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가톨릭 관련>/◆ 성화 & 이콘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12) 십자고상 (하) 11세기 이후

by 파스칼바이런 2018. 4. 4.

[호기심으로 읽는 성미술] (12) 십자고상 (하) 11세기 이후

떨군 머리 피투성이 예수님에게서 희생과 사랑을 보다

가톨릭평화신문 2018. 04. 01발행 [1458호]

 

 

 

 

오늘날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난의 그리스도 십자고상’ 그림은 언제부터 그려지기 시작했을까요?

 

미술사학자들은 수도원을 중심으로 서방 교회 특히 프랑스 남부 일대에서 로마네스크 미술을 꽃피우던 11세기 때부터 이러한 도상(圖像)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이교인들에게 선포하기 위해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 그리스도를 그리지 않고 수도원에서 개인 묵상과 신비 체험을 통해 얻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 그분 외아드님의 순종과 희생을 드러내기 위해 수난의 십자고상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11세기 때부터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께서 눈을 감은 채 머리를 떨구고, 온몸은 피투성이며, 양팔은 힘없이 축 늘어져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채 있는 모습의 도상이 유행처럼 퍼졌습니다. 그 이전 시대가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한 도상이 유행했다면 이 시기부터 그리스도의 인성을 드러내는 성미술이 확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3세기에 들어서면 수난의 그리스도 십자고상 도상에 새로운 변화가 나타납니다. 이전까지는 동방 교회의 영향으로 십자가상에 주님께서 양손과 양발에 각 하나씩 모두 4개의 못에 박힌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는 두 발이 하나로 겹쳐진 상태로 3개의 못에 박힌 주님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그리스도의 인성이 드러나는 이러한 십자고상의 뿌리는 동방 교회 성미술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 호에는 서방 교회 도상에 영향을 끼친 11세기 동방 교회의 십자고상 프레스코화를 소개합니다. / 리길재 기자 teotokos@cpbc.co.kr

 

이 프레스코화는 11세기 터키 카파도키아 지방 괴레메 동굴 성당에 그려진 그리스도의 인성을 드러낸 십자고상 작품입니다. 오늘날 이 지역 사람들은 이 동굴 성당을 ‘어두운 성당’(Karanlik Kikise)이라 부릅니다. 깊고 어두운 성당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여서 긴 세월 동안 무슬림의 훼손을 피해 그나마 지금의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 프레스코화는 십자가상의 주님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의 구도를 이룹니다. 먼저, 십자가상의 주님 모습을 살펴봅시다. 예수님은 긴 고수머리에 수염을 길렀습니다. 풍성한 머리카락과 수염은 인성의 충만함을 드러냅니다. 후광은 주님 신성과 영광을 상징하고 후광 안의 십자가는 그리스도에게만 그린다고 여러 차례 설명한 바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눈을 감으신 채 오른쪽으로 머리를 떨구고 계십니다. 주님의 죽음과 ‘자기 비움’(필리 2,7) 즉 주님께서 당신 자신을 낮추신 겸손을 보여줍니다.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필리 2,8)하지 않으셨더라면, 죄의 용서, 곧 우리의 정화를 위해 그분께서 피를 쏟으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아우구스티누스, 「요한복음 강해」 중에서)

 

십자가상의 주님은 허리에 얇은 흰 천만 두른 채 벌거벗은 모습을 하고 계십니다. 십자가의 길 수난을 겪었지만, 주님의 몸은 정결하리만큼 깨끗합니다. 또 인간의 시신과 달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주님의 육신은 근육이 선명합니다. 이는 ‘하느님이시며 인간’(Θεανθρωποs, 테안트로포스)이신 주님의 신성과 인성이 단 한 순간도 나뉨이 없으며 그분의 거룩한 몸(성육신)은 결코 부패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죽은 이들이 부활하면서 다시 한 번 확인해 줄 것입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1코린 15,42-43)

 

주님의 다섯 상처에는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 특히 창에 찔린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솟구치고 있습니다. 죽은 인간의 육신에서는 볼 수 없는 현상입니다. 주님의 피는 ‘승리’를, 물은 ‘세례’를 상징합니다. 결국, 이 상처는 주님의 피와 물로 세우신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렇습니다. “‘새로운 하와’(교회)는 최초의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아담’(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태어났습니다. 세례(물)와 성찬(피)이라는 교회의 기본적인 두 성사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것입니다.”(「비잔틴 성화 영성 예술」 중에서)

 

십자가상의 주님 오른편에는 성모 마리아와 두 여인이 비통해 하고 있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비통함을 애써 참듯 얼굴에 왼손을 대고 있고,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께 오른손을 뻗고 계십니다. 주님의 죽음에 땅이 흔들리고 한낮이 어둠에 묻힐 만큼 창조계가 슬퍼했는데 성모님의 애통함을 이보다 몇 배 더했을 것입니다. 성모님께서는 당신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리려고 오른손을 뻗으시지만, 왼손으로 겨우 얼굴을 지탱한 채 신앙의 눈으로 인간에게 구원을 가져다줄 주님의 상처를 바라봅니다. 아들의 십자가상의 속량을 지켜본 성모님은 성령을 입어 이제 교회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십자가상의 주님 왼편에는 사랑하는 제자 요한 사도가 서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짧은 머리에 수염이 없는 앳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 역시 비탄에 빠진 듯 얼굴을 오른손에 묻고 왼손을 펼쳐 보이고 있습니다.

 

요한 뒤에 갑옷을 입고 창으로 무장한 군인은 주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른 백인대장 론지누스입니다. 론지누스는 일반적으로 왼손에 창을 들고 오른손은 웅변하듯 십자가상의 예수님께 향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님의 죽음을 보고 “정녕 이 사람은 의로운 분이셨다”(루카 23,47)고 고백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괴레메 ‘어두운 성당’의 수난의 그리스도 십자고상 프레스코화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드러내는 십자고상의 가장 정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