지를 설명할 좋은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이 식탁 질서에 따라 산다면, 세상은 몰라보게 달라지겠지요. 모든 것을 뒤엎는 혁명과도 같은 일이 벌어질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여기서 예수님의 말씀을 그저 식탁에서의 예의범절에 관한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그릇된 이해일 테지요. 달리 말해, 입 안 가득 음식을 넣은 채 말해서는 안 되고, 다른 이들의 음식이 다 차려진 다음에야 우리도 먹기 시작해야 한다거나 또는, 우리가 서로에게 좀 더 예의를 지키고 좀 더 다가가며 좀 더 친절해진다면 하느님의 새 세상이 이미 시작된 것이라고 여기는 생각들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서 시작하신 새것은 그처럼 값싸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식탁 질서’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당신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는 방식으로, 아무도 원하지 않는 종의 일을 그분이 몸소 행하심으로써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요한 13,1-17 참조).

 

물론 이 이야기 역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때로, 특히 기분이 좋을 때 고상한 척하며, 상대를 얼싸안고 무거운 짐을 들어다준다거나,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기꺼이 할애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니까요. 예수님께서 최후 만찬에서 발을 씻어주신 이야기를 그런 차원에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그 일은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일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주인’과 ‘종’이라는 끊임없는 투쟁의 관계를 당신 안에서 종식시키십니다. ‘위’와 ‘아래’ 사이의 그 끝없는 갈등을, 강자와 약자 사이의 그 무한 경쟁을 끝장내십니다. 그분이 이 모든 것에 종결을 가져오십니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것을 위해, 그럼으로써 온전히 다른 이들을 위해 사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이것이 얼마나 엄청나고도 기절초풍할 일이었는지요. 신앙심 깊은 이들조차도 그분을 반대해 들고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국 그분을 죽음으로 내몰았으니까요. 그분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우리의 본 모습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그분의 죽음을 통해 비로소 한 식탁 둘레에 서로 함께하는 새로운 현실이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섬기는 이도 섬김을 받는 이도 모두 다함께 기뻐하며 이미 지금 하느님의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는 새로운 공동체가 가능해졌습니다. 그 이후로 우리는 모두 하느님 백성 안에서 하느님의 혼인 잔치에 함께하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신명기가 갈망하던 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곧 거룩한 도성에서 누구나 다, 가난한 이와 이방인들조차도 모두 하느님 앞에서 기뻐하는 잔치가 시작되었습니다(신명 16,9-15 참조). 예수님의 섬김으로, 맨 끝자리로 가는 길을 택하신 예수님의 그 헌신으로 가능해진 그 잔치가! 그러니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에게 친절하게 대하라는 윤리적 권고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을 깨닫는 데 그 핵심이 있습니다. 그 선물은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의 도성에서 누리는 새로운 삶, 이미 영원으로 이어지는 축제의 모임에 함께하는 것, 오늘 이미 시작된 종말론적 식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히브 12,18-29 참조). ‘자신을 낮추는 것’은, 예수님의 모범 이후로, 남들 앞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깎아내리는 억지스런 자기 비하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겸허히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지요. “저는 초대받을 자격도, 공로도 없습니다. 하지만 저도 초대를 받았지요. 감히 함께해도 됩니다. 잔치의 기쁨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함께하는 이 기쁨 때문에, 저는 어느 자리에 앉든 상관없습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8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믿음의 힘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돌무화과나무더러 ‘뽑혀서 바다에 심겨라.’ 하더라도, 그것이 너희에게 복종할 것이다.”(루카 17,6)

 

도발적인 말씀

 

이 말씀이 초대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이 말씀이 자주 인용된 데서 알 수 있습니다(마르 11,23; 마태 17,20; 마태 21,21; 루카 17,6). 바오로 사도도 이 말씀을 알고 있었지요(1코린 13,2). 이 말씀이 무엇인가 결정적인 것을 폭로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초대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자주 인용할수록, 조금씩 표현이 달라지기도 했습니다. 이 말씀도 그런 경우이지요.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산더러 들려서 바다에 빠지라고 합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나무더러 그렇게 하라고 하지요. 이런 식의 변형은, ‘예수 전승’이 초대 교회에서 얼마나 역동적이고 유연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루카는 이처럼 자유롭게 전승되던 예수님의 말씀을 새로운 맥락에 자리 잡게 합니다. 조그마한 상황 하나를 바로 앞에 배치하지요. 곧 그전까지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고 계신 것으로 되어 있는데, 갑자기 사도들이 나서서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루카 17,5) 이 청원을 받아들여 예수님께서 하시는 대답이, 나무를 옮겨 심는 이 믿음의 말씀입니다. 사도들의 청원과 예수님의 대답 사이에는 어떤 관련성이 있을까요? 예수님이 그들의 청을 받아들여 그들의 믿음을 더해주셨을까요?

 

어느 모로 보나 대답은 ‘그렇지 않다’입니다. 오히려 그분은 사도들의 청원이 합당하지 않음을 그들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들의 청원은 언뜻 보면 훌륭해보이지요.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물론 그들의 청원은 경건함을 불러일으킵니다. 말하자면 “우리 믿음이 너무 작습니다. 그러니 더 커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는 의미니까요. 하지만 동시에 이 청원은, 믿음의 일부분은 이미 자신들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생각을 밑바탕에 깔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이미 언급했듯이, 참으로 경건해보이는 청원입니다. 흥미를 불러일으키기까지 하지요. 하지만 루카는 사도들의 청원이 실제로는 전혀 적절하지 않다고 여깁니다. 아니 오히려 그 청원이 지닌 속내를 밝히 드러냅니다. 루카가 보기에, 예수님의 대답은 본질적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밑바탕에 두고 있는 생각은 틀린 것이다. 너희는 너희의 믿음이 여전히 너무 작다고, 그래서 믿음을 더해야만 한다고 말한다. 그런 생각이야말로 허상이고, 너희는 바로 그러한 허상 속에 산다. 너희의 믿음이 너무 작은 게 아니라, 사실 그런 믿음조차 아예 없는 것이다(루카 8,25 참조). 작은 믿음이라도 너희에게 있다면, 그것으로 이미 족할 것이다. 곧 아무리 작더라도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라도 이미 너희에게 있다면, 너희가 세상을 바꾸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돌무화과나무가 바다에 심겨지는 표상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돌무화과나무는 특히 뿌리가 크고 깊습니다. 그런 나무를 뽑아 겐네사렛 호수에다 심는다는 것은 아예 불가능합니다. 자연을 거스르는 일이지요. 생물학적 법칙이나 물리적 법칙에도 어긋날 뿐만 아니라, 인간의 모든 경험에도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바로 그 점을 겨냥하지요.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정말로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이 아무리 작을지라도, 너희가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고 세상과 세상의 법칙들을 뒤집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너희가 그럴 수 없으니, 이는 결국 너희에게 아무런 믿음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경건한 듯 그렇게, 내가 너희의 믿음을 더해주라고 말하지 마라!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제 생각에, 이것이 루카 복음서의 텍스트가 말하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제 생각에, 이것이 루카 복음서의 텍스트가 말하는 논리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그야말로 깜짝 놀랄 만큼 예리하고 철저합니다. 믿음은 근본적으로 삶의 방향을 새롭게 정하는 것이지요. 때문에 그런 믿음에는 더 적고 더 많고 하는 문제란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 둘 중에 오로지 하나만 있을 뿐입니다.

 

이로써 믿음의 본질적인 단면이 밝히 드러났습니다. 곧 믿음은 먼저 나 자신의 삶을 구축한 다음 그 위에 쌓아 올리는 무엇이 아닙니다. 이를테면 사회에서 누구나 그렇게 하듯 나도 먼저 나의 삶을 설계하고 나서, 그다음에 멋진 장식품처럼 믿음을 거기에 덧붙이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일종의 보충제나 또는 스스로 만들어 놓은 삶의 계획을 세련되게 꾸미는 치장에 지나지 않겠지요.

 

하지만 믿음은 그런 보충제나 장식품이 아닙니다. 믿음은 자신을 온전히 새롭게 세우는 것이지요. 곧 믿음은 양자택일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믿든지 아니면 믿지 않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에 전적으로 자신을 내어 맡기든지, 아니면 옛 세계에 그대로 붙박인 채 남아 있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자신이 머무는 곳에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새것을 향해 그저 고개만 까닥하고 만다면, 결코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이렇게 해서 믿음에 대해 모든 이야기를 다 했다고는 할 수 없지요. 예를 들면 이런 질문도 여전히 남아 있으니까요. “믿음은 본래 무엇과 관련이 있는가?” 교리를 잘 아는 어느 한 그리스도인에게 그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무엇을 믿는지 묻는다면, 아마 이런 대답을 할 가능성이 큽니다. “하느님을요!”

 

올바른 대답이지요. 어떤 이는 이렇게 대답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역시 올바른 대답입니다. 또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습니다.”라고 대답할 그리스도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올바른 대답이지요. 당혹스러운 것은 다만, 겨자씨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다른 대답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믿음으로 산을 옮기고 나무를 바다에 옮겨 심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옛 세상을 뒤엎고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최우선적으로 겨냥하는 목표는 세상의 변화임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좀 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루카 복음서에서 이 17장 6절의 말씀이 놓인 맥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곧 루카 복음서의 구성을 보면, 사도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더해주시라고 청하기에 앞서,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 형제가 죄를 짓거든 꾸짖고, 회개하거든 용서하여라. 그가 너에게 하루에도 일곱 번 죄를 짓고 일곱 번 돌아와 ‘회개합니다.’ 하면, 용서해 주어야 한다.”(루카 17,3-4)

 

끊임없는 화해

 

이 말씀이 무엇을 두고 이르는 말씀인지는 분명합니다. 이는 끊임없는 화해 위에 건설되는 하느님의 새 사회를 두고 이르는 말씀이지요. 이 사회의 본질이 바로 ‘날마다 거듭되는’ 화해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는 형제자매를 하루에 그저 한 번만 용서하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곧 끊임없이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나무를 옮겨 심는 믿음에 대한 말씀이 놓인 직접적인 맥락이고,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늘 다시 새롭게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화해를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현실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은 당연히 “아니, 어떻게 그렇게까지? 그것은 불가능해!”라고 생각합니다. “우린 못 해!” “우린 애당초 그럴 만한 사람들이 아니야!”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께 청합니다.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대답을 우리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너희의 생각은 전적으로 옳다. 다른 이들을 늘 새롭게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그 어떤 앙심도 품지 않으며, 그들을 언제나 하느님의 자애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화해의 삶은 인간적으로는 정말 불가능하다. 돌무화과나무를 겐네사렛 호수에다 옮겨 심는 것만큼이나 가능성이 희박하다. 하지만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가능하다. 믿음이 있다면,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가능하다. 경쟁도 계급도 없고, 세련된 억압 장치들도 없는 그리스도인 사회가 가능하다. 각자가 자기 길만을 가지 않는 함께하는 연대가 가능하다. 너희에게 믿음이 있다면, 서로 갈라지지 않고 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뜻을 묻는 화해의 사회가 이루어진다. 그리되면 옛 사회는 뒤집어질 것이다. 자연의 법칙마냥 불변하는 것처럼 보이는 옛 사회의 법칙들도 와해되어 온전히 새것으로 바뀔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다만 믿음으로 이루어진다.” 루카는 끊임없는 용서에 대한 말씀과 나무를 옮겨 심는 믿음에 대한 말씀을 서로 연결시킴으로써 분명히 합니다. 믿음이 추구하는 방향은 그 무엇보다 먼저 저 세상이 아니라고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이 아니라고요. 믿음이 추구하는 최우선적인 방향은 구체적이고 사회적인 것, 보이는 것, 바로 여기, 오늘입니다. 믿음은 하느님의 새 사회를 목표로 합니다. 그러한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화해의 세상을 목표로 합니다. 화해 안에서 하느님의 새 가족이 되는 것은 오로지 믿음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느님의 것을 향해 온전히 방향을 바꾸는 데서만 가능합니다. 그런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산더러 바다에, 나무더러 바다에 빠져라 해도 그리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런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옛 세상의 법칙들이 해체되는 하느님의 새 세상이 이루어집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9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자캐오의 기쁨

 

 

난생처음 이스라엘에 방문했던 날들을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복음서들을 통해 이미 알고 있던 장소들을 드디어 처음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저를 한껏 사로잡았지요.

 

한번은 제가 속한 소규모 여행 단체가 예리코에 도착했습니다. 당연히 우리 모두는 자캐오 이야기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지요. 그의 키가 작아서 군중에 가려 예수님을 볼 수 없는 까닭에, 그가 예수님을 보려고 돌무화과나무에 기어 올라간 장면(루카 19,3-4 참조)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이스라엘인 안내자에게 돌무화과나무를 보여 달라고 청했습니다. “돌무화과나무라는 게 도대체 어떻게 생겼나요?” “오늘날에도 그 나무들이 이 지역에서 여전히 자라고 있나요?” “그 나무에 올라갈 수는 있나요?” 이런저런 질문들로 우리는 웅성거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저 알고자 하는 욕구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지하게 말해, 우리는 자캐오 이야기가 어쨌든 역사적으로 믿을 만한 사실인지 조금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드디어 한 그루 울창한 돌무화과나무 아래 당도하자, 우리는 모두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았습니다. 예리코에 훌륭히 뿌리내린 그 나무야말로 오르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이미 밑동에서부터 단단한 곁가지들이 거의 수평으로 뻗어나 있었고, 그 위로 기어오르기란 별 어려움이 없어 보였지요. 심지어 그 위를 뛰어다닐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저는 좀 부끄러웠습니다. 자주 그렇듯이, 복음서의 이야기가 매우 정확하고 사실적임을 확인한 때문이었지요.

 

나무 위에 오른 키 작은 사람

 

물론 우리는 그다음에, 울창한 돌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복음서의 자캐오 이야기를 봉독했습니다. 언뜻 보기에, 세관장 자캐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는 그다지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맛좋은 점심식사와 같았지요. 기분 좋고 편안한 이야기였다고나 할까요.

 

든든한 나뭇가지에 올라간 키 작은 사람과 그 아래 지나가는 군중 가운데 서 계신 예수님!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저녁식사에 초대하게 하시고 기꺼이 하룻밤 묵어가기를 원하십니다. 세관장 자캐오는 곧바로 응답하고요. 그야말로 종교적인 해피 엔드(happy end),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들려줄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게다가 이 이야기는 우리의 종교적 시대정신에도 딱 들어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달콤한 음료와도 같이 부드럽고 온화한 그리스도교라는 이상에 아주 잘 부합하지요. 누구의 마음도 아프게 하지 않는 선에서 알맞게 복음을 재단하는 그러한 시대정신을 다음 세 문장으로 요약해볼 수 있겠습니다.

 

첫째, “아무도 배척하지 마라. 누구나 같은 부류에 속한다.” 둘째, “나도 괜찮고, 너도 괜찮고! 하느님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를 사랑하신다.” 셋째, “누구나 아무 두려움 없이 서로를 사랑으로 대한다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제가 여기서 이 세 가지 진술이 모두 틀렸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 진리는 그러한 시대적 조류의 구호 속에서도 그 틈 사이로 언제나 제 빛을 드러낼 만큼 강합니다. 물론 우리는 아무도 배척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도 사실이지요. 사랑이, 정확히는 하느님에게서 오는 사랑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유일한 열쇠임도 틀림없습니다.

 

문제는 다만, 이 사랑이 어떻게 세상 안에 들어오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그러한 사랑을 지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실제로 세상 안에 들어온다면,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는 자캐오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던 길이었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리코에서 수도 예루살렘까지는 그리 먼 길이 아니지요.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사시던 바로 그 방식 때문에 처형을 당하십니다. 자캐오 이야기는 보기보다 그리 편안한 이야기가 전혀 아닙니다. 예수님과 자캐오 사이에 일어난 일은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와는 한참 먼, 그야말로 삶과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증오의 대상이 된 사람

 

게다가 우리는 자캐오의 삶을 미화할 아무런 권리가 없습니다. 당시 세리와 세금 차용인들은 로마 식민 지배 권력의 손에서 놀아나는 도구였습니다. 한 해 초에 일정한 양의 돈을 먼저 식민 지배자들에게 상납하고, 그런 다음 그만한 돈을 회수해야만 했습니다. 물론 거기에 당연히 높은 이익을 덧붙였지요. 그들은 말하자면 착취자들이었습니다. 그들 때문에 백성 가운데 수많은 이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들의 그러한 삶을 미화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니 당시 세리들이 사회적으로 고립된 삶을 살았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방인들과 끊임없이 교류해야 하기에 그들은 부정하게 여겨졌고, 아무도 그들과 엮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둑이나 강도와 같은 부류로 취급받았지요.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말을 건네시고, “자캐오야, 얼른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회적 규범들을 깨뜨리는 일이지요. 뒷말이 무성할 사건입니다.

 

물론 이는 사회적 규범을 건드리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사회질서, 하느님 백성의 삶에 관계된 일이지요. 시편은,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시편 1,1)이라고 하지 않던가요?

 

이러한 경고와 함께 시편 제1편은 바로 시편 전체의 분위기를 지배하는 말을 합니다. 이어지는 모든 것을 위한 지침과도 같지요. 곧 하느님 백성 안에는 토라, 곧 하느님의 법을 지키고 오롯이 그에 따라 사는 이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모르는 악인들을 멀리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그들이야말로 심판에서 살아남을 것이며, 그들의 삶은 성공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하느님을 모르는 악인들의 삶은 성공하지 못하며, 그들은 바람에 흩어지는 겨와 같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멸망의 길에서 사라지고 마는 흔적과 같다고요. 그러니 그들과는 상종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자캐오는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느님 백성 안에서 사회 정의를 짓밟고 사는 죄인이요 악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초대하도록 하시다니요? 이스라엘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사람과 한 식탁에 앉다니, 대체 있을 수 있는 일인가요?

