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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 요한묵시록을 읽기가 두렵나요?
여러분은 요한묵시록을 떠올리면 어떤 생각부터 드시나요? ‘무섭다’, ‘두렵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그도 그럴 것이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알려주신 계시’(묵시 1,1)가 요한묵시록인데, 그 계시의 내용이 마치 재앙처럼 묘사되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봉인을 일곱 차례 뜯는 장면이 나오는 6장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살해하고 평화가 사라지며(4절), 흉년과 굶주림과 흑사병 등이 일어납니다(6-8절). 또 일곱 번의 나팔을 부는 8장에서는 우박과 불이 땅에 떨어지고(7절), 바다의 삼분의 일이 피가 되며, 강들에 독성이 퍼져 그것을 마시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일 등이 벌어집니다(8-11절). 12장에서는 사탄이라고도 불리는 용이 나타나서 영인을 괴롭히는 내용이, 13장에서는 두 짐승이 나타나서 신앙인들을 박해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16장에서는 하늘에서 일곱 대접을 땅에 쏟는데, 이때에도 우주적인 재앙이 벌어집니다. 이와 같이 무서운 심판과도 같은 일들을 묘사하고 있고, 또 그 이들이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것이라고 하니 두려운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요한묵시록은 우리에게 공포심을 안겨주기 위해 쓴 책이 아닙니다. 요한묵시록 전체에서 ‘행복합니다(makarios)’라는 말이 일곱 번 나오는 것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습니다(1,3; 14,13; 16,15; 19,9; 20,6; 22,7; 22,14). 성경에서 일곱이라는 숫자는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그러니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이 책이 ‘재앙의 책’이 아니라 축복으로 가득한 ‘행복의 책’임을 분명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묵시록의 내용 자체가 전반적으로 재앙을 묘사하고 있는 것일까요?
어둠 속에 살아가는 것이 익숙한 박쥐에게 있어서는 빛이 재앙이 됩니다. 그러나 햇빛을 따라 살아가는 해바라기에게 있어 그 빛은 축복이 됩니다. 이를 요한묵시록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축복이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맞서 대적하려는 이들에게는 이 책의 내용이 심판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이는 마치 에덴동산에서 죄를 지었던 아담의 반응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그는 죄를 지은 이후에 하느님께서 저녁 산들바람 속에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였습니다(창세 3,8). 그가 죄를 짓지 않았다면 그 소리는 그에게 반가운 소리였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충실히 믿고 따르려는 마음만 있다면 요한묵시록을 두고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 한재호 루카 신부 - ‘요한묵시록 둘러보기’를 연재하는 한재호 루카 신부는 로마 교황청립 우르바노대학에서 성서신학을 전공하고 현재 광주가톨릭대학교 교수로 재임하고 있다.
[2017년 7월 2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 경축이동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2) 요한묵시록은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다룬 것일까요?
요한묵시록을 잘못 해석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오류가 요한묵시록에 나와 있는 내용들을 이 세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과 자구적으로, 혹은 비유적으로 연관 짓는 해석입니다. 이러한 해석을 학자들은 ‘역사주의적 해석(Historicist View’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13장 18절에 보면 ‘육백육십육(666)’이란 숫자가 나오는데, 13장에 등장하는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을 가리키는 표시입니다. 요한묵시록에서 ‘666’의 숫자로 상징되는 짐승은 다음과 같이 묘사되었습니다. 권력과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하느님을 모독하고 신앙인들을 박해합니다. 또 자신의 상을 만들어 그 상에 경배하게 합니다. 이 ‘666’의 짐승을 두고도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데, 특히 종교개혁 시대에 나온 역사적 해석이 대표적입니다. 개신교인 프로테스탄트 측에서는 ‘이탈리아 교회 교황’이란 뜻의 ‘이탈리케 에클레시아 파파이코스’라는 그리스어를 숫자로 풀면 666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가톨릭교회를 악의 세력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가톨릭의 일부 학자들은 그 반대입니다. 오히려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를 ‘666’이라고 지목합니다. 왜냐하면 루터를 가리키는 그리스어 ‘루테라나’를 숫자로 풀면 666이기 때문입니다.
