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철기 시인 / 철새를 만나다
문득 뭇별들의 제자리걸음이 그렁그렁한 눈물을 머금게 하는 밤 안개 속 방파제는 육지로 난 길 인양 어서 나아가 보라며 건너가 보라며 나를 부르는데 엉겨 붙어 나를 말리는 바람 그래도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울먹일 때 빈 껍질만 남아 뒹구는 희망 피난민처럼 몰려왔다
이젠 떠나고 싶은데 갈 곳이 없는지 멍자국 같은 사연 하나 둘 모여 불을 밝히고 마을을 이루고 그래서 한세상 어우러진 잡풀처럼 흔들릴 때 알고 있었다 저마다 소금에 저린 마음 한 다발씩 묶어 쌓아두고 있음을
맨 정신엔 타오르지도 못했던 마음 불쏘시개 삼아 한 잔 두 잔 마신 술에 취하기는 바다가 취하고 끝내 바락바락 악을 쓰며 달려들다 고꾸라지며 살 아 야 하 나 이어지지 못하고 부서져 되돌아가 버리는 말 담뱃재 떨듯 매일같이 칭얼대는 희망쯤이야 쉬이 떨어내면 그만이라고 말보다 먼저 떠난 파도가 다한 힘으로 와 쓰러질 때.
저기 저 봉두난발한 바닷바람 사이 위태위태하게 날아가는 철새 한 마리
2012년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시
홍철기 시인 / 파프리카를 먹는 카프카
색깔별로 출근하는 파프리카는 효능이 다르니 주의 하세요
주황색 파프리카 안전벨트를 두르고 면역 수치 안전하게 출발하는 월요일 수요일쯤이 되면 무기력해지는 당신을 위해 빨간색의 강력한 항산화로 무장시켜 줄게요 스트레스가 어깨에서 머리끝으로 월경하지 않도록 금요일 오후엔 노란색 안전모를 쓰죠 파프리카 나의 파프리카 안전구호를 외쳐야 해요.
파프리카 파프카 카프카 당신은 변신의 귀재 쓰임이 다르지만 어느 다리든 밀고 나서기 좋은 아침 이죠 창문마다 눈뜨는 요리법을 커튼처럼 펼치고 지하철에서 파프리카를 먹는 카프카처럼 출근중이죠
파프리카의 씨를 심어요 먹기 불편한 씨가 먹기 좋도록 무럭무럭 자라면 속 빈 일주일을 단단하게 보이도록 매일 매일 파프리카를 먹는 카프카 카프리카를 곁들인 카프를 즐겨먹는 불안하지 않는 나의 카프카
홍철기 시인 / 풍선껌을 씹는 하루
풍선을 앞에 두고 누가 더 크게 불까 입안 가득한 풍선 확 터트려 버릴까 세상이 점점 커지면 불안도 함께 커지지 자라기 시작한 불안의 구멍 들여다 볼 용기는 아직 배우지 못했어. 풍선과 나 사이 저 구멍이 없었더라면, 노래도 흥얼거리고 헤어지기 싫어 더 힘차게 불어봐 아슬한 경계를 타고 흐르는 타액 금지된 사랑. 모든 금지된 것들은 끈적이며 달라붙지.