 

예리코에서 예수님 주위에 떼 지어 몰려든 사람들에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부도덕한 사건이었습니다. 참을 수 없는 일이었지요. 경건한 신심의 측면에서도 그렇고, 신앙의 관점에서도 그러했습니다. 죄인들을 대하는 예수님의 행동이 결국은 그분을 죽음으로 몰아갔지요. 예루살렘 최고 법정에서 그분은 백성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자라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정말로 여기에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걸린 것이지요.

 

자신의 삶을 바꾼 사람

 

자캐오의 반응 역시 순진무구한 행동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사회적으로 고립된 채 증오와 기피의 대상이 된 자신의 집에서 예수님이 하룻밤 묵어가기를 바라신다는 사실이 그에게는 선뜻 이해가 안 되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그가 잃어버린 품위를 되찾아주십니다. 그의 집에서 묵으시고, 그를 포함한 그의 가족과 빵을 나누심으로써 그렇게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이 자캐오를 압도합니다. 그에게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힘을 줍니다. 주변의 그 모든 비난과 무시가 줄 수 없었던 것, 그것을 예수님의 애정이 가져다줍니다. 자캐오가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의 다스림을 만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가져오는 새로운 삶의 방식, 곧 서로 받아주고 서로 한 식탁에 함께 앉아도 되는 그런 삶의 방식을 만난 것입니다. 서로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의 모든 자녀를, 의인이든 죄인이든, 힘 있는 이든 힘없는 이든, 한데 모으려 하시기 때문이지요.

 

자캐오는 자신의 이웃들을 착취하는 데 모든 것을 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신의 회심을 통해 역시 모든 것을 겁니다.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신이 가진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고 과거에 지나치게 요구했던 것에 대해서는 네 곱절로 갚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합니다. 여기서도 우리가 보는 것은, 목가풍의 낭만적인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무것도 이전처럼 그대로 머무르지 않습니다. 온 삶이 움직이고 흔들립니다.

 

그리고 정확히 여기에 또한 우리의 약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을 위해 존재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위해, 또 교회를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사실이 우리의 삶을 무엇인가 조금이라도 바꾸어 놓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두 가지를 다, 곧 하느님의 것도 원하고 동시에 나의 안락함도 원합니다. 하느님의 것도 열매를 맺고, 동시에 나의 모든 것도 있는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게 가능한 일인가요? 우리는 두 가지를 다, 곧 하느님과 중산층적인 배부름을 동시에 다 누릴 수는 없습니다.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 성인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지요. “하느님 나라를 믿는 사람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그리고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는 꿈틀대는 역사를 만납니다. 이 만남을 통해 그는 자신이 흔들리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역동적인 움직임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이 움직임은 처음에는 그저 그가 나무를 기어오르게 했을 뿐입니다. 그는 더 잘 보기를 원했고,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자 했을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다음에 이 움직임은 그의 삶을 변화시킵니다. 우리는 이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잘 알지요. 새것에 자신의 삶을 내맡기는 것, 하느님의 것 때문에 자신의 삶을 바꾸는 것,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제 결정적인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곧 우리의 삶은 놀라울 정도로 타성에 젖어 지속적인 나태함에 빠져 있습니다. 하느님마저도 우리 삶의 중심을 밀어내고 우리의 게으른 악습을 흔들어 움직이게 하실 수 없을 정도지요.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성공하십니다. 그분이 당신 백성 한가운데서 이루시는 역사에서 솟아나는 기쁨이 그러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지요.

 

자캐오는 기쁨에 충만하여 예수님을 자기 집에 맞아들입니다(루카 19,6 참조). 이제 자신의 삶을 바꾸고, 자신의 온 삶을 뒤집어서 새로 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 모든 것이 어려운 일도 무거운 짐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새로운 체험이 그에게 기쁨을 샘솟게 하기 때문이지요. 그리고 이 기쁨이야말로 그가 회심할 수 있는 힘입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10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믿음의 두 차원

 

 

많은 종교가 ‘믿음’이라는 말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들에게는 미지의 언어지요. 설령 안다 하더라도, 그 말은 부차적인 역할에 그칩니다. 아니면 유다 그리스도교 전통을 본뜬 것이지요. 반면 구약과 신약성경에서 믿음은 핵심적인 개념에 속합니다.

 

역사와 믿음

 

오늘날 ‘믿음’이라고 말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은 ‘믿어야 하는 내용’을 먼저 떠올립니다. 이를테면 신경에 나오는 고백들이지요. 또는 교회가 정식으로 가르치는 교리를 들며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믿음의 내용은 구체적입니다. 애매하지도 유동적이지도 어렴풋하지도 않습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이는 우리가 ‘전달된’ 진리를 믿기 때문입니다. ‘전달된’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세상과 ‘역사’ 한가운데서 일어난 사건들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신앙의 선조 아브라함을 부르셨음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시고,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셨으며,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음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모든 말씀을 하셨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열두 사도와 함께 최후 만찬을 거행하셨으며,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을 믿습니다. 예수님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당신 제자들에게 성령을 보내셨음을 믿습니다.

 

계속 이어질 수 있는 이 모든 고백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물론 역사적 사실을 믿는다는 것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사실은 해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라고만 하면, 이는 아직 신앙의 내용은 아닐 것입니다. 여기에 덧붙여 말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되었다. 그분이 진리를 증언했기 때문이다. 그 적대자들은 진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분은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리고 이로써 세상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쳤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은 것이다. 그분이 죽은 것은, 우리 모두가 진리를 외면하며 살기 때문이다.”

 

이는 그저 한 가지 예를 들었을 뿐입니다. 다른 많은 신앙의 내용도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순히 사실을 믿는 게 아니지요. 신앙으로 해석되고 그래서 그 의미가 밝히 드러나게 된 사실들을 믿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우리 신앙의 핵심에는 사실이, 곧 일어난 사건이 들어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이 고안해낸 그 어떤 이념을 믿는 게 아니지요. 결국 우리가 믿는 것은, 하느님께서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셨으며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행동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성령을 믿나이다.”라는 고백조차도 그러한 사실과 관련이 있습니다. 이 고백은, 하느님께서 오늘도 여전히 당신 성령을 통하여 우리 가운데 행동하고 계시며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이 행동을 우리가 이미 경험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믿음과 성실

 

그리스도교 믿음에는 또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믿음은 정해진 내용을 ‘굳게 지키는 것’ 또는 ‘해석된’ 사실이긴 하지만 아무튼 사실을 믿고 ‘지키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올바른 믿음에는 반드시 또 하나의 차원이 있어야 합니다. 이 점을 저는 하바쿡 예언자의 말을 통해 살펴보고 싶습니다. 곧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하바 2,4)라는 말씀입니다.

 

성서학자들은 이 말씀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곤란을 겪습니다. 어떤 성서학자들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옮깁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말씀을 아주 중요하게 여겼는데, 그 역시 ‘믿음’이라는 말로 옮깁니다(로마 1,17; 갈라 3,11 참조).

 

하지만 또 다른 성서학자들은 “의인은 성실함으로 산다.”고 옮깁니다. 어느 쪽이 옳은 것일까요? 기본적으로는 두 가지 번역이 다 틀리지 않습니다. 믿음이나 성실함이나 모두 같은 히브리어 ‘애무나(aemunah)’를 쓸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하느님께 자신을 고정하다’ ‘하느님을 붙들고 놓지 않다’라는 의미로서, 곧 하느님께 성실함을 뜻합니다. 믿음이 바로 그런 의미임을 우리는 거의 잊고 살지요. 하지만 믿음은 정해진 내용을 믿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 성실함, 붙들고 놓지 않음, 항구함, 작은 일에서 날마다 충실함, 바로 이런 것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신경의 내용이나 교리 말고 우리가 굳게 붙들고 있어야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무엇에 날마다 성실하고 항구해야 하는 것일까요?

 

유다인이라면 아주 분명합니다. 하느님께 성실하기 위해서는 토라(Torah)를 지켜야 합니다. 이는 특히 무엇보다 십계명을 지키는 일이지요. 하느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이 믿음을 구체화하는 길입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따르는 것이 하느님께 성실한 삶입니다. 날마다 아주 작은 부분까지 하느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실행하는 것이 하느님께 자신을 고정하는 일입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하느님 당신 자신이 성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분도 우리에게 당신을 고정하시기 때문에, 날마다 우리에게 당신의 성실함을 보여주시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합니다.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는 일은 당연히 유다인들의 믿음의 특성이기만 하지 않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똑같이 해당됩니다.

 

믿음은 하느님께 성실함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함에 자신을 고정하는 일입니다. 제 생각에, 이 차원이야말로 유다 그리스도교적 믿음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믿음은 신경의 내용을 믿는 데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아니 믿음은 바로, 작은 일에서 날마다 성실함으로써 하느님의 성실함에 나를 굳게 고정하는 일입니다.

 

예수님도 믿음을 그렇게 이해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저에게는 지극히 아름답게 다가오고 커다란 감동을 줍니다. 예수님도 믿음을 작은 일에서 성실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에 날마다 항구하고 충실함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을 굳게 지키는 것으로 이해하십니다.

 

물론 예수님에게서도 믿음은 먼저, 역사에서 이루신 하느님의 위대한 행동들과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역사에서 이루시는 하느님의 가장 위대한 행동은, 지금 하느님 나라가, 정의와 비폭력과 평화의 그 나라가 오고 있다는 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믿음’이란 먼저 하느님 나라가 오고 있음을 믿는 것이었지요. 그 나라가 지금 이 시각 바로 이 순간에 오고 있음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믿는다는 것은 나아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지금 예수님을 통해 몸소 행동하시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는 믿음의 핵심이었고 ‘믿는다는 것’의 본질적 의미였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에게서 믿음의 또 다른 차원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바쿡 예언서의 말씀처럼, 작은 일에서 성실하고 충실함으로써 하느님께 날마다 자신을 고정하는 믿음의 이 두 번째 차원을 말해주는 예수님의 비유가 있습니다. 바로 루카 복음서 17장 7-10절의 비유지요.

 

믿음의 성실함에 대한 비유

 

이 비유에서 주인은 비교적 적은 농토를 가진 사람입니다. 겨우 종 하나만을 둘 수 있는 살림이지요. 종은 주인의 집에서 기거하며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일을 합니다. 종이라곤 자신 하나뿐이기에, 그는 모든 일을 혼자서 도맡아 해야 합니다. 밭을 갈고, 양을 치고, 저녁마다 녹초가 되어 돌아와서도 집안일을 해야 합니다. 밥상에 앉을 겨를도 없지요. 직접 음식을 마련하고, 그런 다음 주인이 음식을 먹는 동안 허리에 띠를 매고 시중을 들어야 합니다. 주인이 먹고 마신 다음, 그리고 식탁을 치우고 식기들을 다 닦은 다음에야 종은 비로소 자신을 위한 시간을 가질 수 있습니다.

 

주인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주인은 종이 날마다 하는 일을 지극히 일반적인 세상사라고 여기지요. 종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말할 필요조차도 없는 당연지사라고 여깁니다. 이 비유에서 주인은 결코 종을 무자비하게 다루는 파렴치한이 아닙니다. 종도 자유를 부르짖는 피압박 계급이 아닙니다. 비유는 별 감정 없이 고대 세계의 가혹한 실상을 있는 그대로 펼쳐보입니다. 그러면서 이를 믿음에 대한 비유로 삼지요.

 

따라서 이 비유에 등장하는 주인을 하느님이나 그리스도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이 비유는 하느님이 그런 분이라고 이야기하려는 데 주안점이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위해 쉬지도 않고 녹초가 되다시피 일을 해야 하는 종이거나 아무 말도 못하고 착취당하는 가련한 일벌레는 아니니까요.

 

이 이야기는 오히려 종교들에 대한 비유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많은 종교에서 인간은 권리를 박탈당한 종과 비슷합니다. 인간의 봉사를 받는 신들은 황금 식탁에 앉아 흥청망청 축제를 벌이지요.

 

예를 들면 고대 바빌로니아 서사시에 등장하는 신들의 모습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은 단연코 그런 분이 아니시지요. 인간 역시 신들이 기피하는 궂은일은 도맡아 하도록 창조된 종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하느님의 아드님이 인간의 종이 되십니다. 그분은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22,2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비유에서 녹초가 된 종을 밤늦도록 부려먹는 주인을 하느님이나 예수님으로 해석할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이 비유가 말하려는 바는 무엇보다 ‘믿음’에 관해서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이 비유를 ‘믿음의 힘’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루카 17,5-6) 바로 다음에 배치함으로써 믿음의 구체적인 의미가 무엇인지 알려줍니다. 믿음은 바로 순전한 헌신입니다. 무엇을 요구하거나 자기주장을 고집하거나 인정받기를 욕심내거나 자기 권리를 내세우거나 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권리를 다른 이에게 모두 내어주는 것입니다.

 

믿음은 자기 자신에게서 하느님의 것으로 온전히 돌아서는 방향 전환입니다. 이 전환이 깊을수록, 믿는 이는 스스로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벗어나 다른 이가 자신을 규정하도록 모든 것을 내려놓습니다. 마치 종처럼 다른 이의 뜻에 자신을 내맡깁니다. 자립성과 자기실현을 목표로 하는 우리 시대의 인본주의와는 정반대로 가는 것이지요.

 

그러한 믿음이 얼마나 위험하고 도전적인지는 분명합니다. 무자비하게 남용될 소지가 많으니까요. 다른 이들에게 철저하게 이용당하지 않을까? 나의 자유가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그 자유와 함께 나 자신도 사라지는 게 아닐까? 이것이 우리 내면의 깊은 두려움입니다. 그런 점에서,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철저한 믿음에 따라 살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누구나 자신의 권리를 위해 투쟁하는 사회 한가운데서 그렇게 사는 사람은 여지없이 잔인하게 이용당하고 말 것입니다.

 

때문에 복음이 말하는 이 헌신의 믿음을 위해서는 토대가 있어야 합니다. 함께하는 믿음의 공간, 자기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것을 찾는 이들이 있는 곳이 바로 그 토대지요. 성실한 믿음에는 서로를 하느님께 부름 받은 이들로 존중하는 격려의 손길이 있어야 합니다. 달리 말해, 복음이 말하는 믿음은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종처럼 서로 공통의 소명, 곧 하느님의 계획에 헌신하는 공동체를 필요로 합니다.

 

한마음으로 서로를 격려하는 그러한 손길이 없는 곳에서는 믿음의 향기가 퍼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런 믿음이 있는 곳에서는 세상이 바뀝니다. 산을 옮기고,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나무더러 바다에 심겨지라고 해도 그대로 복종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진정한 자유가 이루어지고, 그리하여 누구나 자신을 찾고 자신을 실현합니다. 모두가 자신에게만 집중된 감옥이 아니라, 하느님의 새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드넓은 잔치의 공간이 펼쳐집니다.

 

거기서는 비유에 나오는 ‘쓸모없는 종’도 처지가 바뀝니다. 예수님의 것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은 결국 종이 아니라 친구가 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더 이상 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요한 15,15)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11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성탄의 평화는 다르다

 

 

이미 몇 해 전 일입니다. 유럽 언론들이 로마에서의 고고학적 발굴을 대서특필한 적이 있습니다. 학자들이 로마 황제의 궁전이 들어서 있던 팔라티노 언덕 아래를 탐사하면서 진귀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동굴을 찾아냈다는 보도였지요.

 

이 동굴이 존재할 것이라는 사실은, 고대 로마의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작품을 비롯한 여러 고대 문헌들을 통해 이미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동굴은 고대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제의 장소였으니까요. 로마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이 동굴 안에서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 형제가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으며, 후에 로물루스가 이 언덕에 로마를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 역사적인 고대의 제의 장소가 드디어 발굴된 것이지요. 고고학자들과 역사학자들은 흥분했습니다.

 

두 개의 동굴

 

이 놀라운 소식을 접했을 때, 저는 곧바로 또 하나의 동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랜 전승에 따라 예수님이 태어나신 곳으로 전해지는 동굴 말이지요. 물론 우리는 예수님을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묘사하는 데 익숙합니다. 그렇게 꾸며놓은 성탄 구유 장식들은 대개 예술품처럼 멋지고 훌륭해서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흠뻑 빠져듭니다. 하지만 가장 오래된 전승과 무엇보다 동방교회의 모든 전승은, 예수님이 마구간이 아니라 동굴에서 태어나신 것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이는 역사적으로도 많은 의미를 지닙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비탈진 언덕의 무른 바위를 파고 거기에 가축우리를 만드는 경우가 흔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정말로 동굴에서 태어나신 게 맞을지도 모릅니다. 루카 복음서는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을 마리아가 구유에 뉘었다고 전합니다(루카 2,7 참조). 아무튼 그런 구유가 있는 동굴은 평상시에 염소나 양이 피난처로 찾아들던 곳이었지요.

 

로마의 쌍둥이 형제가 자란 동굴과 예수님이 태어나신 동굴, 이 둘을 서로 비교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저에게 밀려왔습니다. 물론 정확히 말해 동굴 자체의 모양새가 아니라 두 이야기가 전하는 사건을 비교하는 것이지요. 더 나아가 이런 비교도 가능할 것입니다. 결국 두 동굴에서 각각 어떤 결과가 빚어졌는가?

 

형제의 분열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랍니다. 늑대의 젖이 분명 그들에게는 큰 효과가 있었지요. 그들은 장성하고 강력해집니다. 늑대와 같은 본성은 후에 그들이 각자 도시를 세우려고 할 때 비로소 나타납니다.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에,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에 도시를 세우려 합니다. 각자 자신의 도시를 말이지요. 이미 분열이 발생한 것입니다.