20세기에 들어서도 역사적 해석은 계속되었습니다. 1980년대 미국과 중동이 한창 긴장 관계에 있을 무렵 다이어라는 사람은 ‘바빌론’을 사담 후세인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또 냉전 시대였던 1970년대에 린세이라는 사람은 바다의 짐승과 예수 그리스도의 전투를 가리키는 ‘하르마게돈 전투’(16,16)를 소련과의 핵전쟁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20세기 초의 러셀이라는 사람은 묵시록의 심판과 전쟁을 1차 세계 대전, 2차 세계 대전 등과 연결시켜 종말이 온다고 주장했었습니다. 이것이 큰 반향을 일으켜 러셀의 종교가 크게 성장하게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천지교라는 사이비 종교가 나왔는데, 신천지교의 교주인 이만희 씨는 자신에게 벌어진 여러 일들을 묵시록의 여러 내용에 빗대어서 자신을 통해 종말의 시대가 왔다고 주장합니다.
이와 같은 해석은 글자 그대로를 역사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끼워 맞추는 것으로서 성경을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2017년 7월 9일 연중 제14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3) 요한묵시록은 미래에 실제로 벌어질 이야기를 다룬 것일까요?
요한묵시록의 저자인 파트모스의 요한은 자신의 책을 두고 ‘예언의 말씀’(1,3)이라고 합니다. ‘예언’이라는 말은 사전적으로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때에는 한자로 ‘미리 예(豫)’와 ‘말씀 언(言)’을 사용합니다. 둘째는 ‘하느님께서 맡기신 말씀을 전하는 것’을 뜻하는데, 이때는 한자로 ‘맡길 예(預)’와 ‘말씀 언(言)’을 사용합니다. 성경에서 사용되는 예언은 두 번째 의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예언자에게 맡기신 말씀을 예언자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적절한 때와 장소에서 선포하는 행위가 예언인 것입니다. 그래서 구약의 예언서를 보면 이스라엘 탈출, 세상 창조 등의 과거 이야기도 나오고, 예언자 시대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의 이야기도 나오며, 이스라엘 백성에게 벌어질 미래 이야기도 나옵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도 성경에서 말하는 예언이 먼 미래에 관해 ‘예측’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예언”을 미래에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주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래서 요한묵시록이 머나먼 미래에 벌어질 일이고 그 미래가 다가오면 요한묵시록에서 묘사하는 여러 사건들이 실제로 벌어질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러한 해석을 ‘미래주의적 해석(Futurist View’라고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 요한묵시록은 먼 미래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사람들이 궁금하게 여기고 있는 것들을 알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채워주기 위해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회개를 하고 믿음을 굳건히 하여 구원받을 수 있기를 바라시며 말씀하십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레사케라는 신학자는 이렇게 말을 합니다. “성경은 종말에 관해서 상징적으로 언급한다는 사실을 오늘날 성서학계에서는 밝혀냈다. 성경은 최종 미래를 미리 알고 알리는 점쟁이가 아니다. 종말에 관한 말은 시간상으로 역사의 종말에 관해서 정보를 제공한다고 할 수 없다. 종말 언사는 현실적인 체험에서 나온 것이니, 곧 현재의 체험을 최종 미래에로 투사한 것이다.” 이 말을 쉽게 표현하면 요한묵시록 역시 상징적인 여러 표현을 통해 오늘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017년 7월 16일 연중 제15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4) 성경을 해석하는 것과 다른 책을 해석하는 데에는 차이가 있을까요?
앞서 2주 동안 우리는 요한묵시록의 잘못된 해석 곧 ‘역사주의적 해석’과 ‘미래주의적 해석’에 대해서 보았습니다. 이러한 오류가 나오는 것은 성경에 대한 근본적 이해 자체가 잘못된 데에서 비롯합니다. 이를 다음의 예를 들어서 보겠습니다.