언제간 터질 거야 씹기만 한 풍선껌 금단의 세계를 넘보지 않는 한 아무리 불어도 하늘로 날아가지 않아 곁에 두는 건 간단한 공식 하나면 돼. 일단 다시는 안 볼 것처럼 가열 차게 씹을 것 단물은 단 한 방울도 흘리지 않게 수시로 빨아들일 것 소리는 그날의 컨디션에 따라 조절할 것
언제나 수지를 좋아하는 너 천연 향 가득 퍼진 얼굴로 나를 덮어줘 인공의 향기에 취한 날들 따라
한없이 부풀어 오르게
홍철기 시인 / 실어증, 싫어증
날개를 잃은 파리는 아무런 소리를 내지 못 한다고 엎드려 숫자를 센다 하나 둘 셋
엎드린 숫자들이 늘어간다 잊기 위한 싸움에서 나는 늘 진다 지기 위해 스파이가 되고 싸우는 것을 싫어하는 스파이가 되고 말을 잃어버린 평화주의적 레지스탕스
내려앉지 않는 파리는 무섭지 않다 붕붕 날아다니기만 하는 파리는 없을 테니까 분명 어두운 골목에서 만나지 않았다는 데 한 표 파리가 날 때 소리가 나지 않는다면 죽이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말 소리 없이 사는 파리는 싫어증에 걸린거야 말을 잃어버린 게 아닌 날개 짓을 하기 싫어하는 너 날개가 젖어 있거나 아예 없거나 그 둘 중의 하나 젖어 있는 것과 아무것도 없는 내 앞에 놓인 둘 중의 하나
머리꼭지부터 머리카락이 빠지듯 허전한 일 빠진 머리카락을 쓸어 모아 태우면서 생각했지 죽음을 앞에 두고 젖은 날개를 말리고 새로운 날개를 달아 볼 용기 저 날개의 소리가 죽음을 물게 하는 미끼
나는 파리에게 말했다 나의 싫어증과 너의 실어증이 우릴 살렸다
홍철기 시인 / 엘도라도모텔
엘도라도에 가려면 먼저 동사무소에 들려야 해요
가족관계증명서를 내보여야 하룻밤 머물다 갈 수 있는 곳 당신은 신분을 알 수 없군요 혼자인가요? 내가요? 아니요 혼자 잘거냐구요? 혼자이고 싶지 않아요, 작게 말했죠. 침대에 누워 엘도라도가 엘도와 라도가 함께 살던 곳일 거란 생각을 해요. 돌려진 채널 마주한 여자는 지중해가 보이는 곳이 엘도라도라며 어서 가보라네요. 저 사람은 모르죠. 내가 온 곳이 지중해고 지금 여기가 엘도라도란 걸, 엘도와의 관계를 알고 싶어요 가족관계 증명서엔 뭐라고 나올 까요.
형제는 알 수가 없어요. 형제는 남이거든요 가족관계를 찾을 수 없다며 직원은 말 했죠. 엘도만 알던 라도의 밤은 다시 길어 졌어요 엘도와 라도의 관계를 알 지 못한 밤 나는 엘도라도에서 잠을 청해요
못다 찾은 나는 동사무소에 두고 남처럼 낮선 꿈이 생길까 기대되는 여기는 엘도라도에요.
홍철기 시인 / 만기출소하다
옮겨지는 시선마다 흐릿하다 햇살은 담 벽의 높이만큼 자라고 있었지만 내가 걷는 길마다 그늘이 따라 졌다 시작은 그랬다 이별을 기약하기 어려웠다
누구나 눈을 뜨는 뻔한 일상 그 속에서 뻔하지 않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 굳이 말하자면 오전 5시 59분정도의 긴장감 색으로 말하자면 약간 밝아지려는 연두 무언가 내 안에 피려고 한다, 기대해도 좋을까
하루가 온통 먹빛인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비가 오거나 일찍 보러 나온 꽃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았다 시간은 담장 안에서 맴돌았고 그늘진 곳에서 웅크린 듯 움직이지 않았다 담장 안과 밖을 두고 시간이 내린 판결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판결 받지 못한 시간들이 쌓여 아파왔다 이별을 준비하지 못한 채 만나는 담장은 여전히 무겁고 높았다
안과 밖의 차이를 모르는 우리는 푸른색의 비늘을 펄럭거리며 숨 쉬고 무리 지어진 비늘들이 모두 왼쪽으로 반짝일 때 나는 왼쪽으로 기울어지는 몸을 바로 잡으려 애썼다
잠긴 문 위에서 나는 조금 더 노랑 쪽으로 기대고 싶어졌다 순간 개나리 꽃잎 하나가 툭, 출소를 알렸다
2017년 《시와 표현》 신인상으로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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