 

하지만 더욱 불행한 일은 이후에 일어납니다. 한번은 로물루스가 두 마리 흰 소에 쟁기를 매고 팔라티노 언덕에 이른바 ‘신성한 고랑’을 내고 있었습니다. 머릿속에 담아둔 도시의 윤곽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고랑은 자신이 세울 도시의 ‘배수구’요 흙이 두둑한 부분은 ‘성벽’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레무스가 그 우스꽝스러운 ‘성벽’을 훌쩍 뛰어넘으며 형제를 놀렸습니다. 이에 화가 난 로물루스가 레무스를 때려죽이며 “누구든지 내 성벽을 넘는 자는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로마의 건국 신화입니다. 모든 신화가 그렇듯이 여기에도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곧 조그만 도시 로마에서 대제국이 나온 것이지요. 인간이 세운 모든 나라와 마찬가지로 폭력 위에 세워진 제국 말입니다. 이 제국의 표어는 이러했습니다. “우리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민족에게는 관용을 베푼다. 그러나 우리에게 저항하는 민족은 가차 없이 진압한다.” 물론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민족은 해마다 힘겹게 조공을 바쳐야만 했지요. 아무튼 이 대제국은 천년 이상을 지탱했습니다.

 

하지만 로물루스가 폭력 위에 세운 이 로마 제국도 결국은 나라에서 나라로 이어지는 긴 역사 가운데 그저 한 나라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나라들은 모두 힘에 의해 유지되지요. 통치자의 옷을 걸친 늑대와 같은 폭력적인 힘에 의해서든지 또는 법과 질서를 만드는 온건한 힘에 의해서든지, 모두 힘으로 지탱됩니다.

 

법과 질서 위에 세워진 나라, 평화를 추구하고 자신의 고유한 규범들을 지키는 나라가 세상에는 꼭 있어야 합니다. 그런 나라가 없는 곳에서는 곧바로 혼돈이 지배할 테니까요. 하지만 민주주의적 법치국가조차도 힘에 의해 유지됩니다. 경찰력과 검찰권, 사법권 등을 필요로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질서를 바로 세울 수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비상시에 적에 맞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군대도 필요로 합니다. 그러니까 ‘합법적인’ 국가 권력의 힘이란 게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불행하게도 질서 유지를 위한 힘을 좋은 의도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나라들조차도 마지막에는 너무나 자주 파렴치한 압제 권력으로 전락하고 맙니다. 폭력으로 기우는 경향이 인간 안에 깊이 내재한다고나 할까요.

 

상반되는 역사

 

또 하나의 동굴이 말하는 이야기, 곧 루카 복음사가가 전하는 이야기 역시 이 모든 것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루카는 로마와 그 제국의 힘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지 알고 있지요. 그는 자신이 전하는 이야기에서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등장시킵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사람들이 자신을 평화를 가져오는 자, 인류의 ‘구원자’요 ‘주권자’로까지 숭배하게 했던 인물입니다.

 

루카는 자신의 복음서 이야기에서 로마의 세금 징수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이 세금 징수는 로마가 점령한 나라들을 착취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편이었지요. 아무튼 우리는 성탄 이야기에서 그 배경이 되는 맥락에 감추어진 의미를 눈여겨보아야 합니다. 바로 거기 자신을 신적인 ‘구원자’로 숭배하게 했던 황제가 있지요. 그는 힘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관철시키는 권력자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착취하고 도탄에 떨어지게 하는 세금 징수자입니다.

 

이런 역사를 배경으로 루카는 이제 그와 상반되는 이야기를 전합니다. 바로 진짜 구원자요 주권자이신 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분만이 세상이 고대하는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땅을 흔들며 저벅거리는 군화”와 “피 속에 뒹군 군복”(이사 9,4) 위에 세워진 거짓 평화와는 전혀 다른 참된 평화를 가져다주십니다. 이 평화는 인간들을 통해서도 권력을 통해서도 오지 않습니다. 그런 것과는 전혀 다른 이 평화에 대한 표지가 구유에 뉘인 힘없는 갓난아기입니다. 이 평화를 천사들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 2,14)

 

이 노래의 뜻은 이렇습니다. 모든 민족이 그토록 고대하던 이 참된 평화는 바로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 오로지 절대적인 비폭력을 통해 온다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이 평화는 삼십여 년 후에, 폭력으로 대응하기보다는 자신이 선포한 것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으신 분, 참으로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분에 의해서 옵니다. 그런 다음 이 참된 평화는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 서로 평화를 이루기 시작하는 이들을 통해서 옵니다. 한마음으로 구유를 향해 달려간 목동들이야말로 예수님을 따르는 그 수많은 이들의 첫 시작이지요.

 

성탄과 우리의 평화

 

아십니까? 구유의 갓난아기와 베들레헴 들판의 천사들과 목동들 이야기가 결코 낭만적인 목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 이야기는 성탄 시기에 우리를 그저 감상에 젖게 만드는 옛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전부냐 아니냐 하는 문제, 곧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 어떻게 평화를 이룰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걸린 이야기입니다.

 

로마 군대의 무기는 창과 칼이었습니다. 그 사이 세상에는 더욱 효과적인 무기들이 개발되었지요. 단추 하나 누르면 온 민족을 말살하고도 남습니다. 파렴치한 독재자들의 권력욕과 테러로 이어지는 극단주의에 맞서 이 세상에 과연 평화를 이룰 수 있을지 여부는 우리와 우리 후손들에게 모든 것을 판가름하는 절체절명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인간성이 증대되고 대화를 수없이 많이 하고 좋은 뜻이 아무리 많이 모인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참된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는 인간이 권력에 너무 취약합니다. 그러기에는 인간 안에 너무 많은 늑대의 피가 흐릅니다. 로물루스는 자신의 형제인 레무스를 때려죽였지요. 이것이 보통 일입니다. 우리 모두 안에 그런 피가 흐르지요. 우리는 다만 대부분 시민 사회의 도덕적인 테두리 안에서 아주 섬세하게 그런 일을 행하고 있을 뿐입니다.

 

성탄의 복음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세상의 평화를 위한 ‘유일한’ 길이 있다고요. 우리의 가족과 우리 마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평화를 위한 단 하나의 길이 있다고요. 그 길은 바로 구유에 누운 아기에게로 가는 길입니다. 우리 힘으로는 모두가 고대하는 평화를 이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름으로써, 베들레헴의 목동들과 함께함으로써 그 평화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의 목동들에게서 우리는 이미 후대에 이루어질 공동체의 모습을 봅니다.

 

천사들이 선포한 이 평화는 그저 전쟁을 멈추는 것, 서로 물어뜯고 할퀴는 것을 그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서로 죽도록 두들겨 패고 공중에 날려버리는 것을 그만두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평화는 서로 화해하고, 타인에게 자신의 마음을 열며, 다른 이에게 아픔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상처들을 감싸주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서로 형제자매가 되는 일에서 그 평화가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의 의미입니다.

 

이처럼 두 동굴을 비교해 보면, 서로 다른 의미가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하나는 권력욕과 형제 살해의 상징이고, 다른 하나는 힘에 대한 포기와 형제애의 상징입니다. 물론 힘에 대한 포기와 형제애는 우리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가능하지 않겠지요. 어디 우리가 한번이라도 스스로 그런 의지를 가져본 적이 있을까요?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 안에서, 베들레헴의 그 갓난아기 안에서 우리에게 참된 평화를 주시려 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탄의 기쁜 소식이지요.

 

그러니 성탄과 그 이후 이어지는 시기에 구유 앞에 나아가 이렇게 기도해도 좋을 것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저와 제 주위 모든 이에게 이 성탄의 평화를 주소서. 제 마음이 넓고 고요하고 성실한 마음이 되게 해주소서. 저를 당신 평화의 도구가 되게 하소서. 믿음 안에서 형제자매들을 새롭게 보는 법을 제게 가르쳐주시고, 그들과 함께 당신의 길을 가는 법을 배우게 하소서. 그 길은 복음의 길, 당신을 따르는 길입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에게 진정한 성탄이 될 수 있겠지요.

 

바로 그런 의미로 저는 한국의 형제자매들에게 성탄의 평화를 기원합니다. 우리의 유일한 주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6년 12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경배의 기적

 

 

동방에서 별을 따라온 박사들 이야기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야기 가운데 하나이지요. 유럽에서 이 이야기는 사람들 마음에 늘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습니다. 일찍부터 사람들은 그들이 임금이었다고 생각했지요. 시편 72편 10-11절과 연결시킨 것입니다. 또한 그들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렸다.”(마태 2,11)는 구절을 토대로 그들을 세 명의 임금, 곧 ‘삼왕’이라 불렀습니다. 그러고는 이름까지 붙여주었습니다. 그럼으로써 그들의 모습을 머릿속에 쉽게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지요. 중세에는 신하들까지 거느린 모습의 이 삼왕이 엄청난 인기를 누렸습니다.

 

오늘날에도 독일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여관과 호텔명에 이 삼왕의 이름이 남아 있습니다. 갓 태어난 이스라엘의 임금을 찾아서 기꺼이 그 먼 길을 왔던 이 유명한 인물들을 기억하는 것이지요. 곧 여행객이 묵어가는 오래된 옛 집들이 ‘삼왕의 여관’ ‘별의 여관’ ‘동방박사들의 여관’ 또는 그와 비슷한 이름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 공현 대축일’을 앞두고는 해마다, 어린이들이 삼왕과 그 신하들의 복장을 하고 거리를 돌며 집집마다 노래를 부릅니다. 그러면서 고통 속에 있는 가난한 어린이들을 위한 모금 활동을 벌입니다. 유럽에서는 수백 년에 걸쳐 동방박사와 관련된 민속 문화가 매우 다양하고 풍요롭게 발전했습니다. 박물관에 가면 ‘삼왕’의 이야기를 그린 수많은 그림들이 있지요. 그 가운데는 아주 유명한 그림도 많습니다.

 

우리 자신의 길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이 ‘동방박사’ 이야기와 ‘주님 공현’ 축제에 그토록 마음이 사로잡히는 것은, 그런 모든 민간 풍속을 넘어 더 깊은 데에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이야기는 우리 마음속을 파고들지요. 동방박사들이 걸었던 그 길이 바로 우리 자신의 삶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별을 따라 나섰던 그들은 먼 길을 가야 했습니다. 그 길은 극도로 위험한 길이었지요. 그들은 길을 잘못 들어 예루살렘에 당도합니다. 그곳에는 추종자들을 거느린 교활한 정치권력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아기를 죽이려는 자신의 계획에 동방박사들을 끌어들이려 합니다. 메시아로 태어난 아기를 찾거든 자신에게도 알려주라고 말하지요.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우리 자신의 삶과 비슷하지 않나요? 우리 삶의 여정에서도 우리를 혼란에 빠뜨리는 악이 존재합니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에는 우리를 속이고 헤매게 하는 악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동방박사들의 길이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 점은 두 번째 사실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곧 동방박사들은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들은 동방에서, 아마도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온 이들이었지요. 그곳은 늘 여러 종교들이 마치 도가니처럼 한데 모여 들끓는 곳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동방의 종교적 열정들이 모여 서쪽으로 흘러들었습니다. 바로 그런 나라에서  그들이 온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방인 출신입니다. 우리는 이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예전에는 우리 조상들도 혼령에 대한 두려움, 귀신 숭배, 주술이나 부적 등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우리의 이성적인 신앙은 유다인들, 특히 유다인이신 예수님과 그분의 유다인 어머니 마리아 덕분입니다.

 

동방박사들의 길이 우리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점은 세 번째 사실에서도 드러납니다. 곧 동방에서 별을 쫓아온 박사들은 길을 나섰던 이들입니다. 새로 태어난 유다인들의 임금에게 경배하기 위해 먼 길을 걸었지요. 후에 당신 자신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라고 하신 바로 그분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 위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미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그분의 영에 동참하는 이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그분을 향해 가는 길 위에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여전히 이방인인 듯 살아갑니다. 우리는 정말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나는 그분을 온전히 찾아냈다고! 그분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삶과 나의 계획을 남김없이 그분 손에 맡겨드렸다고!

 

탄원과 청원과 감사의 기도

 

별이 멈추는 곳에 이른 박사들은 마침내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합니다(마태 2,11 참조). 그런데 여기서 ‘경배한다’는 말은 그 자체로는 아직 모호한 말입니다. 경배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굽히고 땅이나 아니면 영예를 받는 이의 신발에 입을 맞추는 게 보통입니다. 경배는 신분이 높은 이에게 합니다. 임금에게 하거나, 고대 근동에서는 높은 자리에 있는 인물에게나 할 수 있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경배한다’라는 이 그리스 말이 더욱더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곧 마태오 복음서에서는 이 말을 그리스도에게만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여기서는 ‘경배한다’라는 이 말에 ‘흠숭’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동방 박사들은 ‘하느님의 아드님’께 경배합니다.

 

‘경배와 흠숭’이라는 말이 정말로 무슨 의미인지 한 번이라도 깊이 생각해보신 적인 있나요? 물론 경배와 흠숭만이 하느님께 기도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닙니다. 경배와 흠숭 외에도 기도의 여러 방법들이 있습니다. 탄원, 청원, 감사 등이 그것이지요.

 

하느님 앞에서의 탄원은 참으로 진정한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나의 고통을 하소연해도 되고, 그분께 나의 어려움과 비참함을 큰 소리로 부르짖어도 됩니다. 또한 하느님께 온갖 청을 드려도 됩니다. 인간으로서 필요한 일이라면 무엇이나 그분께 청해도 됩니다. 물론 여기에 언제나 덧붙일 말이 있지요.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마르 14,36 - 공동 번역) 또 날마다 만나는 좋고 아름다운 일에 대해, 그것이 지극히 작은 일일지라도,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수 있습니다. 날마다 청원과 감사를 위해 하느님께 나의 얼굴을 들어 올릴 수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탄원과 청원과 감사는 기도의 기본적인 형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아 먼 길을 온 동방박사들이 어떻게 했는지 압니다. 그들은 기쁨에 가득 차서 아기 앞에 무릎을 꿇고 아기에게 경배합니다. 그들이 한 행동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행동입니다. 곧 거룩하시고 엄위하시고 헤아릴 수 없는 하느님께 경배하는 행동이지요.

 

하느님께 경배와 흠숭을 드리는 일이 왜 그처럼 기본적이고 아름다우며, 결국 그것이 인간에게 정말로 좋은 일인지 생각해 보셨나요? 흠숭의 기도에서는 내가 하느님께 원하는 것이 더 이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느님께 탄원할 때, 우리가 바라보는 것은 다만 자기 자신입니다. 나의 비참함이 기도의 출발점이니까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청할 때도, 나 자신의 고통과 위기가 기도의 출발점입니다. 나는 하느님께 무엇인가를 얻으려 합니다.

 

하느님께 감사를 드릴 때조차도, 나 자신이 출발점입니다. ‘내가’ 무엇인가 좋은 것을 체험했고, ‘내가’ 그 어떤 행운을 겪었기 때문에 감사를 드리지요. 눈부신 꽃 한 송이가, 또는 귀여운 아기의 웃음이 내 마음을 환하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배와 흠숭의 기도에서는 나 자신을 내려놓고 그저 하느님만을 바라봅니다.

 

물론 이런 말들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곧 나의 고통 때문에 하느님께 탄원할 때도, 우리는 하느님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 당신께서 저에게 이러시다니요! 어찌하여 당신은 저에게 이런 고통을 안겨주십니까? 당신은 언제나 저희를 도우시고 저희 기도를 들어주시는 분! 그런데 저를 이런 비참 속에 빠뜨리시다니요!”

 

또는 이렇게 부르짖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어찌하여 당신은 세상에서 그처럼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와 모욕을 받고 짓밟히며 살해당하는데도 가만히 계십니까? 돌보지 않으시고 그냥 내버려두십니까?” 북받치는 이러한 탄원도 결국은 나 자신을 바라보는 데서 벗어나 애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얼굴을 찾습니다.

 

청원과 감사의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속 깊이 하느님께 청을 드릴 때,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저 혼자서는 할 수 없습니다. 당신만이 도우실 수 있습니다.”

 

이런 기도 뒤에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분만이 전능하시고, 그분만이 자비하시며, 그분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인식이지요.

 

감사기도에서도 우리는 먼저, 받은 선물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선물을 주시는 분께로 눈을 돌립니다. 교회의 공식적인 기도이며 가장 중요한 기도인 성찬례의 감사기도에서는 또 어떤가요? 이 기도에서 사제는 함께 모인 공동체와 온 교회의 이름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에 대해 감사를 드립니다. 이 선물을 통해 우리는 구원을 받았지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그 선물이십니다.

 

가장 아름다운 기도

 

모두 맞는 말입니다. 하지만 경배와 흠숭의 기도는 한층 더 깊은 데까지 이릅니다. 이 기도에서는 모든 것을 온전히 내려놓는 가운데 자기 자신과 자신의 고통과 기쁨마저도 잊고 오롯이 경배와 흠숭만을 드릴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때 우리는 그저 온전히 하느님만을 바라볼 뿐입니다. 다른 모든 것은 다 물리치고 하느님만을 찬미합니다. 그분 홀로 거룩하시고, 그분 홀로 전능하시며, 그분 홀로 찬란히 빛나시는 것에 그저 경탄하며 그분을 찬미합니다. 모든 것은 사라지고, 그분의 영광만이 빛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과 ‘아주 중요한 일들’을 마냥 잊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은 기적입니다. 물론 이러한 기적이 가능한 이유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영을 우리 마음속에 부어주시어 우리가 그분을 찬미하도록 우리를 매혹하시기 때문입니다.

 

성찬례를 거행할 때도 마찬가지로 거기에 오롯한 경배와 흠숭이 없다면, 성찬례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큰 축제이자 최고의 예배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거룩한 미사에서도 탄원과 청원이 이루어지고, 미사의 중심은 감사입니다. 하지만 미사를 거행할 때 당연히 경배와 흠숭도 따라옵니다. 바로 감사기도가 한창일 때, 곧 “거룩하시도다!”를 세 번 외칠 때 그러하지요. 함께 모인 공동체가 이 “거룩하시도다!”를 노래하거나 외칠 때, 이는 이미 세상을 떠나 하느님 곁에 있는 이들의 영원한 경배와 흠숭, 나아가 모든 천사들의 경배와 흠숭에 하나로 결합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이미 하늘에 있는 것이지요. 그럴 때 우리에게는 결코 끝나지 않으며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는 행복이 앞당겨 선취됩니다. 바로 하느님을 영원히 경배하며 흠숭하는 행복이!