과학 보고서, 연애편지, 소설책, 광고들 이렇게 네 종류의 책이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리고 ‘안경’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이 네 권의 책에서 각각 다룬다고 생각해 봅시다. 책마다 다루는 내용과 방식이 다를 것입니다. 먼저 과학 보고서에서는 안경의 소재를 연구하면서 보다 가볍고도 효과적인 것을 개발하는 데 초점을 둘 것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데이터나 실험 자료 등을 쓸 것입니다. 연애편지에서는 어떤 내용이 나오겠습니까? ‘당신은 제게 마치 안경과도 같군요. 당신을 알고 난 뒤 저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달라졌어요.’라는 식의 표현이 나올 것입니다. 소설에서는 줄거리 안에서 그 안경이 차지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가령 ‘아버지는 뿔테 안경을 항상 쓰셨다. 그런데 어느 날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뿔테 안경은 나에게 유산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안경테가 부러졌는데 부러진 테 사이로 조그만 쪽지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의 고향을 그린 지도였는데, 어떤 보물이 있는 곳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뭐 이런 식일 것입니다. 광고문도 생각해 봅시다. 광고하고자 하는 안경이 얼마나 좋은 것이고 편한 것이고 그 안경을 끼면 얼마나 멋져 보이는지를 알리는 내용일 것입니다.
그런데 연애편지에 과학 보고서의 글을 썼다면 연애편지를 받는 사람은 얼마나 황당하겠습니까? 또한 소설책에 안경에 대한 광고문이 들어갔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어떤 독자도 그런 소설책을 읽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똑같은 안경이라는 단어도 어느 책에 쓰여 있느냐에 따라서 우리가 기대하는 바가 다릅니다. 소설은 소설의 문학적 특징이, 시는 시적 특징이, 과학 보고서는 과학 보고서의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특징을 이해하지 않고 읽는다면 이해도, 감동도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은 어떠합니까? 성경은 이야기체, 시적 구조의 글, 지혜문학, 역사서, 편지 등 다양한 문학 형태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을 다양하게 이해해야만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이해 안에서 요한묵시록에 대해 말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 주에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7년 7월 23일 연중 제16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5) 요한 묵시록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요한묵시록에 대해 학자들이 제안하는 가장 올바른 해석은 ‘역사비평방법론’에 따라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을 좀 더 쉽게 설명하기 위해 예를 하나 들도록 하겠습니다.
2002년 월드컵 경기가 우리나라에서 개최되었을 때 이런 신문 기사 제목이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2002년 6월, 한반도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붉은 악마가 되어 열 한 명의 태극전사를 위해 거리를 가득 메웠다.” 이 말을 들으면 우리 모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당장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하는 축구 선수를 위해 한국 축구 대표팀의 유니폼과 같은 색깔인 붉은 색 옷을 입고 거리에 나와 열정적으로 응원하며 온 국민이 하나가 된 것을 말해 주는 신문 기사 내용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문 기사를 300년 후에 그러니까 2320년경 어느 미국 사람이 읽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 사람도 우리처럼 이 표현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요? 열 한 명의 태극 전사라는 표현부터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붉은 악마가 되었고, 그 악마들이 거리를 가득 메웠다는 표현까지 전부 다 수수께끼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2002년 한반도에서 벌어진 역사적 상황을 알고 있지 않다면, 또 이 표현 방식들이 지닌 문학적 기법들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는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읽게 될 요한 묵시록이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묵시록 안에는 우리가 평소에 즐겨 쓰는 단어, 표현 방식들보다는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표현 방식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들입니다. 또한 그 표현방식들은 구약 성경과 당시의 신화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비유나 상징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하여 이 책을 해석하자는 것이 역사비평방법론에 따른 해석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해석에 맞추어서 보았을 때 요한묵시록이 표현하는 독특한 문학유형을 두고 ‘묵시문학’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역사비평방법론에서는 묵시문학이라는 특성을 고려하며 요한묵시록을 해석하게 됩니다.
[2017년 7월 30일 연중 제17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6) 묵시문학과 묵시주의
지난달 우리는 요한묵시록을 역사비평방법론에 따라 해석해야 하고 묵시문학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이번 달부터는 묵시문학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요한묵시록은 다음과 같이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apokalypsis),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반드시 일어날 일들을 당신 종들에게 보여 주시려고 그리스도께 알리셨고, 그리스도께서 당신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 종 요한에게 알려 주신 계시입니다.”(1,1) 이 구절에서 ‘계시(revelation)’라는 말이 나오는데, 성경 원어인 그리스말을 그대로 직역하자면 ‘묵시(apocalype)’입니다. 그렇습니다. 요한묵시록은 성경에 나온 가장 전형적인 묵시문학인 것입니다.
