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명춘 시인 / 활엽수림
1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한 세기를 줄이고 깎으며 살아온 잡목들 빽빽이 들어차고 간간이 바람이 긴 머릿자락을 휘날리면 ㅈㅊㅋ 격음화현상이 일어나는 활엽수림 저녁은 관습처럼 무섭게 산허리를 들이받으며 내 행동반경권 안으로 진입해 들어오고 바로 코앞에서 길 하나가 논두렁에 처박히고 한 떼의 곤충들이 증발한다 문득 어디선가 맵고 차고 단단하게 들려오는 어둠의 호각소리 불규칙하게 연소해 들어가는 꿈속처럼 깊은 바다, 활엽수림이여 먼 순례의 길에 오르는가 퇴색한 나의 멜라닌 색소에 푸른 물을 들이고 싶다
2 잠들지 못하는 바다 그 어디에서 삭정가지처럼 걸린 수평선이 부러져 내릴 것만 같다 빛바랜 꽃잎 혹은 빈 술병으로 나뒹구는 어둠 속에서 꾸겨진 나를 발견한다 나를 조소하듯 어두운 곳에서 촉망받는 별들 얼마쯤 걸어왔을까 뒤돌아보면 급격하게 커가는 바람의 폐활량 숨이 가쁘다 가면 갈수록 뒤로 물러서는 활엽수림이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등줄기가 몹시 가렵다 긁기 위하여 손을 갖다 대면 새까맣게 타들어오는 밤 12시 아직도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들이 돌아오지 않는 활엽수림으로 남아 희미한 고요의 불빛을 지키는 밤은 저울처럼 좀더 엄숙한 곳으로 기울어진다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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