 

하느님을 경배하며 흠숭하는 것이 영원한 행복임을 우리는 여전히 아직은 다 이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 무엇인가를 이루기를 원하고 행하기를 원합니다. 무엇인가를 더 이해하고 꾸미고 기획하고 성취하고자 합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그 모든 것은 우리의 과제이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우리가 죽어서 하느님께 이르면 그 모든 것은 중지됩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순전히 경탄과 놀라움과 찬미뿐일 것입니다. 하느님을 오롯이 경배하고 흠숭하는 일만 남을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든 생각과 상상을 뛰어넘는 행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따라서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흠숭을 드릴 때마다 우리는 그 영원한 행복을 이미 앞당겨 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 더 이상 많은 말이 필요 없는 경배와 흠숭의 기도가 꼭 있어야 하겠지요. 탄원과 청원과 감사, 그리고 우렁차게 울리는 삼중의 “거룩하시도다!”가 끝난 다음, 모두가 고요하게 경배를 드릴 순간이 있어야 합니다. 침묵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자신의 삶을 맡겨 드리며, 그분이 우리의 창조주이심을, 우리의 주님이시고 모든 영광과 찬미를 받으실 유일한 분이심을 인정하는 순간 말입니다.

 

경배와 흠숭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맡겨드리는 일입니다. 그것은 봉헌과 헌신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손에 내어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배와 흠숭이 깊어 갈수록 더 이상 말이 필요 없습니다. 그저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이 자신의 마음을 비추도록 그대로 머무를 따름입니다.

 

별을 따라온 박사들

 

지금까지 언급한 말들은, 제가 ‘주님 공현 대축일’의 복음을 읽을 때마다, 또 동방박사들이 “아기를 보고 땅에 엎드려 경배하였다.”라는 구절에 이르게 될 때마다 늘 떠오르는 생각들입니다. 더불어 속으로 이런 생각도 하게 되지요. 동방박사들은 그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었구나! 오늘날 용어로 말하면 분명 그들은 학자들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천체를 관측하고 탐구하던 이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그들은 신학자들이었다고도 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던 이들이었기 때문이지요. 그밖에도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처럼 먼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당시에도 재정적으로 큰돈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그런 이들이 작은 아기에게 무릎을 꿇습니다. 머리를 땅바닥에 대고 엎드립니다. 이 점이 저를 얼마나 감동시키는지 모릅니다. 살면서 저도 그렇게 하려고, 그렇게 머리를 숙이고 무릎을 꿇으려고 노력합니다.

 

한국의 모든 형제자매들에게 ‘주님 공현 대축일’이 복된 축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본래 이 대축일이야말로 그리스도교의 가장 오래된 성탄 축일이었습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1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근심 걱정을 벗어난 삶의 토대

 

 

마태오 복음서의 산상 설교(5-7장) 가운데 예수님의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좀 길지만 인용하지요.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 그리고 너희는 왜 옷 걱정을 하느냐? 들에 핀 나리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지켜보아라. 그것들은 애쓰지도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솔로몬도 그 온갖 영화 속에서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오늘 서 있다가도 내일이면 아궁이에 던져질 들풀까지 하느님께서 이처럼 입히시거든, 너희야 훨씬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25-34)

 

스트레스 줄이기?

 

예수님의 이 말씀이 일단 친절하게 다가옵니다. 마치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한 삶의 자세처럼 들리지요. 긴장을 푸는 적당한 방법 말입니다. 끊임없이 근심하며 살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머릿속은 불안으로 터지고 마음은 두려움으로 가득한데, 밤에는 편히 잠들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에서 특히 예수님이 자연을 얼마나 사랑스런 눈으로 관찰하시는지 감동적입니다. 하늘을 멀리 나는 새들, 겨울의 우기가 끝나고 갈릴래아 어디서나 하룻밤 사이면 금세 피어나 언덕과 들판을 수놓는 봄꽃들…!

 

편안한 마음으로 이렇게 감상에 젖다보면, 우리는 한없는 위로의 말씀처럼 들리는 이 복음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합니다. 하지만 한번 곰곰이 되짚어보면, 곧바로 문제들이 슬금슬금 기어 올라옵니다. 먼저, 이 말씀대로라면 우리는 일을 할 필요 없이 하루하루를 태평하게 지내야 하는 것일까요? 빈둥거리며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 머리가 그렇지 않다고, 그런 의미일 수 없다고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자신의 공동체들에게 써 보내길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2테살 3,10)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이 산상 설교의 의미일 수는 없습니다.

 

이는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사용하시는 비유의 대상과도 맞지 않습니다. 곧 새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합니다. 둥지를 짓기 위해 얼마나 부지런히 움직이는지 보십시오. 새끼들이 부화하고 나면, 새들이 얼마나 열심히 쉬지도 않고 곤충과 벌레를 찾아 그것을 새끼 주둥이에 넣어주는지 모릅니다. 이게 결코 별일도 아닐까요? 꽃들도 땅에 뿌리를 내리고 물과 질소와 철분과 각종 미네랄을 흡수하기 위해 끊임없이 일을 합니다.

 

계획과 준비는 불필요?

 

아무튼 우리가 유유자적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결코 이 말씀의 의미일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근심 걱정 속에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일까요? 먹을 것, 입을 것, 나아가 삶 자체에 대해 아무 걱정 없이 살라는 말씀일까요? 하느님께서 하늘의 새들과 들의 꽃들을 보살피시듯 우리도 보살피시기 때문에요.

 

그러니 미리 걱정하거나 미리 대비하거나 미리 계획하거나 오랜 기간 앞서 준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이 말씀의 의도일까요? 본문 끝에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라는 말씀도 있으니까요. 아무튼 여기서 예수님은 유비무환과는 반대의 말씀을 하시는 것일까요?

 

그런 의미라면 우리는 냉장고에 여분의 것을 쌓아 두어도 안 되고 무엇을 대량구매해서도 안 됩니다. 저축, 노후 대비, 보험, 건강 검진을 해서도 안 되고, 어쩌면 사제가 미리 강론 준비를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성령께서 불어넣어주시는 대로 말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그럴 경우 결과는 뻔합니다. 대개 안 좋은 강론이 되고 말지요.

 

아이들의 미래 삶을 위해 학교 교육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경제 활동, 산업 생산, 학문에도 준비가 필요합니다. 기업 활동, 학문적 기획, 정치적 행위 등, 이 모든 것에 사전 계획과 자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세밀한 준비가 없어서는 안 됩니다. 이 모든 일을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런 것들은 모두 다른 민족들이 애써 찾는 것이다.”라는 말씀대로 다른 이들에게 맡겨야 할까요?

 

그럴 수는 없겠지요. 그런 식의 해석은 황당무계합니다. 세계가 겪는 빈곤을 두고 그런 말을 할 수는 없겠지요. 수많은 재난 앞에서 그렇게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재난 가운데 많은 것이 한편으로는 준비 부족으로 생겨납니다. 예를 들면 지진에 취약하게 건설된 학교 건물이 무너져 수백 명의 어린이가 죽음을 당하기도 합니다. 의학적인 예방 조치가 시급한 질병과 전염병들이 세상에 수없이 많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오해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두 손을 놓은 채 무관심하게 병든 이들과 가난한 이들, 추방당한 이들과 절망하는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는 없겠지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이야말로 끔찍한 냉소주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내일 걱정은 내일에 맡기라’는 복음 말씀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복음 말씀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무엇이 예수님이 정말로 의도하신 바일까요?

 

여유 있는 근심 걱정?

 

얼마 전에 저는 이 말씀을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글을 읽었습니다. 여기에 또 다른 문제가 숨어 있지요.

 

“올바른 근심 걱정이 있고 그릇된 근심 걱정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아버지 같은 호의 아래 산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근심 걱정은 전혀 다른 성격을 띤다. 물론 예수님은 준비하고 계획하는 일이 인간 삶에 필수적임을 아신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를 믿는 이의 근심은 이방인들의 근심이나 사전 대비와는 다른 것이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이들에게 불행은 하나의 재앙이다. 모든 질병이 재앙이고, 마지막으로 죽음도 재앙이다. 때문에 믿음이 없는 이들은 끊임없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근심하고 걱정할 수밖에 없다. 그들은 크고 작은 재앙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시도 중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런 재앙에서 비껴가지 못한다.

 

그리스도인은 다르다. 물론 그리스도인에게도 근심 걱정이 있다. 하지만 그 근심 걱정은 모든 것을 내려놓는 ‘여유’ 속에 ‘두려움이 없는’ 근심 걱정이다. 그리스도인은 ‘깊은 신뢰와 커다란 안정’ 가운데 모든 일에 임할 수 있다. 하느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과 보살핌이 자신을 감싸고 이끌어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다.”

 

이러한 해석이 문제를 푸는 데 하나의 진지하고도 진심어린 해결책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도 근심 걱정을 한다고, 하지만 두려움 없이, 편안하게, 여유를 갖고, 침착하게, 성숙한 태도로 그렇게 한다고 말할 수 있지요.

 

하지만 저는 이러한 해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러한 해석이 그르지는 않습니다. 믿음에서 오는 커다란 신뢰와 여유야말로 진정 올바른 것이지요. 하지만 그러한 해석에는 결정적인 면이 부족합니다. 그리스도 공동체의 본질에 대한 체험이 빠져 있지요. 때문에 가장 중요한 면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근심 걱정하지 않는 삶의 토대

 

근심 걱정하지 말라는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하신 말씀인지를 살피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이 말씀의 본래 대상자는 누구였을까요? 두말할 필요도 없이 분명합니다. 그 대상은 불특정한 이방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유다인 청중도 아니었지요. 계속해서 예수님 주위에 몰려드는 백성의 무리가 그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은 분명 제자들의 작은 무리를 향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이스라엘 전역을 정처 없이 떠돌았지요(루카 12,22 참조). 그들의 이러한 상황이 이 말씀의 배경을 이룹니다.

 

제자들의 이 상황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봅시다. 그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집과 가족과 자신의 직업을 떠납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이스라엘을 돌며 정처 없는 유랑의 삶을 사십니다. 그들은 늘 길 위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했다는 소식이 어디서나 들릴 수 있도록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서지요. 하지만 매번 예수님과 제자들은 날이 저물면 오늘은 어디서 묵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루카 10,5-12). 저녁에 그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줄 사람을 그들은 만날 수 있을까요?

 

하지만 예수님을 직접 따르는 제자들 외에도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요. 예수님과 함께 떠돌지는 않았지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이를 받아들인 이들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 살면서 예수님의 추종자가 된 이들입니다. 자신의 ‘지역에 머물며’ 예수님의 동조자, 친구, 협조자, 후원자가 된 이들입니다. 최후 만찬을 위해 잘 준비된 이층 방을 내어준 사람을 생각해 보십시오(마르 14,12-16 참조). 아니면 단순히 마리아와 마르타를 떠올려 보십시오(루카 10,38-42).

 

예수님과 제자들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역에 걸쳐 그물망처럼 얽힌 친구와 동조자들의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요. 그리고 바로 여기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근심 걱정하지 말라고 하신 말씀의 맥락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녁이면 그들을 집에 맞아줄 사람이 늘 있을 테니까요.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요. 저녁에 예수님과 제자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인 이는 음식과 밤의 안전을 제공합니다. 반대로 예수님과 제자들은 그들을 맞아들인 그 지역 추종자에게 생생한 만남을 제공합니다. 그리고 이로써 그 집에 새것이 들어옵니다. 하느님 나라의 조용한 혁명이!

 

양편 사이에 말하자면 주고받고 함께하는 유대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제자들은 더 이상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개인적인 관심사를 위해 살지 않습니다. 하느님 백성을 위해 삽니다. 지역의 추종자들은 더 이상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만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이스라엘 곳곳에, 예수님이 가시고 그분과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곳 어디에나 새것이 이루어집니다. 수많은 이들의 새로운 유대가, 옛 혈연관계를 넘어서는 새 가족이 형성됩니다.

 

그러니 분명, 산상 설교의 이 말씀이 말하는 신뢰는 “나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어. 하느님께서 다 해주실 거야!”라고 외치는 마법적인 신뢰와는 다릅니다. 또 세상을 모르는 순진한 신뢰와도 다릅니다. 그런 것은 비이성적일 뿐만 아니라 허공에 매달린 것과 같습니다. 더 나아가 낭만적인 유유자적의 삶과도 무관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근심 걱정하지 않는 삶은 매우 현실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과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이들의 집, 곳곳에 있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의 집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집들을 중심으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첫 공동체들이 형성되었지요. 이 집들에 모여 첫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하고 성찬례를 거행했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 공동체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는 근심 걱정이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예수님의 본래 의도가 지닌 핵심까지 파고들었습니다. 제자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기 때문에 근심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제자들은 예수님의 추종자와 동조자들이라는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다스림을 고대하던 이들이었지요.

 

다른 한편, 저녁에 제자들을 자신의 집에 맞아들인 이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다스림과 이 다스림이 지닌 급박성을 다른 모든 것보다 우선시하는 법을 배웁니다. 그들은 이제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먼저 찾습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에는 이제 새로운 형태의 사회가 형성됩니다. 모두가 서로 돕는 사회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함께하는 유대 가운데 서로 지지하며 도와주는 목적은 사도직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데 있습니다. 파견된 이들이 여기저기 떠돌며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을 만난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관심을 다른 모든 것보다 위에 둘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렇게 그들도 돌보십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가족을 선사하시고, 평화를 주십니다. 이 평화는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제자들을 맞아들이는 이들에게 약속된 평화입니다(루카 10,6 참조).

 

바로 이 점에서 우리 모두는 이 복음 말씀이 던지는 도전적 질문들에 직면합니다. 우리의 공동체는 과연 그러한 모습인가? 많은 이들이 서로 돕고 함께하는 공동체인가? 서로를 위해 존재하는 형제자매의 유대로 묶인 공동체인가? 그런 공동체이어야 복음을 위한 투신이 가능할 테니까요.

 

우리는 그런 공동체이기를 원하는가? 우리 본당이 늘 변화할 수 있도록 서로 도우려 하는가? 서로를 격려하고 서로에게 모범을 보이고 서로를 위로하고 서로를 지지하고 서로를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그런 본당 공동체가 되기를 바라는가? 늘 새롭게 일어나는 공동의 회심이 있고, 그 안에서는 언제나 근심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는 그런 공동체이기를 정말 바라는가?

 

저는 그러한 공동체가 바로 마태오 복음 6장 25-34절의 말씀이 뿌리내린 토대라고 확신합니다. 이러한 토대 없이는 이 복음 말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경솔하고 위험하기까지 한 해석에 기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의 토대인 ‘살아 있는 공동체’ 안에서만 많은 이들의 삶이 하나로 연결되고, 서로가 서로를 위해 존재합니다. ‘살아 있는 공동체’라야 복음이 기쁜 소식이 됩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2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재의 수요일의 결심(Vorsatze am Aschermittwoch)

 

 

좋은 결심?

 

‘좋은 결심을 품다’라는 말을 모를 사람이 있을까요? 예를 들면 삼십, 사십 또는 오십, 이렇게 10주년이 되는 생일을 앞두고 우리는 어떤 좋은 결심을 품습니다. 아니면 새해 아침에, 또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에도 무엇인가 작심을 하지요.

 

계기가 있을 때마다 그런 좋은 결심들을 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요? “내일부터 담배를 끊어야지!” “이제는 술을 적게 마셔야지!” “더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지!” “티브이 시청을 절제해야지!” “아내에게 더 잘해야지!” “남편을 더 사랑스럽게 대해야지!” 또는 아주 철저하게 이런 결심을 할 수도 있겠지요. “내일부터 나는 모든 것에서 완전히 달라질 거야!”

 

한데 실제로 무엇인가 바뀌나요?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굳게, 변함없는 마음으로 품었던 결심들은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집니다. 대개 작심삼일이지요. 처음에는 자신에게 ‘이것만은…’이라는 예외를 허용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삶의 시작을 내일로 미루지요. 다음 주로 미룹니다. 하지만 다음 주가 되면 모든 것은 바람에 날려가고 아무것도 없지요. 늘 그랬던 것처럼, 옛 삶은 계속됩니다.

 

왜 늘 그 모양일까요? 그렇게 좋은 뜻으로 마음먹은 결심들은 어찌하여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까요? 왜 그 모든 것이 그처럼 믿을 만한 것이 못될까요? 이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 살펴봅시다.

 

먼저, 성경에는 ‘좋은 결심’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그러한 개념은 고대 철학에서 유래하지요. 이 개념을 깊이 숙고한 고대 철학에 따르면,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으려면 내적인 선택(propositium)이 먼저 이루어져야 하고, 그런 다음 그 선을 바라는 굳센 지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통찰이 중세 시대 이후로 고해성사 신학의 한 요소로 자리 잡았습니다. 곧 통회는 그 자체로 끝나서는 안 되고, 앞으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굳센 결심과 연결되어야 합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451항 참조). 이로써 엄숙함과 기쁨의 참회성사야말로 우리가 자신의 삶을 바꾸겠다는 굳센 의지를 실현하는 자리가 됩니다.

 

개선이 아니라 회심을!

 

이미 언급했듯이 ‘좋은 결심’이란 개념은 성경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개념이 가리키는 바를 성경에서 아예 찾을 수 없다는 뜻은 아니지요. 그 내용에 대해서는 예언자들과 하느님 백성의 교사들이 아주 분명하게, 심지어는 아주 날카로운 방식으로 이야기합니다. ‘회개하라!’는 그들의 외침이 바로 그것입니다.

 

회개해야 하는 이유는, 이미 그릇된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점점 더 목적지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데 있지요. 이와 달리 보통 대부분의 좋은 결심은, 전반적으로는 별로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개선이 필요한 몇몇 사안이 있다는 정도지요. 좀 깎고 다듬어야 할 면이 있거나, 고치고 보완해야 할 부분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큰 틀에서는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개선의 결심은 이른바 사후 보수의 차원에서 이루어집니다.