묵시문학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묵시주의를 알아야 합니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이후 이스라엘 백성은 평탄하지 않은 역사를 겪게 됩니다. 특히 기원전 2세기 시리아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기원전 176-164년) 때의 박해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참담함을 안겨 주었습니다. 마치 세상이 끝날 것만 같은 절망을 느꼈고, 그것은 신앙으로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그래서 사람들 안에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질문이 나오게 됩니다. “지상의 권력 앞에서 하느님은 왜 이토록 무력하시기만 한 것일까?”, “과연 우리의 운명은 이대로 사라지는 것인가?”, “하느님은 악을 보고도 왜 모른 체하시고, 믿음을 지키는 이들을 보호하시지 못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등장한 사회 종교적 이념이 묵시주의입니다. 그리고 이런 묵시주의를 표방한 문학유형이 바로 묵시문학입니다. 요한묵시록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1세기 말 로마제국의 박해 안에서 신앙인들은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이에 대해 응답한 책이 바로 요한묵시록인 것입니다.
이렇게 보았을 때 요한묵시록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던져주는 의미가 상당히 큽니다. 돈과 권력이 지배하는 듯 보이는 오늘날 세계 속에서 수많은 신앙인들이 유혹에 걸려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무력하게 보이시는 하느님, 악이 자행되는 상황을 보고도 모른 체하시는 것만 같은 하느님을 항구하게 믿기란 쉽지 않습니다. 요한묵시록 안에 담긴 묵시주의적 메시지는 이런 우리에게 신앙의 새로운 눈과 결단력 있는 용기를 지니게 합니다. 그 메시지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음 주부터 보도록 하겠습니다.
[2017년 8월 13일 연중 제19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7) 묵시주의적 메시지
묵시문학이 담고 있는 신학적 메시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세상을 살다 보면 하느님께서 무력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관점이다. 둘째,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관점과는 다르게 세상과 역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그래서 지금 당장에는 고난과 죽음의 연속이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지상의 권력도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고, 따라서 박해도 사라지게 될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셋째, 하느님께서 지니신 관점 안에서 세상과 역사를 보면 그분이야말로 참된 주권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결정적인 때에 하느님께서는 이를 드러내실 것이고 그때가 바로 역사의 종말이 오는 때다. 물론 그때가 언제인지는 모른다. 다만 확실한 것은 주권이 하느님께 있기에 현실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새롭게 해야 한다.
이를 좀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보겠습니다. 말기 환자들을 돌보는 호스피스 간병인으로 일했던 브로니 웨어라는 사람은 죽어가는 사람들의 후회를 지켜보며 삶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이 남긴 교훈을 블로그에 올렸고 이를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죽을 때 가장 후회하는 5가지>를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1.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원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2.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지 않았더라면, 3. 내 감정을 표현할 용기가 있었더라면, 4. 친구들과 계속 연락하고 지냈더라면, 5. 나 자신에게 더 많은 행복을 허락했더라면…. 이렇게 죽을 때가 되면 살아가면서 무엇이 보다 소중한 가치이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를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건강하게 살고 있는 우리의 삶을 비추어 본다면 어떨까요? 아마도 가정의 화목을 위해 돈을 버는 것이지 돈을 벌기 위해 가정의 화목을 깨뜨리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자녀의 행복을 위해 자녀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는 것이지, 부모로서 창피를 당하지 않기 위해 자녀에게 공부하라고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전부처럼 느껴지는 것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않고 그보다 높은 가치를 소중하게 대하는 현명함을 지니게 될 것입니다.
이렇듯 미래에 대한 더 큰 통찰이 있을 때 현재를 살아가는 태도가 달라지는 것처럼 묵시주의는 하느님의 관점으로, 역사의 마지막이라는 시점으로 현재를 바라보도록 우리를 초대합니다. 그러한 초대에 우리가 진지하게 임할 때 우리는 현재를 살아가는 신앙적 자세를 보다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17년 8월 20일 연중 제20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8) 묵시묵학의 표현과 줄거리
묵시문학은 묵시주의를 일상적인 언어로 표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뜻은 일상적인 언어로 담을 수 있을 만큼 평범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매우 수수께끼와 같은 표현들을 사용하는데, 그 표현들은 고대 근동의 여러 창조 신화, 그리스-로마 신화, 여러 성경적인 표현들을 이용하여 만들어집니다. 그리하여 지난달에 예를 들었던 것처럼, ‘2002년 6월, 한반도에는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붉은 악마가 되어 열 한 명의 태극전사를 위해 거리를 가득 메웠다.“ 등과 같은 독특한 이미지를 형성합니다.
