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 시인 /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말처럼 나는 죽음을 생각한다
아침녘에 잠시 그쳤다 다시 내리는 빗방울에서 그래도 살아야 한다는 당신 말처럼 먼 강물 냄새가 난다. 강물이 더럽다고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강은 더 멀리 흘러야 했으리라. 살아서 지은 죄를 다 씻어내려면 강은 세상 온갖 곳을 바닥까지 쓸며 흘러야만 했으리라.
날카로운 돌조각과 얼음에 찢긴 부르튼 발바닥이 강물에 떠내려가고 있다. 씻어낸 것들이 진흙덩이 속에 가라앉았다 떠오르고서야 강물은 더 멀리 흘러갈 수 있을 것이다. 바닥을 치고 가라앉지 않은 죽음은 그대로 물밑을 흘러서 하구까지 떠내려간다는데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을 말하라면 나는 주저 없이 저 떠오르지 않는 죽음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모래 둔덕에 끌어올려져 성난 개들에게 물어뜯겨도 바닥을 치고서 떠오르는 것이 있다. 그 얼굴로 햇빛 속에서 찬란하게 찢겨야 할 것이 있다.
계간 『시와 사람』 2010년 가을호
김태형 시인 / Samantha Fish ― I put a spell on you
저주에 걸린 한 여자를 알고 있지 사랑을 원하지만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잊을 사람은 없으니까
그녀는 원했지 그녀는 외로웠어 그게 무슨 소용이야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과 사랑도 없이 견디는 수밖에
견뎌내려 하지만 시간마저 견딜 수는 없으니 그래도 견디지 못하는 것은 없으니 잊고 사는 수밖에 잊는 게 아니라 잊게 되겠지 그게 사는 일이니까
살다 보니 살아지니까 아프게 하려고 아파서 죽어버리게 죽었으면 죽었으면 하고 미워했지
가질 수 없으니까 사랑했으니까 내 것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라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녀는 잊으려 했지
지금 없는 것은 지금 없는 것을 영원히 남기고 사라져 잊는다고 잊히는 게 아닌 줄도 모르고 그 순간에 갇혀서 사라지는 수밖에
저주에 걸린 한 여자를 알고 있지 유리병에 갇힌 모래알처럼 울고만 있는
계간 『문학의 오늘』 2019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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