 

하지만 유다 그리스도교 전통은 훨씬 더 철저하게 생각합니다. 예를 들면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얹으며 “사람은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십시오.”라고 선언합니다.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참다운 처지이지요. 이런 엄숙한 처지에 맞갖게, 재의 수요일의 전례는 요엘 예언서를 인용합니다. “옷이 아니라 너희 마음을 찢어라. 주 너희 하느님에게 돌아오너라.”(요엘 2,13)

 

우리가 자신의 참다운 처지를 깨닫지 못하거나, 그리하여 자신의 마음을 찢지 못한다면, 우리는 돌아설 수 없습니다. 다른 모든 결심보다 더 큰 가치가 있는 굳은 마음, 곧 “나의 온 존재를 다해 하느님을 섬기고 그분께만 영광을 드리겠다.”는 그런 마음을 먹기도 불가능합니다. 그럴 경우 ‘좋은 결심’도 대개는 물에 탄 듯 밍밍하고, 자신의 실제 현실을 가리는 방패막이입니다. 새 마음과 새 정신이 필요한데, 그저 외양을 치장하는 수준에서 끝납니다.

 

보통의 ‘좋은 결심’이 문제인 것은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곧 그런 결심은 자신이 스스로를 바꿀 수 있다는 점을 전제합니다. 본인이 충분히 노력만 한다면 변화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런 식의 결심은 성경적인 믿음을 윤리적인 재무장 정도로 격하시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력구원이지요.

 

“오늘부터 나는 내 삶을 바꾸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인간에 대해 너무 모르는 것입니다. 아니, 믿음이 무엇인지 전혀 모르는 사람이지요. 스스로의 힘으로 나 자신을 어디 바꿀 수가 있나요? 내가 돌아선다면, 내 삶이 새로워진다면, 그것은 언제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은총이지요. 물론 돌아서는 것은 내가 돌아서는 것이고, 그렇게 회심은 전적으로 나 자신의 행동에 달렸지만, 모든 것은 늘 은총입니다.

 

‘애가’는 그리스어 성경과 라틴어 성경에서 예레미야 예언서 끝에 부록처럼 들어 있는데, 이런 탄원으로 마무리합니다. “주님, 저희를 당신께 되돌리소서, 저희가 돌아가오리다. 저희의 날들을 예전처럼 새롭게 하여 주소서.”(애가 5,21)

 

그 어떤 신학도 이보다 더 나은 표현을 찾아낼 수 없겠지요. 회심은 언제나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인간이 자신의 자유로 돌아선다 해도, 이는 ‘그분의’ 업적입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돌아선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구원 역사와의 만남을 통해

 

‘애가’는 인간의 회심이 하느님에게 주도권이 있음을 분명히 합니다. 그렇다고 이러한 통찰이 그저 경건한 생각과 말에서 나온 것만은 아닙니다. 애가에는 이미 남부 유다 왕국의 멸망과 기원전 586년에 있었던 성전 파괴에 대한 기억이 녹아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충격의 한 순간을 되돌아보는 것이지요. 애가에 나오는 ‘우리’는 두들겨 맞고 흩어진 하느님 백성을 가리킵니다.

 

어쩌면 분명, 이스라엘이 국가라는 형태를 계속 고집한다면, 정말로 회개는 영영 불가능했을지도 모릅니다. 586년의 파멸을 겪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립니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은 이제 새로운 삶으로 돌아서기 위한 회심의 기도를 간절하게 바칩니다.

 

이로써 회심이 일어나는 자리가 어디인지 분명해집니다. 곧 회심이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라고 해서, 이것이 마술적인 방식으로 저절로 일어난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눈이 열려 내가 처한 현실과 역사를 되돌아보게 하십니다. 나 자신의 역사와 하느님 백성의 역사, 모든 민족의 역사를 바라보게 하십니다. 전 세계적인 불행과 불의의 역사 앞에서 마음이 움직일 때만, 진정한 회심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초래한 비참함이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하느님께서 민족들의 불행에서 어떻게 온전히 새롭게 시작하시는지를 깨달아야만, 돌아설 수 있습니다.

 

회심에 대한 성경의 개념과 관련해 덧붙일 점이 또 있습니다. 곧 진정한 회심은 언제나 교회와 공동체의 테두리 안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회심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따라야 할 길을 제시하는 사람들과의 만남을 전제합니다. 재의 수요일에 봉독하는 신약성경 말씀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절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권고하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여러분에게 빕니다. 하느님과 화해하십시오.”(2코린 5,20)

 

이 점은 모든 회심의 기본 요소입니다. 그리스도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대신해 말하는 이들이야말로 내가 처한 참된 상황을 바라볼 눈을 열어주고, 하느님과 화해할 마음을 내게 불러일으킵니다.

 

회심은 말하자면 좋은 결심으로 가득 들어찬 서랍이 아닙니다. 회심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하시는 역사를 깊이 들여다보는 데서 일어나는 속 깊은 사건이고, 결국 이 역사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가능하게 되는 일입니다. 회심은,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새롭게 마련하시는 새것을 조금이라도 맛보는 데서 출발합니다. 보고 만지는 일도 맛보는 일도 없이 삶 전체의 방향을 어찌 온전히 바꿀 수 있겠습니까? 전에는 모르던 기쁨을 맛보게 될 때, 비로소 회심이 가능합니다.

 

기쁨을 맛본 데서 오는 회심

 

회심은 아주 흔히, 근원적으로 어떤 곤경에 처했을 때,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일어납니다. 구약성경의 ‘애가’만이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루카 복음서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작은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탕진하고 돼지를 치는 일꾼으로 전락한 다음에야, 말하자면 밑바닥에 떨어진 다음에야, 회심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곤궁한 처지에서 방향을 바꾼 작은아들의 이 회심마저도, 아버지 집이 얼마나 좋은지를 그가 떠올리지 않았더라면, 불가능했을 테지요. 아버지 집에서는 누구나 모두 배불리 먹는데…!

 

작은아들을 일어서게 한 것은, 그가 겪는 삶의 곤경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를 아버지 집으로 향하게 한 것은, 아버지의 사랑과 아버지 집에서 누리는 기쁨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위해 진수성찬을 차릴 것입니다.

 

큰아들 역시, 곧 동생만큼이나 회심이 꼭 필요했던 그 형 역시 함께 기쁨을 나눌 때만, 비로소 회심이 가능합니다.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함께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루카 15,32)

 

회심은 무디거나 어정쩡한 사건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에는 여러 요소들이 필요하지요. 이를테면 ‘좋은 결심’도 그 가운데 한 요소입니다. 작은아들도 ‘일어나 아버지께 가야겠다!’는 결심을 합니다(루카 15,18 참조).

 

그리스 철학에서 하는 말은 옳습니다. 곧 올바른 행위와 선의 실천은 먼저 내적인 선택을 통해 그것을 지향할 때만, 비로소 가능합니다. ‘일어나야겠다!’는 작은아들의 내적인 선택이 그의 온 삶을 바꿉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시는 이 새로운 상황, 기쁨이 넘치는 이 상황을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묘사합니다. “지금이 바로 매우 은혜로운 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구원의 날입니다.”(2코린 6,2) 이 말씀을 우리는 재의 수요일 독서에서 듣지요.

 

‘좋은 결심’도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세상 구원의 역사와 깊이 연결될 때만, 마침내는 그 정당성을 갖게 됩니다. 그럴 때만, 좋은 결심들도 더 이상 내 생각에서 오지 않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나에게 길을 보여주는 이들과의 만남을 통해 외부에서 옵니다. 그래야만 나의 결심들도 더 이상 나 자신의 아성을 쌓는 데 쓰이지 않고, 하느님께서 세상에서 이루시는 일에 협력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좋은 결심은 기쁨에서, 바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쁨에서 옵니다. 이 기쁨이야말로 좋은 결심을 지속하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기쁨에서 솟아나는 결심만이 우리를 새로운 창조로 이끌어 갑니다. 사라져 갈 흙과 같은 우리의 나약성과 우리 스스로 초래한 파국에서 하느님 몸소 새롭게 이루시는 그 창조 속으로!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3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Ihr seid Gottes Tempel!)

 

 

바오로 사도가 코린토 공동체에 보낸 첫째 서간에는 아주 담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바오로는 이렇게 쓰지요.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1코린 3,16)

 

이 말씀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코린토라는 항구 도시의 작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를 떠올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공동체의 수는 많아야 일이백 명을 넘지 않았지요. 게다가 그들은 영웅이나 성인도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안고 있던 문제에 대해 우리는 꽤나 많이 알고 있습니다. 온갖 추문과 사건으로 공동체는 깊이 분열되어 있었지요. 그 어떤 공동체도 코린토 공동체보다 바오로에게 어려움을 준 공동체는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오로는 그들을 향해 말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성전의 찬란함

 

이 얼마나 담대한 말씀일까요? 이 담대함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성전’이 어떠했으며, 또 ‘성전’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당시 사람들에게 무엇이 연상되었는지를 분명하게 알 필요가 있습니다. 곧 한 치의 과장도 없이, 성전은 고대 세계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대상이었지요.

 

최고의 건축가들이 모여 성전을 건설했습니다. 가장 좋은 재료들을 사용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성전 구역이 차지했던 비중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를 가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 역시 그에 못지않았지요.

 

헤로데가 기원전 20년에 증축을 시작한 예루살렘 성전은 하얀 대리석으로 지어졌고, 벽면 곳곳에는 순금을 입혔습니다. 아침마다 태양이 떠오를 때면, 성전은 눈부실 만큼 찬란하게 빛났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찬란함에는 다 이유가 있었지요. 성전은 하느님의 거처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전 내부의 지성소에도 대사제 외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대사제마저도 일 년에 단 한 번, 곧 ‘속죄의 날(욤 키프르, Yom Kippur)’에만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었지요.

 

예루살렘 성전은 거룩한 곳으로 여겨졌습니다. 달리 말해, 성전은 오로지 하느님께 속한 곳이었지요. 하느님만의 특별한 소유였습니다. 성전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거처하시는 곳이었습니다. 성전을 얼마나 거룩하게 여겼던지, 율법학자들은 이런 말까지 했습니다. “성전이 예루살렘을 거룩하게 하고,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을 거룩하게 하며, 이스라엘이 온 세상을 거룩하게 한다.”

 

무슨 말인지 분명합니다. 곧 탈출기에서 성막을 두고 이르신 말씀이 예루살렘 성전에 그대로 적용된 것입니다. 탈출기 35-40장에서 성막은 창조의 완성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니 후에 돌로 지어진 성전도 그 찬란함과 고귀함을 통해, 하느님께서 이미 창조 이전에 염두에 두셨던 세상의 모습을 드러내야 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성전은 창조의 완성으로만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온 우주(Cosmos)의 모습이 총체적으로 구현된 것으로만 여겨지지 않았지요. 이스라엘의 신학자들은 더 나아가 이렇게 확신했습니다. 곧 성전이 있는 곳에서 하늘과 땅이 연결된다고요. 실제로 예루살렘 성전의 지성소를 가리고 있던 형형색색의 거대한 휘장에는 무수한 별들로 이루어진 하늘 궁창이 수놓아져 있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이런 배경을 놓고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들어야 우리는 그 안에 담긴 의미를 비로소 이해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고 하느님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이 얼마나 담대하고 엄청난 말씀인가요?

 

믿는 이들의 모임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적용한다면, 믿는 이들의 모임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값비싼 보물입니다. 그 안에 하느님께서 거처하시고, 부활하신 분께서 거처하십니다. 물론 이 모임을 이루는 우리 모두는 나약하고 죄 많은 인간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 세계를 두고 오래전 이미 바라신 바가 우리에게서 볼 수 있게 드러나야 합니다.

 

또 더 나아가, 공동체가 모인 곳에서 하늘과 땅이 연결됩니다. 바로 거기 그리스도인 공동체 한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로 이루어진 하느님 창조의 완성이 오늘 이미 시작됩니다.

 

“여러분이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말씀 앞에서 우리는 늘 다시 당혹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공동체로서의 우리 삶이 매번 이 말씀과는 동떨어진 경우가 많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바오로 사도의 이 말씀을 끊임없이 새롭게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아니 이 말씀 때문에 우리 마음이 늘 다시 흔들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고대 세계의 혁명

 

뒤흔들어 깨우는 이 말씀이야말로 바오로 신학의 핵심 가운데 하나이지요. 저는 여기에 몇 가지 역사적 사실을 덧붙이고자 합니다.

 

기원후 2세기에서 4세기에 이르는 고대 말기 유럽에서는 광범위한 영향을 끼친 하나의 혁명이 진행되었습니다. 곧 로마 황제의 통치 시기였던 당시에 수많은 지식인들이, 성전이 신들의 거처라는 생각을 더 이상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지요.

 

심지어는 고대의 모든 성전 제의 자체를 의문시한 철학자들이 있었습니다. 사제들이 마치 도살자처럼 피를 묻혀가며 동물을 잡아 제물을 마련하는 일을 두고 사제들을 조롱하기도 했지요. 이런 철학자들은 성전을 그저 구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건축의 걸작 정도로 여겼습니다. 더 이상 성전을 다른 곳과는 분리된 거룩한 구역으로 여기지 않았지요.

 

게다가 고대 말기에 수많은 지식인들은 더 이상 신이 여럿이라는 믿음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단 하나의 절대적 거룩한 존재, 이름 붙일 수 없는 오롯한 영적 존재를 믿었습니다. 그야말로 최종적인 의미에서 ‘신적인 존재’를 믿었지요. 누구나 이 신적인 존재에게 두 손 들어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지, 동물을 잡아 바치는 제사는 웃음거리일 뿐이라고 여겼습니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누구나 정결하고 거룩하게 살면, 그 자신이 신적인 영의 거처일 수 있다고요. 심지어 사제가 필요 없다고도 했습니다. 철학자들이야말로 진정한 사제라는 것이지요. 현명한 이들의 지식과 미신에서 벗어난 대 사상가들의 지성이 바로 진정한 성전이요 참된 제단이라고 말했습니다.

 

모든 것이 이를테면 불온한 종교 비판이었지요. 오늘날 이러한 비판을 배제하고서는 서구 문화 자체를 아예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아무튼 성전과 제물에 대한 그러한 비판은 2세기에 들어서 광범위하게 확산되었습니다. 여기에는 특히 이른바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의 역할이 컸습니다. 자신들보다 600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의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에게 기반을 둔 이 고대 말기의 철학자들은 그렇게 미신에서 깨어난 종교 비판을 발전시켰습니다. 곧 모든 제물과 제사의 시대는 지나갔고, 성전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역설했지요.

 

성전과 제물에 대한 성경의 비판

 

지금까지 제가 말한 고대의 종교 비판은 오늘날 우리 시대의 수많은 지성인들과 특히 종교사 전문가들에게도 일반적인 이론입니다. 곧 그들의 말에 따르면, 우리의 근대적 의식은 고대의 그러한 종교 비판이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수많은 이들과 이른바 ‘지성인’이라고 불리는 이들마저도 놓치고 있는 것은, 그러한 계몽의 발전 과정에서 이스라엘이 끼친 영향과 역할입니다.

 

사실 이스라엘과 초기 교회의 종교 비판은 신플라톤주의의 종교 비판보다 훨씬 앞선 것이었지요. 이미 구약성경에는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 가운데 거처하시며(레위 26,11; 즈카 2,14 참조), 돌로 지은 성전으로는 하느님을 모실 수 없다(1열왕 8,27 참조)는 생각이 확연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백성에게 끊임없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 안의 사회 정의를 그 모든 제물보다 더 중하게 여기신다고요(호세 6,6; 시편 50; 잠언 21,3 참조). ‘찬미의 제물’이, 달리 말해 자신의 삶을 헌신하는 데서 나오는 기도가 동물을 잡아 바치는 모든 제사보다 훨씬 낫다고요(시편 51,19; 로마 12,1 참조).

 

신플라톤주의보다 훨씬 앞서 이미 이스라엘에서는 ‘죽은 돌’로 지어진 성전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돌’로 이루어진 성전을 중시하는 생각이 발전했습니다. 여러 쿰란 문서들의 작성자로 여겨지는 유다 공동체는 예루살렘 성전과 그 성전의 예배를 비난하며 자신들을 종말의 거룩한 성전으로 이해했습니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공동체 자체가 성전인 것입니다.

 

물론 이 모든 성전 예배와 의식을 실질적으로 끝장내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죽음을 앞두고 최후 만찬에서, 그분은 당신 목숨을 바치는 일을 모든 성전 제물을 대체하는 것으로 이해하십니다. 그분 자신이 성금요일에 제물이 되십니다. 히브리서는 올바르게도 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이로써 제물을 바치는 성전의 모든 제사는 완결되었다! 곧 지나간 것이 되었다! 돌로 지은 성전이 핵심은 아니다!

 

따라서 요한 묵시록에서 환시를 보는 이는, 종말의 도성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성전이 없다고 말합니다(묵시 21,22 참조). 하느님 몸소 당신 백성 한가운데 거처하시고, ‘단 한 번 영원히’ 당신을 제물로 바친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제 신들의 옛 형상과 모든 성전 예배를 대체하십니다(묵시 5,6; 21,22 참조).

 

이처럼 무엇보다 구약과 그리스도교 신학의 전통에서, 그러니까 신플라톤주의보다 훨씬 앞서, 제물을 바치는 옛 제의를 끝장내는 계몽의 발전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는 광범위한 부분에 영향을 주게 되었지요. 곧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더욱 깊고 분명한 이해에 도달한 것입니다. 또 나아가 더욱더 인간적인 사회상을 가지게 되었지요.

 

이런 맥락에서 이제 여러 중대한 물음이 전면에 드러날 수 있었습니다. 먼저, 하느님은 과연 어떤 분이신가? 하느님은 제물을 필요로 하는 분이신가? 인간에게 자애를 베풀기에 앞서 늘 제물을 원하는 분이신가? 또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끊임없이 하느님의 노여움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제물을 바쳐야 하는 존재인가? 사회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회는 늘 누군가를 제물로 삼을 수밖에 없는가?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점찍어 그를 죽음으로 내몬 다음에야 적어도 잠시 동안은 평온과 단결이 유지되는 조직인가?