또한 묵시문학의 줄거리는 하나의 판타지 영화와도 비슷합니다. 줄거리 자체가 실제로 벌어질 일이 아니라, 하나의 가상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이는 묵시문학의 여러 표현들이 다양한 신화적인 이미지, 성경의 이미지를 활용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묵시록의 이야기를 단순히 허구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묵시주의적 메시지만큼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시는 구원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판타지 영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혹성탈출, 스타워즈, 아바타와 같은 영화는 기이한 동물들이 등장하고 우주를 배경으로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영화를 그냥 재밋거리로만 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거기에서 나오는 여러 메시지들에 귀를 기울입니다. 허구에서 나온 이야기라고 그 이야기로부터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허투루 듣지 않는 것입니다. 묵시문학, 특히 우리가 보는 요한묵시록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묵시록이 가상의 이야기라고 그냥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나오는 메시지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 어떠한 분별을 해야 하고, 무엇을 참고 견뎌야 하며, 무엇에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이상으로 묵시문학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내용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하며 콜린스(J.J. Collins)라는 학자가 내린 묵시문학에 대한 정의를 소개합니다. “묵시문학이란 서술적 틀(narrative framework)을 지닌 계시문학의 한 장르이다. 여기서 계시는 다른 세계의 중재자를 통해서 인간 수령자에게 전달되며, 종말론적 구원을 묘사하고 초월적인 세계를 다룬다.” 여기서 말하는 서술적 틀은 방금 소개한 판타지 영화와 같은 줄거리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세계는 인간의 관점을 넘어선 초월적 세계를 말하는 것인데, 묵시문학은 이를 여러 신화와 성경적인 상징들을 이용하여 독특한 이미지로 표현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이러한 독특한 표현방식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2017년 8월 27일 연중 제21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9) 요한묵시록의 독특한 표현 (1)
이번 주부터 우리는 묵시문학으로서의 요한묵시록이 지닌 독특한 표현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오감을 자극한다는 점입니다. 가령 예수님을 두고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시며, 머리와 머리털은 흰 양털처럼 또 눈처럼 희고 눈은 불꽃 같다.’고 소개합니다(1,13-14). 얼마나 시각적입니까? 이런 시각적 이미지는 하나하나 예수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말해주는 상징입니다. 긴 옷과 가슴에 금 띠를 두르고 계신다는 것은 그분이 영원한 대사제이시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탈출 28,4 참조), 양털과 눈처럼 흰 머리와 머리털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분이 영원하신 분이라는 것을 뜻합니다(다니 7,9 참조). 불꽃 같은 눈과 놋쇠와 같은 발은 세상을 심판하시고, 악으로부터 우리를 정화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말합니다(신명 4,24; 다니 10,6 참조). 이처럼 시각적인 자극을 주면서 각각의 이미지를 통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려 줍니다. 이런 시각적인 표현은 묵시록 전체를 덮고 있습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밤낮 쉬지 않고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를 외치고 있는 네 생물(4,8), 어린양을 두고 노래를 부르는 스물네 원로(5,9), 일곱 번의 나팔소리(8-11장),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과 지진(11,19) 등 청각적인 요소들도 많습니다. 후각적인 자극도 있습니다. 향이 가득 담긴 금 대접(5,8), 하느님 앞으로 피어오르는 향 연기(8,4) 등 천상에서는 온갖 향으로 가득하며, 로마를 상징하는 대탕녀 바빌론의 금잔에는 성도들의 피가 가득하여 피 냄새가 진동합니다(17,6). 미각적인 것을 보자면, 사람들이 쓴 흰쑥을 먹는다는 표현(8,11), 파트모스의 요한이 작은 두루마리를 먹자 입에서는 달지만 배가 쓰리다는 표현(10,10), 땅의 주민들이 대탕녀 바빌론이 주는 불륜의 술에 취해있다는 표현(17,2) 등이 있습니다. 촉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타고 있는 횃불(4,5), 눈물을 닦아 주시는 손길(8,17ㄴ), 전갈에게 쏘였을 때와 같은 괴로움(9,5), 불이 섞인 유리 바다(15,2), 고약하고 지독한 종기(16,2) 등 아픔, 뜨거움, 따뜻함 등의 표현들이 나옵니다.
