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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상미 시인 / 파리에서

by 파스칼바이런 2019. 2. 20.

김상미 시인 / 파리에서

 

 

파리에서 닷새를 보냈다.

너무나 보고 싶고, 너무나 맡고 싶고, 너무나 느껴보고 싶었던 파리에서

말도로르의 노래처럼 취해서, 엄청나게 취해서

밤새도록 드럼통 세 개 분량의 피를 빤 빈대처럼 취해서

격한 파리의 숨결, 파리의 공기, 파리의 이름들에 취해서

오랫동안 사랑했던 이들이 아낌없이 살고, 사랑하다, 죽어 묻힌

몽파르나스 묘지와 페르 라셰즈 묘지에 취해서

보들레르의 악의 꽃, 초록빛 압생트에 취해서

뜨겁게, 뜨겁게 취해서

빅토르 위고의 불멸의 꼽추, 콰지모드가 눈물로 울리는

노트르담 대성당의 저녁 종소리가 너무나 애절해서

내 곁을 툭 치거나 총총히 사라지는 여인들의 뒷모습이

너무나 보바리 부인을 닮아서

하나둘 불이 켜지는 파리의 카페들

그 안의 수많은 얼굴들이 너무나 내 얼굴같이

목이 말라서

나는 파리에서 영원을 산 것 같이 한순간을 산 것 같이

화려한 물랭 루주의 불빛 아래서 밤새도록 프렌치 캉캉을 추고

불타는 열다섯 송이 해바라기가 정념에 물든 악기처럼 꽂혀 있는고흐의 그림 앞에서

다급하게 배고픈 크루아상을 씹으며

아, 위대한 예술가들, 이들처럼 현세나 내세의 경계 따위 없이

나도 이 순간을, 지금 이 순간을 마음껏 살자며

그들에게 취해서, 엄청나게 취해서

파리에서 닷새를 보냈다

아폴리네르의 센 강과 미라보다리에 취해서

장 콕토의 불 켜진 에펠탑의 신랑신부들에게 취해서

개선문에서 바스티유 광장까지 지친 다리를 질질 끌며 걷는

나 자신에 취해서,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취해서

아, 파리에 오길 잘했다며 환호의 콧노래까지 부르며

문 닫힌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스콧 피츠제럴드, 제임스 조이스와 함께

격렬한 권투 글로버를 목에 걸고 술을 마시는 헤밍웨이에게 취해서

뼛속까지 자유롭고 솔직한 그들의 삶, 그들의 욕망, 그들의 열정에 취해서

나를 잊고서, 나를 초월하여 너무나 달콤한 환영과 도취 속에서

내가 살던 곳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져 나온 행복한 꼬마 모험가처럼

둘레둘레, 기웃기웃, 성큼성큼, 터벅터벅, 아찔아찔, 살금살금, 와삭와삭, 야금야금

어떤 지도도 나침반도 필요가 없는

꿈꿔왔던 그대로의 파리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잊힌 사람들이, 죽은 사람들이

계속해서 내 눈에서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파리의 광휘 속에서

구두창이 다 닳도록 돌아다니고 돌아다녀도

끝이 보이지 않는 파리의 유산에 취해서

그 위로 나는 듯이 날아오르며 솟구치는 전율과 탄식에 취해서

즐겁게, 행복하게, 가슴 벅차게

그 이름만으로도 늘 그립고 빛이 나는 도시,

파리에서!

 

격월간『현대시학』 2018년 9~10월호

 


 

 

보들레르, 랭보, 로트레아몽,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에릭 사티, 자크 프레베르…가 살았던 곳, 파리에서

 

 

어떤 도시는 한 번도 가본 적이 없음에도 그 이름만 들어도 마구 가슴이 뛰고 마음이 짠해진다. 내게는 파리와 리스본과 프라하와 토리노가 그렇다.

어릴 때부터 읽어왔던 책과 작가들과 화가, 그 책 속의 사람들 때문이다.

 

고맙게도 그중 파리는 닷새가량 동생과 함께 다녀올 기회가 있었다.

독일 자브리켄에서 기차를 타고 파리로 들어갔는데, 파리의 국경을 넘어설 때부터 이미 나는 파리라는 환희에 젖어 있었다.

파리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거의 매일을 센 강의 우안과 좌안을 걷고, 또 걸어 다녔다.

숙소에서 제법 먼 곳으로 갈 때만 지하철과 버스를 이용했다.

 

파리는 상상했던 것보다 지저분하고 복잡했지만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내게 있어 파리는 여전히 문학적이고 감동적이었다.

보들레르, 랭보, 로트레아몽, 빅토르 위고, 에밀 졸라, 에릭 사티, 자크 프레베르…가 살았던 곳이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오스카 와일드, 헤밍웨이가 머물던 곳이고, 들라크루아, 모딜리아니를 비롯한 많은 화가들이 살던 곳이고, 주나 반스, 거트루드 스타인을 비롯한 지적이고 아름다운 여성들이 사랑했던 곳이었다.

 

나는 그들의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는 땅을 밟는 것만으로도 감격이었다.

그들은 어딜 가든 어디에나 존재하고 있었다.

나는 한 명의 관광객이 아니라 파리라는 거대한 도서관을 배회하며 이곳저곳에 숨겨진 그리운 책들을 찾아내는 술래와 같았다.

 

아, 그리고 아폴리네르와 마리 로랑생의 세느(센) 강.

우리나라 서울의 한가운데 한강이 있듯이 파리에는 센 강이 있었다.

에펠탑에서부터 센 강을 따라 노트르담 성당까지 걸을 땐 비가 내렸다.

비 내리는 파리는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은 멜랑콜리였다.

 

우리는 퐁네프다리 어디쯤에서 센 강에 몸을 던진 산도르 마라이를 비롯한 몇몇 작가들을 위해 묵념을 드렸다.

노트르담 성당에선 그 성당의 아름다움과 신비감에도 불구하고 내 눈은 자꾸만 노트르담의 꼽추, 콰지모드의 커다란 종에 더 눈길이 갔다.

가엾은 콰지모드! 정말 발터 벤야민의 말처럼 세상 모든 도시 중에 파리만큼 책과 완벽히 하나가 된 도시는 없을 듯했다.

 

아름다운 오페라하우스 앞에 서면 영락없이 가스통 르루의 『오페라의 유령』이 나를 반기는 듯했고, 페르라셰즈나 몽파르나스 묘지에선, 이곳에 누워 있는 이들이 그동안 내게 준 행복 때문에 눈시울이 자꾸만 붉어졌다.

 

그렇게 나는 짧은 시간, 파리를 직접 보고, 느끼고, 맘껏 즐기다 돌아왔다.

그러곤 그 마음을 「파리에서」란 한 편의 시에 담아보았다.

마치 그 길을 다시 걷고, 또 걸어보듯이.

 

【웹진 시인광장 Webzine Poetsplaza  SINCE 2006】

 


 

김상미 시인

1957년 부산에서 출생. 1990년 《작가세계》 여름호에 〈그녀와 프로이트 요법〉 외 8편으로 등단. 저서로는 시집으로『모자는 인간을 만든다』,『검은, 소나기떼』, 『잡히지 않는 나비』, 『우린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산문집 『아버지, 당신도 어머니가 그립습니까』』와 『검은, 소나기떼』, 사랑시 모음집 『나보다 더 나를 사랑한 당신』 등이 있음. 박인환 문학상, 시와표현 작품상 수상. 지리산문학상, 전봉건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