 

세 분야에 걸친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르고도 유일한 대답은 바로 유다 그리스도교의 계몽의 역사에서 나옵니다. 아테네와 로마의 철학과 문화는 여기에 보조 역할을 했지요. 땅을 갈아엎은 것은 그들이었지만, 일찌감치 씨앗을 뿌린 것은 예루살렘이었습니다.

 

우리 가운데 계신 하느님

 

돌로 지은 건물이 아니라 바로 공동체가 하느님의 성전입니다. 다시 말해 백성 전체가 하느님의 거룩한 거처입니다. 이 말이 맞는다면, 이는 중대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곧 이렇게 말할 수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성당 안에, 좀 더 좁혀서 말해 우리가 조배하고 기도하는 감실의 거룩한 성체 안에 계십니다. 그분은 또 우리가 세례와 견진성사에서 받은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도 계십니다. 하지만 더 나아가 그분은 우리 가운데 거처하십니다. 하느님 말씀을 듣는 우리의 모임 가운데, 하느님께서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시는지, 우리가 서로 어떻게 화해할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는 그 모임 한가운데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해 우리의 모임 어디에나 그 한가운데 계십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분께서 늘 함께하시기 때문이지요(마태 18,20 참조). 우리의 모임은 언제나, 부활하신 분이 이미 그 한가운데 거처하시는 부활의 모임입니다.

 

우리의 모임에서 가장 중요한 모임인 성찬례에서 우리는 다른 모든 제사를 완결한 단 하나의 제사를 거행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하느님의 진정한 성전이 되지요. 이 성전은 더 이상 죽은 돌로 이루어진 것도, 그렇다고 순전히 ‘영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살아 있는 이들에게서 온전히 현실이 된 성전입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4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우주에서 아무 의미 없이?(Bedeutungslos im Kosmos?)

 

 

영국의 저명한 소설가 이언 매큐언(Ian McEwan)이 쓴 『토요일』이라는 단순한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신경외과 의사 헨리 퍼론이 겪는 단 하루의 토요일을 묘사한 소설이지요. 이 단 하루가 그에게는 격동의 토요일입니다. 그의 직업은 늘 반복적으로 사람의 뇌를 열고, 창백하고 허연 그 속을 들여다보는 일입니다. 때문에 그는 단호한 물질주의자입니다. 소설은 첫 장에서부터 이 뇌 전문가가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묘사합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정신의학적으로 분석하지요. 그의 분석은 대략 이렇습니다.

 

그리스도인들과 신을 믿는 모든 이들은 위험할 정도로 지나친 자의식의 병을 앓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관계성의 망상에 사로잡혀 산다. 그들은 세상을 오직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분류하고 정리한다. 그들은 병을 앓고 있으며, 그 병은 인간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 있다. 이런 이유로 그들은 과대망상적인 연관 체계를 만들어낸다. 이를테면 ‘신’ ‘창조’ ‘영혼 불멸’ ‘승천’ ‘영원한 생명’ 등이 그것이다. 이러한 연관 체계들은 정확히 말해 과대망상일 따름이다. 이를 바탕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이 무한히 중요하고 의미 있는 존재라고 여긴다. 하지만 끝없이 공허하고 차가운 우주에서 인간은 그저 아무 의미 없는 먼지에 불과하다. 물론 이러한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때문에 자신들에게 위로를 주는 과대망상의 체계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인간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는 사실 위에 형이상학의 탑을 쌓으려는 병적인 시도를 한다. 그 모든 체계와 모든 일신론의 주장은 결국 정신 이상의 징후일 따름이다.

 

이 모든 생각이 소설에서 그날 토요일 아침 일찍부터 뇌 전문가가 하는 판단입니다. 그리고 이 토요일을 배경으로 소설이 펼쳐지고 극적인 전개가 이어집니다.

 

과대망상?

 

그런 생각을 가진 뇌신경학자가 우리 앞에 있다면, 우리는 그와 어떤 말을 주고받을 수 있을까요?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바로 그 자신이라고 말해주어야 할까요? 어쩌면 병을 앓고 있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하느님을 부정하는 이들이라고요. 그들은 건강한 생각을 가로막는 억압과 단편적인 시각에 갇힌 이들이라고요.

 

하느님을 부정하는 이들이야말로 많은 것을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임이 분명하다고 말해주어야 할까요?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 창조된 세상의 아름다움도, 인간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무한에 대한 갈망도, 하느님만이 채우실 수 있는 인간 안의 깊은 구멍도 부정하는 사람들이고, 민족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솟구치는 정의에 대한 외침도 외면하는 사람들이라고요. 인간의 법정은 끝내 이룰 수 없는, 오직 하느님만이 똑바로 세우실 수 있는 그 정의에 대한 외침 말입니다.

 

어쩌면 그 자신이 하느님과 같은 자리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참을 수가 없어서, 단지 그런 이유로 하느님을 부정하는 이들도 있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이들이야말로 스스로 자신이 모든 것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지요. 스스로 전능하고, 자기 자신이 법이 되고 싶어 합니다. 말하자면 타인에 대한 조금의 배려도 없이 자신의 마음에 드는 것이면 무엇이나 제 식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정확히 이것이야말로 과대망상 속에 사는 게 아니고 무엇일까요.

 

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 말한다면, 이 또한 의미 있는 반론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맞던 돌을 다시 되던지는 행위라고나 할까요. 그리되면 우리는 서로 끝도 없이 싸우게 될 뿐입니다. 누가 더 진짜로 세상을 왜곡하는 비현실적인 과대망상에 사로잡혀 사는지 서로 계속 비난하겠지요.

 

예수님의 권한과 힘

 

이런 종류의 질문들에 자꾸만 휘말릴 때면, 제게 늘 도움이 되는 한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인류 역사의 위대한 인물들을 하나하나 차례로 생각해보는 것이지요.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그러한 인물들을 ‘규범적인’ 인간이라 일컬었습니다. 그런 인물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면, 이 문제에서 빠져나오는 데 도움이 됩니다.

 

그런데 그럴 때마다 결국 마지막에 남는 분은 늘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가리켜 스스로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

 

그분이 받은 권한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를 관통하며 변함없이 살아계시고 작용하시는 예수님의 그 감추어진 권한의 힘은 무엇일까요?

 

그분의 힘은 국가의 권력도, 그 국가의 관료와 조직이 행사하는 권력도 아닙니다. 총과 탱크로 무장한 군대의 권력도 아닙니다. 돈의 권력은 더더욱 아니지요. 광장에서 전복을 외치는 군중의 권력도 아닙니다. 교묘하게 변화와 지지를 선동하는 강력한 정치 구호나 선전에서 나오는 권력도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의 힘은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지요. 그분의 힘은, “나는 진리이다.”(요한 14,6)라고 하신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분은 진리이십니다. 그분만이 인간과 사회가 겪는 끔찍한 모든 고통에 대한 답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의 공동체가 또한 바로 그 답이지요. 서로 함께 삶을 나누고 산상 설교에 따라 사는 이들의 공동체 말입니다. 세상에 차고 넘치는 고통에 대한 답은 그밖에 달리 없습니다.

 

이미 온갖 실험들이 실패로 끝났지요.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삼는 이기주의는 늘 이렇게 묻습니다. “무엇이 나에게 유익하고 좋은가?” 쾌락주의는 인간의 행복이 순간의 욕구 충족과 소비에 있다고 말합니다. 개인주의는 이렇게 말하지요. “각자가 자신의 주인이다. 아무도 믿지 말라!” 공산주의와 전체주의는 어떤가요? 그들은 인간을 하나의 전체로 환원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상에 인간을 강압적으로 몰아넣으려 합니다.

 

그러한 실험들이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 줄줄이 이어졌습니다. 인간에게 무엇이 가장 좋은 것인지 알아보려 했다고나 할까요. 하지만 그 모든 실험이 끔찍한 결과로 끝났습니다. 수백만의 사람이 처참하게 이름 없이 죽어갔지요. 평화와 자유 속에서 인류가 함께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의 산상 설교에, 그리고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 사는 공동체에 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참으로 답을 가져오신 분입니다. 그리고 그 답이 그분의 권한이고 권력이고 힘입니다.

 

자신에게서 자유로운 분

 

하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예수님의 힘은 무엇보다 그분이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그분이 오롯이 유일하게 바라신 단 하나는, 하느님의 계획이 실현되는 것이었지요.

 

그분은 오로지 하느님 백성을 불러모으고 새롭게 하기 위해 사십니다. 이 백성 안에서는 누구나 하나같이 귀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진정으로 한 백성을 이루지요. 예수님은 당신 자신에게서 자유로우십니다. 때문에 그분은 온전히 자유롭게 하느님을 위해 사십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통해 몸소 행동하시고 그분 안에서 세상을 위해 현존하십니다. 이 역시 예수님의 ‘권능’에 속하지요.

 

그분의 힘은 조용하고 지극히 부드러우며,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힘입니다. 이 세상 권력자들의 힘과는 전혀 다르지요. 인간이 스스로 달성하거나 쟁취하거나 빼앗을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힘입니다. 그런 힘은 다만 ‘주어질’ 수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마태오 복음서 마지막의 그 인상적인 장면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곧 십자가에 못 박히고 하느님 아버지에 의해 하늘로 드높여진 그분께서 당신 자신을 가리켜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위대한 인물들, 규범적인 인물들을 다 열거해도 저는 그분과 같은 힘을 지닌 인물은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분과 같은 진리, 그분과 같은 선명성, 인간과 세상에 대해 그분과 같은 지식을 지닌 인물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동시에 그분과 같은 매력을 지닌 인물 역시 만나지 못했지요. 그분이 지니신 매력은 우리를 결코 그릇된 길로 인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선사합니다.

 

그리스도교의 연관 체계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고안해낸 과대망상이 결코 아닙니다. 광활한 우주에서 우리 자신이 참으로 의미 있는 존재임을 정당화하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연관 체계가 아니지요.

 

우리의 신앙, 우리의 연관 체계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뿐이십니다. 아브라함 이래로 길을 걸었던 이들이 바로 그런 신앙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욕구가 투영된,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대상을 따르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따르는 것은 세상과 역사에 대한 체험에서 얻은 것으로, 이 체험은 수천수백 번의 시도와 시험과 고난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인간이 우주에서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승천’ 등과 같은 거대한 연관 체계를 만들어냈다는 비난이 가당키나 할까요? 그러한 비난이야말로 성경과 그에 따른 전통이 정말로 무엇을 말하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하는 소리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아주 냉철하게, 우리가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전혀 왜곡하는 일 없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바람에 날리는 잎사귀와 같습니다. 우주에서 작은 먼지에 불과하지요. 우리는 마지막에 결국 한줌 흙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런 말도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을 받는 존재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이미 당신의 영광 속으로 들어 높여주셨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는 지금 이미 하늘에 있는 것입니다(에페 2,6 참조).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승천” 대축일에 경축하는 내용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5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성령은 보이는 분이신가?(Kann man den Heiligen Geist sehen?)

 

 

성령 강림 대축일의 복음은, 저녁이 되어 함께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이야기를 전합니다.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들 한가운데로 오십니다. 그러고는 이렇게 인사하십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요한 20,19)

 

또 그들에게 당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십니다. 그 상처를 바라봄으로써 제자들은 그분이 누구신지 알아봅니다. 이 복음의 본문은 장황하지 않고 거리를 유지한 채 아주 간결합니다. 그리고 이제 결정적인 장면을 전합니다. 곧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모여 있는 제자들에게 다시금 평화를 약속하시며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요한 20,21)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또 말씀하십니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23)

 

하느님의 숨

 

이 이야기의 배경을 이루는 것은 창세기 2장 7절의 말씀입니다.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창세기 2장 7절의 이 말씀은 물론 상징적 언어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숨겨진 진리가 가득 담겨 있습니다. 인간은 본래 땅의 먼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다시 먼지로 돌아갈 존재이지요. 하지만 그런 존재를 성령께서는 인간이 되게 하십니다. 희망과 동경으로 충만한 생명체가 되게 하시지요. 물론 인간은 많은 면에서 여전히 동물과 비슷합니다. 또 자주 아예 동물의 수준으로 추락하는 인간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진리와 선을 찾고 무한을 갈망합니다. 말하자면 성령께서 불어넣어주신 것을 찾는 것이지요.

 

인간이 땅의 먼지와 하느님의 숨으로 창조되었다는 점을 놓고 보면, 요한 복음서 20장 22절은 결국 성령에 의한 ‘새’ 창조를 가리키는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새 창조의 영을 불어넣으시는 분이 바로 부활하시고 현양받으신 그리스도이시지요. 그런데 이 새 창조는 교회 안에서 시작됩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제자들의 파견과 함께 시작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성령의 힘으로 제자들은 죄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죄의 용서에서 교회가 생성됩니다. 성령의 작품이요 새 세상의 시작인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십니다. 하지만 그 숨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감지할 수 있지요. ‘숨’은 성령을 상징하는 표현이기도 한데, 여기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숨은 온화함과 부드러움, 생명력과 온기, 고요함 등을 나타냅니다. 지나치기 쉽지만, 그러한 부드러움이야말로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시나이 사건

 

루카는 사도행전에서, 언뜻 보기에 전혀 다른 모습의 성령 강림을 묘사하는 듯합니다. 성령께서는 거센 바람 속에서 불꽃 모양의 혀와 같은 형상으로 제자들에게 내리지요(사도 2,2-3 참조). 하지만 이 이야기의 배경은 창세기 2장 7절이 아니라, 바로 탈출기 19장 16-19절입니다. 시나이 산기슭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은 우렛소리와 함께 번개가 치고 연기가 솟아오르며 산이 뒤흔들리는 가운데 토라(Tora)를 받습니다.

 

유다인들의 오순절 축제(Shavuot)는 신약성경 시대에 이르러 단지 추수감사절의 성격에만 그치지 않습니다. 이미 시나이 산에서 토라를 받은 것을 기념하는 구원사적 축제가 되어 있었지요.

 

성전 순례 축제이기도 했던 이 오순절에 예수님의 제자들은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모임에서 그들은 자신들을 깊이 흔들어 놓는 성령 체험을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이 체험을 곧바로 시나이 사건을 바탕으로 해석합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당신 백성에게 토라를 주셨듯이, 이제 새롭게 모인 제자 공동체에게 곧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서로 화해하고 거룩하게 된 하느님 백성에게 종말에 약속된 하느님 영이 내린 것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성령 강림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가 있습니다. 성령께서 내리시어 제자 공동체를 사로잡는 이야기지요. 곧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나 동료들에게 돌아옵니다. 그들은 최고 의회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담대히 증언하고 돌아온 참이었지요. 그들의 귀환은 공동체에 자발적인 감사 기도를 불러일으켰습니다. 루카는 그들이 기도를 마치자 그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고 말합니다(사도 4,31 참조).

 

요한 복음서 20장과 사도행전 2장의 성령 강림 사건과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성령은 감지할 수 있는 실재입니다. 바로 제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뒤흔들리는 사건이었지요.

 

오늘날에는 왜?

 

하지만 이런 반문이 듭니다. 그 모든 일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왜 일어나지 않는가? 하느님 예배를 위해 모인 공동체 위로 불타는 혀 모양의 성령이 내린다면, 우리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겠는가? 성당 안이 거센 바람으로 일렁이고, 우리가 딛고 선 바닥이 뒤흔들린다면…? 어찌하여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보고 듣고 체험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는가?

 

이런 반문 뒤에는, 일단 성경 본문의 핵심은 외면하고 성령 강림 사건을 경건한 옛이야기처럼 생각하려는 경향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확히 들여다보면, 그러한 반문은 본질을 비껴간 질문임이 분명합니다. 우리에게도 여전히 성령은 감지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우리 역시 성령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음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뒤흔드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힘으로 살고 성령께서 자신을 이끄시도록 내어 맡기는 사람은 거짓으로 점철된 사람의 삶과는 그 모습이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성령의 기쁨으로 충만한 공동체와, 그렇지 않고 두려움과 억압에 사로잡혀 있으며 침울하고 풀이 죽어 있는 공동체, 서로 갈라져 자기주장만 내세우는 공동체의 차이를 누구나 단번에 구별할 수 있지요.

 

성령의 체험 장소인 그리스도인 공동체

 

그리스도교 예술에서 성령 자체에 대한 설득력 있는 상징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것은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닙니다. (비둘기 형상은 임시방편이라고나 할까요) 아무튼 그 이유가 어느 정도 분명하다고 할 수 있는데, 바로 성령에 대한 본래의 상징은 함께 모인 공동체, 곧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찾으며 한마음으로 모인 공동체, 누구에게나 모두 호의로 대하는 믿음 깊은 공동체, 하느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모인 공동체야말로 성령에 대한 가장 아름답고 가장 적합한 상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성령 강림 사건은 예부터, 기도하는 가운데 한 마음으로 모인 열두 사도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그 한가운데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계시지요. 이 모습이야말로 성령 강림을 묘사하는 전통적인 방식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보이는 구체성은 바로 거기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핵심은, 혀 모양의 불꽃보다는 함께 모인 공동체의 겸손과 믿음, 한 마음입니다. 바로 이러한 겸손과 믿음, 한 마음에서 우리는 성령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요한과 루카가 성령을 보이는 차원으로 묘사한 것은 올바른 일이었지요. 바오로 사도도 그렇게 합니다. 성령 강림 대축일 제2독서의 말씀으로 봉독되는 코린토 1서 12장에서 바오로 사도는 여러 은사들, 곧 ‘성령의 선물들’에 대해 말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열거하는 은사는 이런 것들입니다. 곧 지혜를 전하는 은사, 지식을 전하는 은사, 믿음의 은사, 병을 고치는 은사, 기적을 일으키는 은사, 예언을 하는 은사, 영들을 식별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은사, 신령한 언어를 해석하는 은사 등이지요. 그리고 바오로는 이 모든 것을 한 분이신 같은 성령께서 일으키신다고 말합니다. 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은사를 따로따로 나누어주신다는 것입니다(1코린 12,8-11 참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는 감지될 수 있는 분이십니다. 체험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바로 공동체에 나누어진 다양한 은사들을 통해 그런 것이지요.