이처럼 요한묵시록을 읽다 보면 오감이 자극이 됩니다. 이러한 감각적 이미지들은 예수님에 대한 시각적 이미지를 소개하며 설명한 것처럼 각각 성경이나 신화적인 것들에서 착안하여 각각 신학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2017년 9월 3일 연중 제22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0) 요한묵시록의 독특한 표현 (2)
요한묵시록의 독특한 표현으로 두 번째 살펴볼 점은 온갖 종류의 상징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천체나 자연에 관련된 상징입니다. 하늘, 별, 천둥, 번개와 같은 것들이 그러합니다. 예를 들어 하늘은 하느님의 초월성을, 구름과 연기는 하느님의 현존을 나타내는 상징입니다.
둘째, 동물과 관련된 상징입니다. 어린양은 예수 그리스도, 용은 사탄, 독수리는 메시지를 전하는 전령,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지중해에 패권을 차지한 로마 황제 권력을 상징하는데, 이외에도 여러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묵시록에서의 동물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존재를 묘사할 때 주로 쓰입니다.
셋재, 인간 생활과 관련된 상징들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 혼인, 출산, 노동, 상행위, 불륜 등 인간 활동과 관련한 상징들, 또 이마, 얼굴, 머리카락, 손과 발, 옷 등 인간의 모습과 관련한 상징들 등이 그러합니다.
이외에도 붉은색, 흰색, 자주색 등 색깔과 관련된 상징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숫자에 대한 상징이 있습니다. 7은 완전함을 상징하고, 마흔두 달(11,2; 13,5), 3년 반(12,14), 천이백육십 일(11,3; 12,6) 등 7의 절반에 해당하는 숫자는 일시적인 기간을 상징합니다. 12는 하느님의 옛 백성이나 새 백성을 상징하는데, 여기서 십사만 사천이라는 수자도 나옵니다(7,1-8; 14,1). 이 숫자는 12곱하기 12곱하기 1000으로서 첫 번째 12는 구약의 백성을, 두 번째 12는 신약의 백성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1000은 군대의 무리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구약에서부터 예고되었고 신약에 와서 성취된 하느님의 새 백성을 상징하는데, 그 백성이 악과 싸우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숫자 3은 하느님과 관련된 상징이며, 숫자 4는 동서남북, 곧 지상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하느님이나 예수님을 표현할 때에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도 오실’(1,4.8) 분,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시작이며 마침’(22,13)이라고 하며 삼중적인 표현을 쓰고 세상의 모든 사람을 가리킬 때는 ‘모든 종족과 언어와 백성과 민족’(5,9 등)이라고 말하며 사중적인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와 같이 요한묵시록에 있는 이 풍성한 상징들을 일일이 헤아린다는 것은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보통 성경주석서 가운데에서 요한묵시록의 주석서가 가장 두껍습니다. 그만큼 단어 하나, 표현 하나하나에 구약성경적인 배경, 신화적 배경, 상징성 등이 담겨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2017년 9월 10일 연중 제23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1) 요한묵시록의 독특한 표현 (3)
지난주에 요한묵시록에 나오는 숫자가 상징성을 띠고 있다는 것을 살짝 보았습니다. 이 부분에서 보다 흥미 있는 사실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선 요한묵시록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총 14번 나옵니다(1,1.2.5.9; 12,17; 14,12; 17,6; 19,10; 20,4; 22,16.20.21). 14라는 숫자는 2 곱하기 7입니다. 2는 성경에서 유효한 증언을 위한 증인들의 최소 인원수를 나타냅니다(신명 17,6). 그리고 7은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라는 이름이 14번 나왔겠습니까? ‘예수’라는 말은 우리가 믿는 성자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을 때 부모로부터 받은 이름입니다. 따라서 그 이름이 14번 나왔다는 것은 교회 공동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예수]을 충만하게[7] 증거해야 한다[2]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총 7번 나옵니다(1,1.2.5; 11,15; 12,10; 20,4.6). 이는 역사와 종말에 있어 그리스도의 주권이 충만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어린양’이라는 호칭은 28번 나오는데, 지상 세계를 상징하는 4와 충만함을 상징하는 7이 곱해진 숫자입니다. 곧 어린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이 세상 전체에 미치고 있음을 뜻합니다. 마지막으로 ‘민족과 언어와 백성과 나라들’ 혹은 이와 비슷한 표현이 7번 나옵니다(5,9; 7,9; 10,11; 11,9; 13,7; 14,6; 17,15). 이 표현은 동의어로 볼 수 있는 단어들이 사중적으로 나온 것은 4라는 숫자가 상징하듯이 지상 세계를 가리키기 때문이고, 이 표현이 7번 등장한 것은 어린양이라는 호칭이 그러하였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지상 세계 전체에 미치고 있음을 뜻합니다.
