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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명춘 시인 / 활엽수림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7.

함명춘 시인 / 활엽수림

 

 

  1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들이

  돌아오지 않는다.

  한 세기를 줄이고 깎으며 살아온 잡목들

  빽빽이 들어차고 간간이

  바람이 긴 머릿자락을 휘날리면

  ㅈㅊㅋ 격음화현상이 일어나는 활엽수림

  저녁은 관습처럼 무섭게

  산허리를 들이받으며 내 행동반경권 안으로

  진입해 들어오고 바로

  코앞에서 길 하나가 논두렁에

  처박히고 한 떼의 곤충들이 증발한다

  문득 어디선가 맵고 차고

  단단하게 들려오는 어둠의 호각소리

  불규칙하게 연소해 들어가는

  꿈속처럼 깊은 바다,

  활엽수림이여

  먼 순례의 길에 오르는가

  퇴색한 나의 멜라닌 색소에 푸른 물을

  들이고 싶다

 

  2

  잠들지 못하는 바다 그 어디에서

  삭정가지처럼 걸린 수평선이 부러져

  내릴 것만 같다

  빛바랜 꽃잎 혹은

  빈 술병으로 나뒹구는 어둠 속에서

  꾸겨진 나를 발견한다

  나를 조소하듯 어두운 곳에서 촉망받는 별들

  얼마쯤 걸어왔을까 뒤돌아보면

  급격하게 커가는 바람의 폐활량

  숨이 가쁘다 가면 갈수록

  뒤로 물러서는 활엽수림이여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등줄기가 몹시

  가렵다 긁기 위하여 손을 갖다 대면

  새까맣게 타들어오는 밤 12시

  아직도 빛을 찾아나선 나뭇가지들이

  돌아오지 않는 활엽수림으로 남아

  희미한 고요의 불빛을 지키는 밤은

  저울처럼 좀더 엄숙한 곳으로

  기울어진다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함명춘 시인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활엽수림〉이 당선되어 문단 데뷔. 시집으로 『빛을 찾아 나선 나뭇가지』(문학동네, 1998)와 『무명시인』(문학동네, 2015)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