 

예를 들어 바오로 사도가 말하는 ‘믿음의 은사’를 생각해봅시다. 이 믿음의 은사는 마음속에만 숨겨진 채로 머물지 않습니다. 밖으로 빛을 발하지요. 온 존재를 다해 믿는 거룩한 사람에게서 교회는 빛을 발합니다. 그런 사람에게서 공동체는 빛나고, 그런 이들의 굳센 믿음의 길을 따라 우리 역시 걸을 수 있습니다.

 

성령의 다양한 은사들을 열거한 다음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유다인이든 그리스인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모두 한 성령 안에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습니다. 또 모두 한 성령을 받아 마셨습니다.”(1코린 12,13)

 

달리 말해, 그 모든 은사들을 넘어 공동체 자체가 성령의 보이는 기적이라는 뜻이지요. 교회 자체야말로 성령의 보이는 기적, 보고 체험할 수 있는 기적입니다.

 

위로자이신 성령

 

성령 강림 대축일의 모든 말씀이 한결같이, 성령은 감지될 수 있는 분이심을 말합니다. 사도행전의 말씀도, 코린토 1서의 말씀도, 요한 복음서의 말씀도 그러합니다. 이 점은 제2독서 다음에 이어지는 부속가인 ‘성령송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부속가는 중세에서 유래하는 아주 아름다운 찬미가인데, 중세기의 위대한 신학자 가운데 하나인 잉글랜드의 대주교 랭턴(Stephen Langton, 1150년경-1228년)이 지은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 ‘성령송가’에서도 성령은 우리 마음을 비추는 빛이시라고 노래합니다. 슬프고 외로울 때 위로를 주고, 지치고 힘들 때 휴식을 주는 분, 차디찬 것 데우고 굳은 것 풀어주고 메마른 것에 생기를 주는 분이시라고 노래하지요.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침투하시어 우리를 고쳐주시고 바로 세워주십니다. 우리가 한 번 경험하기만 하면 결코 잊을 수 없는 달콤함으로 우리 안에 남으십니다.

 

이 성령송가에서는 인간의 노력이나 영웅적인 업적에 대해서 말하지 않습니다. 열성적인 종교적 행위나 자기 극복과 고행에 대해서도, 도덕적인 성취나 윤리적인 재무장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습니다. 송가의 끝부분에서 신뢰에 대해 이야기할 따름입니다. 송가 전체가 어린이와 같은 청원이지요. 성령은 순전히 선물로 오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향해 우리의 두 손을 쳐들기만 하면 됩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6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주님의 기도’가 지닌 낯설음(Die Fremdheit des Vaterunsers)

 

 

주님의 기도보다 더 유명한 그리스도교 기도도 없겠지요. 수많은 이들이 이 기도를 바칩니다. 날마다 바치는 이들도 많고요. 주님의 기도는 이처럼 너무나 익숙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를 바치는 이들은 그 내용과 의미에 대해 아주 잘 안다고 믿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기도하는지 스스로 잘 이해하고 있다고 여기지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착각에 불과한 경우가 많습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주님의 기도는 모순적인 기도입니다. 그 자체로 당연하다고 할 수 없는 내용을 담고 있지요. 그 내용은 기본적으로 우리에게 낯설기까지 합니다. 이 낯설음을 넘어서야만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정말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을 통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결국 하느님 아버지를 향해 바치는 기도니까요.

 

형식의 낯설음

 

주님의 기도는 아주 짧습니다. 주님의 기도가 짧다는 점이야말로 아주 낯선 것이지요. 모든 종교에서 기도는 대개 길어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기도는 매우 간단합니다. 그 이유에 대해 누군가는 주님의 기도가 일종의 교육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을 펼 수도 있겠지요. 예수님은 다만 제자들이 바쳐야 하는 기도의 내용을 간단히 가르쳐주려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기도할 때 짧게 하라고 명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말을 많이 해야 그들의 신이 들어준다고 생각하며 빈말을 되풀이하는 다른 민족 사람들처럼 그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마태 6,7-8 참조). 당신을 따르는 이들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마태 6,32 참조).

 

주님의 기도가 순전히 청원의 기도라는 점도 우리에게는 낯선 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태오 복음서에서 주님의 기도는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13)라는 절박한 외침으로 끝납니다. 이러한 끝맺음이 이상하다고 여긴 나머지, 적어도 1세기 말엽에는 다음과 같은 찬미의 구절이 끝에 첨가되었습니다.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 후대에 덧붙여진 이러한 영광송의 구절은 물론 원형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가장 오래된 수사본에는 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어찌하여 주님의 기도는 순전히 청원의 기도로만 이루어진 것일까요? 당연히 예수님은 하느님께 드리는 탄원 외에 감사와 찬미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셨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당신의 선포 활동 처음부터 맞닥뜨린 불신이 하도 커서,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바쳐야 하는 기도는 무엇보다 먼저 간청의 기도일 수밖에 없었지요.

 

마지막으로, 전반부의 세 가지 청원의 형식도 매우 낯선 것입니다. 흔하지 않은 수동태의 형식이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우리 가운데 누가 일상에서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를테면 “방바닥이 깨끗해지기를!” 하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님의 기도 전반부에서 문법적으로 ‘간접 화법’을 사용하십니다. 곧 행동의 주체가 ‘누구’인지 열린 채로 두시지요. 하느님 몸소 당신 이름을 거룩하게 하실 수도 있고, 또 제자들이 그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 몸소 당신 나라를 오게 하실 수도 있고, 또 제자들이 그 나라를 오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몸소 세상에서 당신 뜻이 이루어지게 하실 수도 있고, 또 제자들이 그분의 뜻을 실현할 수도 있습니다.

 

내용의 낯설음 ? 전반부

 

1. 첫 번째 청원: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지금까지 주님의 기도가 지닌 형식적인 면을 살펴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내용 역시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것입니다. 곧 첫 번째 청원에서 곧바로 이런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다니, 도대체 무슨 뜻이지?”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입 밖에 내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하지만 이 첫 번째 청원이 고해성사의 옛 목록에 나오는 그런 의미에만 그칠 리는 없습니다.

 

고대 근동에서 ‘이름’은 그 사람의 품위를 나타냈습니다. 권위와 존엄성, 영예와 명성, 존경을 의미했지요. ‘어떤 사람의 이름을 삭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예를 영구히 박탈하고, 그렇게 하여 그 사람을 지워 없앤다는 뜻이었습니다(시편 109,13 참조). 하느님 백성이 비참한 상태에 빠지게 되면, 이는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부정하게 하고 훼손하는 일과 같았습니다. 이방 민족들이 하느님을 무시하고, “저들의 하느님이 어디 있느냐?”(시편 79,10; 115,2) 하며 조롱하는 일이 벌어지기 때문이지요.

 

‘하느님의 소유가 된 백성’(탈출 19,5-6 참조)은 하느님만이 홀로 주님이심을 자신의 삶을 통해 드러내 보여주어야 합니다. 만일 그러지 않을 때, 어떻게 하느님의 이름이 세상에서 드높여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에제키엘서 36장이 말하는 내용입니다. 주님의 기도 첫 번째 청원은 무엇보다 여기에 그 바탕을 두고 있지요. 에제키엘서 36장을 보면,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당신께서 몸소 그들을 다른 민족들에게서 다시 데려오고 모아들여 정결하게 해주시겠다고요. 그리되면, 민족들 사이에서 더렵혀진 당신의 이름이 다시 거룩하게 되고, 더 이상 조롱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에제 36,19-28 참조).

 

2. 두 번째 청원: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주님의 나라가 오기를 청하는 두 번째 청원 역시 우리에게 낯설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 나라’라는 말을 듣는 즉시 우리는 먼저 ‘하늘’을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이는 물론 ‘하늘나라’라고 표기한 마태오 복음서에도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대개 이를 잘못 이해하지만, ‘하늘나라’는 당시 ‘하느님 나라’나 ‘하느님의 다스림’과 동일한 의미였지요. 경건한 유다인이라면 ‘하느님’을 입에 올리지 않고, 그 대신에 ‘거룩하신 분’ 또는 ‘하늘’이라는 말을 사용한 이치와 같습니다.

 

때문에 주님의 나라가 오기를 청하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현재 우리의 삶에 아무 관련이 없는 일일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역사 전체,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낸 숱한 역경과 고통, 비참함과 관련됩니다. 이 모든 것을 멈추게 할 하느님의 다스림이 도래해야 합니다. 먼 미래가 아니라, 이미 지금, 이 시간 오늘 여기에!

 

3. 세 번째 청원: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청하는 세 번째 청원은 어떤가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이 청원을 개인적으로 받아들입니다. 곧 이 청원을 각자 자신의 삶과 연결시켜 하느님의 뜻을 묻고 그 뜻을 행할 힘을 주시라고 청합니다. 물론 이렇게 이해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도 겟세마니에서 하느님의 뜻과 씨름하십니다(루카 22,42 참조). 곧 정말로 당신이 예루살렘에 그대로 있어야 하는지, 피하는 게 더 나은 것은 아닌지, 계속 살아남아 이 위험한 예루살렘을 등지고 멀리 갈릴래아로 도주해 거기서 하느님 나라를 계속 선포하는 것이 오히려 하느님의 뜻은 아닌지 고뇌하십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개인적으로 이해한다고 해서 틀린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리되면 성경이 말하는, 우리에게는 낯선 그 핵심을 간과하기가 쉽습니다. 에페소서 1장 5-11절이나 이사야서 55장 6절에서 11절을 보십시오. 또는 성경 외에도 당시 유다인들의 신학을 보면, 하느님의 ‘뜻’은 역사에 대한 그분의 ‘계획’을 의미했습니다. 세상에 대해 그분이 원하시고 계획하고 작정하시는 바, 세상의 위대함과 아름다움을 통해 당신이 이루시려는 바, 오래전 이미 몸소 결심하신 바를 의미했지요. 그런데 하느님의 이 자유로운 뜻은 인간의 자유를 존중합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이 계획에 공감하게 될까요?

 

아무튼 전반부의 세 청원을 다양한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겠지만, 관심사는 모두 동일합니다. 곧 이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생각과 배려가 그것이지요. 인간에 대한 인간의 통치와는 전혀 다른 그분의 다스림이 이루어져야 합니다(두 번째 청원). 그분의 다스림으로 역사가 바뀌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넘어’ 그렇게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 백성은 세상에서 믿음과 거룩함의 장소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느님의 거룩한 이름을 민족들이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게 됩니다(첫 번째 청원). 그렇게 하여 영원으로부터 하느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그분의 계획이 실현되어야 합니다(세 번째 청원).

 

내용의 낯설음 ? 후반부

 

4. 네 번째 청원: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이제 후반부에서 주님의 기도는 비로소 인간에 대한 관심사로 옮겨갑니다. 전반부가 하느님의 계획과 배려에 관한 것이라면, 후반부는 인간의 근심과 걱정에 관한 것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할 점은, 그렇다고 이 후반부의 청원이 일반적인 인간사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모든 것이 우선적으로 제자들과 관련됩니다. 이는 네 번째 청원에서부터 곧바로 아주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이 네 번째 청원을 두고 오늘날 해석자들은 너무 성급하게 이를 보편적인 기도로 이해합니다. 곧 ‘굶주리는 민족들을 위한 도움’이나 ‘세계를 위한 빵’의 기도로 해석합니다. 물론 이는 호의적인 해석이지요. 하지만 주님의 기도는 제자들의 기도입니다(루카 11,1 참조). 후반부의 청원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제자들, 그리고 그들이 겪는 어려움과 관련이 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늘 길 위의 여정 가운데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이스라엘 전역을 떠도는 것이지요. 아침마다 그들은, 그날 밤은 어디에서 묵고 어디에 머리를 누이게 될지 알지 못합니다. 누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줄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니 그들에게는 ‘그날 하루를 위한 빵’을 청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당시 시간관념으로 하루는 저녁에 시작되었지요.

 

이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잠시 언어적인 설명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일용할 양식’이라는 표현은 루카 복음서 11장 3절에서 온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서에는 원래 ‘오늘’이라고 되어 있지요(마태 6,11). 따라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는 마태오 복음서와 루카 복음서의 표현을 결합한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일용할’을 의미하는 그리스어 에피우시오스(epousios)에 대한 해석입니다. 이 말은 주님의 기도 외에는 고대 문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단어인데, 아마도 ‘임박하다’ ‘이어지다’라는 그리스어 동사 에피에나이(epienai)에서 왔을 가능성이 큽니다. 만일 그렇다면 마태오 복음서 6장 11절은 이렇게 옮길 수 있겠지요. “당장 눈앞에 닥친 이 하루를 위한 빵을 오늘 저희에게 주소서!”

 

이런 해석이야말로 제자들이 놓인 상황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제자들은 계획을 세워서도 미리 대비해서도 안 됩니다. 비축해 놓은 것들을 늘 짊어지고 다녀서도 미래를 걱정해서도 안 됩니다. 그저 ‘오늘’만을 생각하면 됩니다(마태 6,34 참조). 제자들은 하늘의 아버지이신 아빠(abba)에게 신뢰를 두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제자들에게는 지상의 아버지를 대신하십니다. 그들은 ‘하늘의 새들’과 ‘들판의 나리꽃’마냥,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마태 6,25-34 참조).

 

물론 하늘의 아버지에 대한 이런 절대적 신뢰는 무책임하거나 비합리적인 방종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이러한 신뢰에는 견고한 토대가 있기 때문이지요. 바로 지역 어디에나 있는 예수님의 추종자들과 친구들, 동조자들이 그 토대입니다. 그들은 밤이면 제자들을 자신들의 집에 맞아들이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대접하는 이들이었지요(마태 10,11-13; 루카10,5-7; 마르 6,10 참조).

 

주님의 기도 네 번째 청원은 바로 ‘예수 운동’의 그러한 연대와 함께함을 전제합니다. 모두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고향과 가족을 떠난 제자들에게는 지역에 흩어져 있는 예수님의 추종자들이 ‘집’이고 ‘가족’입니다. 제자들에게는 그들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반대로 지역의 추종자들에게는 예수님과 제자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그 도움으로만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믿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처럼 네 번째 청원이 지닌 본래의 상황과 그 의미가 오늘날 우리에게는 얼마나 낯선 것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5. 다섯 번째 청원: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다섯 번째 청원도 비슷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도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자비와 화해가 일차적 관심사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형제자매다!”라는 인류애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제자들 안에서 그리고 제자들과 연결된 이들 안에서의 용서가 관건입니다. 늘 서로 얼굴을 맞대고 살아야 하고, 그래서 물러설 데가 없는 곳에서는 날마다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끊임없는 화해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6. 여섯 번째 청원: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아마도 주님의 기도는 본래 이 여섯 번째 청원에서 끝났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곱 번째 청원이라고 부르는 “악에서 구하소서!”는 마태오 복음서에서 추가되었지요. 하지만 교회도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하는 이 추가 부분이 예수님의 생각을 벗어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무튼 이 여섯 번째 청원이야말로 오늘날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이들에게 가장 낯선 부분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유혹을 당하도록 하시는 분일까요? 자주 즐겨 주님의 기도를 바치지만 이 여섯 번째 청원만은 잘 이해가 안 된다는 편지를 저는 자주 받습니다. 이 청원을 뒤집어보면, 하느님은 우리를 유혹할 수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지요. 그러니 차라리 이렇게 바꾸어 기도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습니다. “저희가 유혹에 빠져 있을 때, 저희를 인도하소서!”

 

이미 야고보 서간의 저자가 그러한 의문에 답변을 제시했습니다(야고 1,13-14 참조). 여섯 번째 청원의 배경을 이루는 구약성경의 사고가 당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이미 낯선 것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지요. 구약성경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시험하기도 하십니다. 그 사람의 믿음을 입증하게 하거나 강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시지요. 이를테면 하느님께서는 일찍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셨고(창세 22장 참조),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셨습니다(신명 8,2 참조).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들도 모두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고 단련해야 합니다(로마 5,3-5 참조). 하지만 그것이 너무 힘에 겹거나 넘어질 염려가 있는 이들에게는(1코린 10,13 참조) 하느님께서 그들을 시험에 들지 않게 해주시라고 청해야 하겠지요. 이것이 바로 여섯 번째 청원의 내용입니다.

 

낯설음에서 우리의 기도로

 

지금까지 주님의 기도가 지닌 낯설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우리는 이 낯설음을 적당히 무마하거나 별것 아닌 것으로 지나쳐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셨고, 우리는 먼저 제자들이 놓였던 그 상황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의 기도에 담긴 참된 의미가 우리에게 열릴 수 있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맨 처음의 상황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 수 있을까요? 저녁에 누군가 우리를 맞이해 주리라는 희망을 안고, 무덥고 메마른 열대의 땅들을 맨발로 떠돌아야 할까요? 도시마다 광장에 나아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공개적으로 목청껏 외쳐야 할까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아픈 이들과 나병 환자들을 고쳐주어야 할까요? 우리는 다른 환경, 다른 문화, 다른 시간에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공통점도 많습니다. 한번 우리 자신이 아니라 중국, 북한,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이란, 시리아, 소말리아, 수단, 이집트 등에 있는 그리스도교 형제자매들을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그들은 자주 커다란 위험을 겪습니다. 물론 그 때문에 서로를 필요로 하지요.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저마다 서로 도움이 되어야 하고, 서로 연대하지 않으면 안 되고, 믿음 안에서 서로가 버팀목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와 백성 사이의 차이나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그리스도인 사이의 구분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습니다. 박해와 차별을 받고, 그리스도 신앙과는 동떨어진 환경에서 살아야 하는 그런 곳에서는, 주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아주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가까운 미래에는 수많은 나라의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런 비슷한 상황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박해를 받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인 것에 무관심한 환경, 아니 예수님의 복음 자체가 아예 낯선 환경 속에서 살게 될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들은 지금과는 다르게, 자신의 믿음을 더욱 굳세게 지켜가야 할 뿐만 아니라, 주위 환경과는 더욱 차별화된 ‘삶의 형태’를 보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각 청원마다, 제자로서 주님을 따르는 일을 전제합니다. 당시 제자들은 역동적으로 확산되는 ‘예수 운동’ 한가운데 있었지요. 빵에 대한 청원이 이를 잘 보여줍니다. 용서에 대한 청원도 그렇고,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해주시라는 청원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이 여섯 번째 청원이 말하는 유혹은 보통의 일상적인 삶의 유혹이 아닙니다.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과 자신의 소명을 잃어버릴 위험에 관한 것이지요. 곧 자신이 받은 사명을 포기하고 세상에 무차별적으로 순응할 위험 말입니다.