오늘날에도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가령 숫자 4는 ‘죽을 사(死)’와 발음이 같다는 이유로 ‘죽음’을 뜻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늘, 땅, 물, 불을 가리키는 건곤감리(乾坤坎離)와 연관하여 세상 전체를 뜻하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7은 서양에서 성경의 영향을 받아 행운의 숫자로 통하고, ‘트리스카이데카포비아(Triskaidekaphobia)’라고 불리는 13은 서양 신화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날과 연관하여 저주를 뜻하기도 합니다. 이렇듯 숫자가 어떤 상징성을 갖는 경우가 있는 그렇다고 해서 숫자의 의미를 미신처럼 여길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요한묵시록의 저자는 숫자가 지닌 특정한 상징성을 이용해서 신앙적 메시지를 독자들에게 전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2017년 9월 17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경축 이동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2) 요한묵시록의 독특한 표현 (4)
요한묵시록이 묵시문학으로서 독특한 표현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운데 마지막으로 소개할 점은 우리의 상식을 깨는 파격적인 표현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어린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하였다.”(7,14) 피로 옷을 빨았는데 어떻게 그게 흰색을 띠게 될까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빨갛게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상식을 깨는 표현이 과감하게 나오는 것은 성경이나 신화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여 상징성을 지니기 때문입니다. 곧 흰색이 부활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으로 부활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한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17장에서 바빌론이란 도시가 대탕녀 곧 여자로 소개되고, 21장에서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순결한 신부로 소개됩니다. 어떻게 도시이면서 동시에 여성일 수 있을까요? 이 역시 상징성을 지닌 것입니다. 곧 바빌론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협하는 로마 제국을 상징하고, 새 예루살렘은 박해 속에서 믿음을 잃지 않고 종말의 구원을 맞이하는 신앙 공동체를 상징합니다.
다른 예를 보겠습니다. 14장 8절과 16장 19절에 이미 바빌론이 파괴되었다고 선포됩니다. 시제 또한 과거시제를 씁니다. 그런데 정작 17장으로 가면 이미 파괴되었을 바빌론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리고 17장 16절에서는 ‘파괴될 것이다’라고 미래시제를 씁니다. 그다음에 다시 18장에 가면 바빌론이 이미 파괴된 것처럼 합니다. 줄거리의 순서상 18장에서 파괴된 것으로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순서 자체가 혼돈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순서와 시제가 뒤바뀌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과거도, 오늘도, 마래도 모두 한순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파격적인 표현을 통해서 파트모스의 요한은 하느님께서 시간을 초월하신 분임을 알려줍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현재의 박해를 받는 순간이 영원한 것이 아님을 알려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요한묵시록의 다양하고도 풍부한 표현들을 보았습니다. 이러한 모든 표현들은 요한묵시록 자체가 성경과 여러 신화들의 이미지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상징적인 의미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들은 그 시대의 역사적 상황들을 반영하면서 동시에 신학적인 메시지를 던져 줍니다. 한편으로 묵시록의 표현들을 굳이 상징적으로 담는 이유는 묵시록의 저자가 환시를 통해 체험한 것들을 인간의 언어로 온전하게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2017년 9월 24일 연중 제25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3)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지는 성경의 진리
오늘부터 우리는 요한묵시록의 전체적인 줄거리를 살펴볼 것입니다.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가 하나의 이야기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묵시문학의 줄거리는 지난 8월에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의 판타지 영화와도 비슷합니다. 다시 말해서 줄거리 자체가 실제로 벌어질 일이 아니라, 하나의 가상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요한묵시록의 이야기를 단순히 허구로만 치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서 드러나는 묵시주의적 메시지만큼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하시는 구원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바로 이 부분에서 걸려 넘어집니다. ‘성경은 진리의 책’이기 때문에 성경 안에 묘사된 모든 이야기들은 실제로 벌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맞지 않습니다.