 

주님의 기도 전반부의 청원도 일반적인 인간성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범세계적인 윤리나 성숙하고 모범적인 각 인격체의 형성에 관한 문제가 아니지요. 에제키엘서 36장 16-38절을 배경으로 놓고 보면, 모두 하느님 백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 하느님 백성은 세상 한가운데서 행동하시는 하느님 구원 활동의 도구입니다.

 

주님 이름의 영광과 그분 나라의 도래와 세상에 대한 그분의 계획은 성경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하느님 백성을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 백성이 하느님의 사랑과 정의와 자비의 거울이기 때문이지요.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주제를 새롭게 강조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본래 성경적인 이 주제에서 자꾸만 멀어지고 있습니다. 올바로 이해한다면, 주님의 기도는 ‘하느님 백성’ 망각 증상을 치유하고 우리를 다시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 백성의 본질로, 예수님에 대한 신앙으로 이끌어줄 것입니다. 달리 말해, 하느님의 다스림 아래 사는 삶의 모습으로 우리를 안내해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게 우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일까요? 미사에서 주님의 기도를 합송하기 직전에 말하듯이, 감히 ‘삼가’ 이 기도를 드려도 될까요? 여기서 우리는 너무 성급한 대답을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기도는 세상 모든 사람의 기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주님의 기도는 위험한 기도입니다. 이 기도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관심사였던 바로 그 문제와 직접적으로 부딪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관심사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 곧 세상의 변화였습니다. 온전히 하느님에게서 오고, 그러나 또 우리의 온전한 투신이 필요한 변화 말입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일은 예수님이 사셨던 그 동일한 뿌리에 따라 우리도 살아야함을 전제합니다.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이 그 뿌리지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일은 예수님이 원하셨던 바를 우리도 똑같이 원해야 함을 전제합니다. 하느님 백성이 모이고 일치하며 거룩하게 되는 것, 그래서 이 하느님 백성을 통해 세상도 변화되는 것, 바로 이것이 예수님이 원하신 바이지요.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일은 고립된 신앙이 아니라 서로 연대하는 가운데 함께하는 삶을 전제합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일은, 우리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이 사셨던 그 철저함으로 사는 것을, 아니 적어도 그 철저함을 갈망하며 사는 것을 전제합니다.

 

결국 하느님의 영광과 그분 나라의 도래가 우리 자신과 우리 삶의 중심이 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신뢰할 만한 하느님의 백성임이 증명될 때, 우리는 감히 주님의 기도를 바쳐도 됩니다. 그리고 그럴 때, 예수님이 당신 제자들에게 맡겨주신 이 기도가 우리에게도 참된 고향이 되겠지요.

 

주님의 기도에 부쳐

 

모든 것이 그저 이론에만 그치지 않도록, 저는 여기서 주님의 기도가 지닌 본래 의미, 곧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에서 흘러나온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어 쓰고자 합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희는 당신의 제자들입니다. 당신의 공동체, 당신의 교회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또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저희는 당신을 우리 아버지라 부릅니다. 아빠(abba), 사랑하는 아버지!

 

흩어지고 분열된 당신 백성을 모으소서. 그들이 참하느님 백성이 되게 하시고, 그리하여 온 세상에서 당신의 이름이 공경을 받게 하소서. 당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모으고 하나로 묶어 일치시킬 힘을 저희에게 주소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소서!

 

당신 나라, 당신의 다스림이 세상에 오게 하소서. 당신만이 홀로 저희 주님이시기를! 저희가 스스로 만들어낸 우상들을 저희는 더 이상 섬기지 않으렵니다. 저희가 당신 백성이 되어 참으로 인간답게 살 힘을 주소서. 폭력과 미움 없이 당신의 평화 속에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소서!

 

당신의 계획을 완성하소서. 영원으로부터 세상을 향해 당신이 품으셨던 그 계획을! 당신의 계획이 하늘에서 땅 위로, 당신 마음에서 저희 마음으로 흐르게 하소서. 저희 공동체가 세상을 위한 당신의 도구, 당신의 성사가 될 힘을 주소서.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

 

당신은 사랑하는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니 저희에게 오늘, 이 하루만큼은 꼭 필요한 것을 주소서. 저희의 으뜸가는 관심사는 당신 나라이고, 다른 모든 것보다 그것이 저희에게 더 중요한 것이 되어야 합니다. 당신 나라를 증거하는 일이 온통 저희를 사로잡고, 그리하여 저희가 미리 준비하거나 늘 저희 자신만을 생각할 여유마저도 없어야 합니다. 서로 돕고 서로 배려할 힘을 주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소서!

 

저희는 당신에게 진 빚을, 그리고 늘 그대로 남아 있을 그 빚을 결코 갚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데에 저희는 늘 부족합니다. 그러니 저희의 모든 빚을 없애주소서. 저희 또한 형제자매가 저희에게 빚진 것을 모두 없애주지 않는다면, 감히 당신께 그런 청을 드릴 수 없음을 잘 압니다.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소서!

 

저희의 가련한 이 역사 한가운데로 당신 나라가 임해야 합니다. 때문에 이를 거슬러 저희에게 유혹이 닥칩니다.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갈 유혹, 주님을 따르는 저희의 길과 소명을 포기할 유혹, 당신 교회에 실망하고 세상을 향한 당신의 계획을 더 이상 믿지 않을 유혹이 닥칩니다.

 

그러한 유혹에 저희가 넘어가는 일이 없도록, 저희를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유혹에 굴하지 않게 하시고, 악의 치명적인 사슬에서 저희를 풀어 주소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이렇게 풀어 쓴 기도가 물론 주님의 기도를 대체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훨씬 더 낫습니다. 사실 많은 말이 필요 없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짧고 명료합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여러 말을 할 필요가 없지요. 그분께서는 우리가 청하기도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 아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시고 교회가 전해준 대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날마다 바쳐야 합니다. 천천히, 깊이 새기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값진 보물마냥 주님의 기도를 잘 간직해야 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우리를 그리스도인 삶의 핵심으로 안내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주님의 기도는 우리에게 예수님이 정말 누구신지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마음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07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

물 위를 걷다(Auf dem Wasser gehen)

 

 

복음서들이 2000여 년 전에 일어난 과거의 일만을 우리에게 들려준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복음서가 전해주는 사건들은 현재의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지요. 세기를 지나며 해마다 또 날마다, 과거의 사건이 새롭게 일어납니다. 다시 살아 숨 쉬고, 새롭게 펼쳐지며, 믿는 이들에게 위로와 힘을 줍니다.

 

우리의 현실은 자주 고통스럽고 힘에 겹습니다. 믿음도 끊임없이 흔들리지요. 하느님의 능력과 권능을 의심하며 우리는 작아집니다. 나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는다면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불안 때문에 의기소침해지기도 하고요.

 

내면에서만 우리 믿음이 위협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외부의 요인 때문에도 우리 믿음은 흔들리고 위협을 당합니다. 곧 그리스도 신앙을 증오하는 적대자들 때문에, 또 무엇보다 ‘안다는 이들’의 냉소적인 비웃음 때문에 우리 믿음이 위협을 받습니다. 그들은 우리 믿음을 순진하고 유아적이며, 이미 오래전에 만료된 것으로 치부합니다.

 

호수 위의 밤

 

이처럼 끊임없이 우리 믿음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을 복음서들은 여러 비유와 표상들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그러한 비유와 표상들은 많은 경우, 외적인 사실들이 보여주는 것보다 훨씬 더 실제적인 진실을 말해줍니다. 물론 그렇다고 성경의 비유와 표상들이 역사적으로 실제 일어난 사건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무튼 복음서가 전하는 이야기를, 그것이 정말로 당시에 그런 식으로 실제 일어난 일인지 아닌지 하는 것만을 묻고 따진다면, 이는 온당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당시 역사적으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묻는 데서 더 나아가, 무엇보다 이 옛이야기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지 물어야 합니다. 오늘날 그 이야기를 읽고 듣는 우리에게 무슨 말을 건네는지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럴 때만 그 이야기들은 우리에게도 역사가 됩니다. 바로 그럴 때만 옛 사건이 우리 한가운데서도 살아 있는 현실이 됩니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마태오 복음서 14장 22-33절이 전하는 이야기를 살펴봅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배를 타고 겐네사렛 호수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이미 날이 저물었지요. 한밤중이었습니다. 그들은 깊이를 알 수 없는 깊은 호수 한가운데 있습니다. 온통 물밖에는 보이지 않지요. 도달하려는 목적지에 그들은 이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나운 맞바람이 불어 배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이 모든 것이 말하자면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이라면 누구에게나 닥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요. 맞바람과 어둔 밤, 마구 흔들어대는 파도 말입니다.

 

복음서는 이처럼 우리 믿음이 위협을 당하는 상황을 다양한 표상들을 동원해 아주 선명하게 묘사합니다. 우리의 불안과 안팎에서 우리 믿음을 위협하는 어두움과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의 역풍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것으로 끝이 아니지요. 복음서는 또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곧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을 뿔뿔이 따로 보내시며 각자가 다른 목적지를 향해 가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한 배에 태워 함께 보내셨지요. 이 배는 공동의 협력과 우정을 상징하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공동의 협력과 우정이라 해도 그것이 금세 바닥을 드러내기 일쑤지요. 함께 쌓아올린 공통의 목표와 공감도 쉽사리 소진되기 마련입니다. 서로의 연대보다 대개는 개인의 이기주의가 훨씬 더 강력하지요.

 

예수님의 현존

 

한밤중 어둠 속에서 제자들이 탄 배를 지켜준 것은 예수님의 현존이었습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지요. 교회를 교회답게 만들어주는 것은 예수님의 현존이라고요. 그분은 신비한 방식으로 당신 제자들 가운데 계십니다. 곧 그분께서는 제자들과 떨어져 멀리 산에서 기도하시지만, 바로 이렇게 하느님 아버지와 함께 계심으로써, 그분은 온전히 당신 제자들 곁에 계십니다. ‘아버지와 함께 계시던’ 그분께서 동이 터오는 ‘새벽녘에’ 제자들에게로 오십니다. 그분이 바로 제자들을 돕고 구원할 분이십니다.

 

그분은 물 위를 걸어오십니다. 아무것도 그분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습니다. 깊은 물속의 암흑도 그분에게는 힘을 쓰지 못합니다. 그분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분은 하늘의 아버지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분,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일치하는 분이시기 때문이지요.

 

그런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에게도 늘 거듭 다가오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해도 좋습니다. 그분은 우리에게도 당신 자신을 알려주시고, 우리에게도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곧 당신 몸의 지체인 교회 안에서, 믿는 이들의 모임에서, 성사들을 통해 그렇게 하십니다.

 

안타까운 일은 다만 이것이지요. 곧 그분께서 우리에게 오실 때, 우리는 대개 그분을 전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다른 일에 온통 사로잡혀 있어서, 그분의 오심을 전혀 눈치채지 못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겁에 질려 ‘유령이다!’ 하며 두려워 소리를 질러 댔다.”(마태 14,26)

 

제자들의 그런 반응이 바로 우리의 반응이기도 하지요. 주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네는 이들을 통해 하느님은 우리를 도우러 오십니다. 당신께서 파견하신 이들을 통해 그분은 우리에게 다가오십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도움의 손길을 전혀 감지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반대로, 두려움 속에서 그 모든 것을 유령 따위로 치부해버리고 맙니다. 우리 자신의 독립성과 자유, 우리 자신의 자존성을 위협하는 것으로 간주합니다. 나 자신에 대한 염려로 두려움에 빠지고, 결국은 실상을 왜곡하여 거기서 유령을 만들어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다면, 제자들은 두려움에서 영영 헤어나지 못했을 테지요.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마태 14,27) 예수님의 이 말씀 이후에야 제자들은 불신에서 벗어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제자들의 눈에서 너울이 벗겨집니다. 제자들은 비로소, 그들이 보고 있는 것이 유령이나 허깨비가 아니라 바로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베드로의 용기와 두려움

 

마태오는 물 위를 걸으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하며 여기에 또 하나의 사건을 덧붙입니다. 이 사건에 대한 이야기는 병행 구절을 이루는 마르코 복음서나 요한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습니다(마르 6,45-52; 요한 6,16-21 참조). 곧 마태오 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만이 아니라 베드로도 물 위를 걷습니다. 물 위를 걸어 자신들이 탄 배로 가까이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본 베드로가 이렇게 말하지요.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마태 14,28)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너라.”(마태 14,29)

 

베드로가 물 위를 걷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의 바람을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요. 자유롭게 날고 싶은 욕망 말입니다. 우리 역시 그러한 갈망을 가지고 있어서, 밤에 새처럼 나는 꿈을 꾸기도 합니다. 하늘 높이 자유롭게 나는 것이나 물 위를 걷는 것이나 모두 같은 갈망이지요. 어디든 원하는 대로 자유롭게 갈 수 있는 그런 자유에 대한 갈망이 우리 내부에도 깊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식의 해석은 성경 본문의 실제 의미에는 들어맞지 않는 설명입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시몬 베드로인 점이 그저 우연에 불과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매번 그렇듯이 베드로는 이번에도 앞에 나섭니다. 그러고는 실패하지요. 하지만 예수님께서 그를 붙들어주십니다.

 

사실 베드로가 걸은 소명의 길이 온통 그렇지 않았나요? 예수님은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종말론적 이스라엘을 건설하고자 하십니다(마태 16,18-19 참조).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을 배반하지요(마태 26,69-75 참조). 그런 베드로를 예수님은 용서하십니다(요한 21,15-19 참조).

 

물 위를 걸으려는 베드로는 바로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 자신도 온전히 있고 싶어 하는 제자입니다. 스승과 일치하고, 그분 품에 자신을 의탁하고, 그분이 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똑같이 하고 싶어 하는 제자이지요. 물 위를 걸어 예수님에게 가는 시몬 베드로의 모습은 온전히 그분과 함께하려는 열망의 표현입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습은 아니지만, 그 역시 ‘주님을 따르는 일’ 외에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이제 이 이야기가 우리에게 말해주는 바는 바로 이것입니다. 곧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이는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런 이는 물 위에서도, 바닥이 없는 곳에서도 가라앉지 않습니다. 세상의 혼돈도, 공허한 무의미의 심연도 그를 집어삼키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발아래 확실한 버팀목이 존재합니다. 물론 시몬 베드로의 이 이야기는, 주님을 따르는 일이 그저 심심풀이 놀이가 아니라는 사실도 분명하게 알려줍니다. 따름은 굳건한 믿음을 전제합니다. 믿음을 잃고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 우리는 베드로처럼 물속으로 빠져들고 말겠지요. 아무것도 우리를 더 이상 지탱해주지 않을 것입니다(마태 14,30 참조).

 

하지만 모든 유혹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믿음 안에 굳건하고 충실하게 머무른다면, 믿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믿는 이는 물 위를 달리고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자유는 지극히 인간적인 갈망들에서 나오는 자유와는 다른 것이지요. 믿음에서 오는 자유는 자기 자신에게서 자유로워질 때 가능합니다. 내 뜻과는 다르더라도 바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데서, 충실하신 그분의 약속에 귀 기울이는 데서 생겨납니다.

 

체험과 고백

 

이야기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갑니다. 곧 예수님은 당신 손을 내밀어 베드로를 붙잡아주십니다. 이제 예수님과 베드로는 배에 오릅니다. 그런 뒤에 바람이 그칩니다. “그러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이 그분께 엎드려 절하며, ‘스승님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마태 14,33) 하고 말하지요. 이 고백을 보면, 이 이야기에는 두 종류의 체험이 서로 얽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제자들이 ‘지상의 예수님’과 겪은 체험이지요. 이는 예수님의 부활 이전의 체험입니다. 이 체험에 따르면, 생전의 예수님은 이미 하느님의 현존 자체이셨습니다. 그분의 현존에서 제자들은 구원과 도움을 체험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로, 마태오 복음서와 그 밖의 다른 복음서들이 전하는 이 이야기에는 이미 ‘교회’의 체험도 반영되어 있습니다. 부활 이전 예수님의 지상 여정에서 겪은 구원에 대한 체험 이야기가 부활 이후 초대 교회에서도 새로운 방식으로 계속 이어지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그 체험은 당연히 믿음의 언어로 표현되고 표출됩니다. 자신의 삶을 온통 떠받치고 있는 체험에 대한 ‘언어적 표현들’이 계속 쌓일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후대의 우리 역시 이 체험들 속으로 들어설 수 있습니다. 나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와 온 교회 안에서 예수님이 늘 다시 혼돈을 몰아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 역시 똑같이, 새벽녘 겐네사렛 호수 위의 제자들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 게르하르트 로핑크(Gerhard Lohfink) - 세계적인 성서학자이자 사제로,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약성서 주석학 교수로 재직하였고 현재 가톨릭통합공동체(katholische Intergrierte)에서 복음 정신에 따라 살며 연구와 집필에 몰두하고 있다. 국내 출간된 저서로는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예수마음코칭』 외 다수가 있다.

 

* 번역 : 김혁태 - 전주교구 소속 사제로 독일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그리스도론을 가르치고 있다.

 

* 로핑크 신부의 바이블 인사이트(Bible Insight) : 저명한 성서학자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가 매월 『생활성서』 독자들을 위해 나아가 한국의 신앙인들에게 보내는 연재 글로, 성경 안에서 길어낸 신앙과 삶에 대한 아름다운 통찰을 만나실 수 있습니다. (편집자 주)

 

[생활성서, 2017년 8월호, 게르하르트 로핑크 신부, 김혁태 신부 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