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는 수학적 진리, 과학적 진리, 역사학적 진리, 의학적 진리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성경 안에서 이러한 진리들을 찾으려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진리를 담고 있을까요? 예전에 교리를 요약해서 문답식으로 암송했던 천주교 요리문답이 있습니다. 그 문답의 첫 번째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위하여 세상에 났느뇨?”, “사람이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기 위해 세상에 났느니라.”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가 바로 이 첫 번째 문답과 관련됩니다. 곧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진리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그분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으로 이끄시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이러한 진리를 전하기 위해 때로는 가상의 이야기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라디오 주파수를 생각해 보십시오. 광주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으려면 92.3MHz에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92.3MHz에 맞추지도 않고서는 ‘왜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이 나오지 않지?’라고 따진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가 라디오에서 클래식 음악을 들을 수 없는 이유는 라디오가 고장이 났다거나 방송사가 문제가 아니라, 주파수를 잘못 맞추었기 때문입니다.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안에서 하느님의 목소리, 구원의 진리를 듣기 위해서는 신앙의 주파수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과학적 주파수나 역사학적 주파수를 맞추어 놓고서 성경 안에 담긴 진리의 소리를 들으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성경을 엉터리 이야기로, 유치한 것으로 치부해 버리고 맙니다.
[2017년 10월 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선교의 수호자) 대축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요한묵시록 둘러보기 (14) 요한묵시록의 줄거리
요한묵시록은 22장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가운데 1-3장에서 서론의 역할을 하고, 4-22장이 본격적인 가상적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천상 세계가 펼쳐지면서 하느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양의 모습으로 나타나셔서 봉인된 일곱 두루마리를 펼치십니다(4-5장). 봉인이 하나씩 풀리면서 하느님이 세상의 참된 임금님이신데, 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박해를 당해야 하는지의 물음이 두루마리로부터 나옵니다(6-7장). 이러한 물음이 제기되자 천사들이 하느님 앞에 나와 일곱 나팔을 붑니다. 그리고 일곱 나팔이 차례로 울려 퍼지자 우상숭배를 한 이들이 회개할 수 있도록 여러 징벌이 내려집니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8-9장). 사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은 것은 우상숭배의 어둠 너머에 용으로 상징이 되는 사탄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10-12장). 용은 세상을 장악하기 위해 바다짐승에게 자기 권한을 물려줍니다. 그렇게 하여 바다짐승은 마치 자신이 세상의 임금인양 사람들을 폭력으로 다스립니다. 그 옆에는 땅의 짐승이 있었는데, 그는 사람들이 바다짐승을 숭배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하여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과 대적하는 용, 바다짐승, 땅의 짐승이 소개가 됩니다(13장). 그리고 이어 이들을 심판하기 위해 어린양이신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이들이 소개됩니다(14-15장). 사람들이 우상숭배로부터 회개하지 않은 이유가 바로 바다짐승을 숭배하기 때문이었기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이 짐승을 더 이상 숭배하지 않고 회개하기를 바라며 천사들을 통해 땅에 일곱 대접을 차례로 부으십니다. 그 대접이 부어질 때마다 회개의 징벌이 내려지지만, 이번에도 역사 사람들은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바다짐승은 용과 땅의 짐승과 세상의 권력자들을 다 불러놓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최후의 전쟁을 벌이려고 합니다(16장).
바다짐승은 이 전쟁에 나가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제국도시인 대탕녀 바빌론을 불에 태워 버리고 세력을 확장합니다(17-18장). 그러나 최후의 전쟁에서 바다짐승과 그의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멸망을 당합니다(19장). 또 이 모든 악의 세력을 이끌었던 용은 천 년 동안 결박되면서 마지막 회개의 기회를 갖습니다. 그러나 천 년 후에도 용은 회개하지 않고 도리어 그리스도와 대적하려 하자, 그 역시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20장). 그리하여 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이 펼쳐지고 새 예루살렘이 도래하게 됩니다(21-22장).
[2017년 10월 8일 연중 제27주일 빛고을 3면, 한재호 루카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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