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부 시인 / 우리들의 양식(糧食)
모두 서둘고, 침략(侵略)처럼 활발한 저녁 내 손은 외국산 베니어를 만지면서 귀가(歸家)하는 길목의 허름한 자유와 뿌리 깊은 거리와 식사(食事)와 거기 모인 구릿빛 건강의 힘을 쌓아둔다. 톱밥에 잘려지는 베니어의 섬세(纖細) 쾌락(快樂)의 깊이보다 더 깊게 파고들어 가는 노을녘의 기교(技巧)들 잘한다 잘한다고 누가 말했어 한 손에 석간(夕刊)을 몰아쥐고 빛나는 구두의 위대(偉大)를 남기면서 늠름히 돌아보는 젊은 아저씨 역사적인 집이야, 조심히 일하도록 흥, 나는 도무지 엉터리 손발이고 밤이면 건방진 책을 읽고 라디오를 들었다. 함마 소리, 자갈을 나르는 아낙네가 십여 명, 몇 사람의 남자는 철근(鐵筋)을 정돈한다. 순박하고 땀에 물든 사람들 힘을 사랑하고, 배운 일을 경멸하는 사람들 저녁상과 젊은 아내가 당신들을 기다린다. 일찍 돌아간다고 당신들은 뱉아내며 그러나 어딘가 거쳐서 헤어지는 그 허술한 공복(空腹), 어쩌면 번쩍이는 누우런 연애(戀愛) 거기엔 입, 입들이 살아 있고 천재(天才)가 살아 있다. 아직은 숙달되지 못한 노오란 나의 음주(飮酒) 친구에게는 단호하게 지껄이며 나도 또한 제왕(帝王)처럼 돌아갈 것이다. 늦도록 잠을 잃고 기다리던 내 아내 문밖에 나와 서 있는 그 사람 비틀거리며 내 방에 이르면 구석 어딘가에 저녁이 죽어 있다. 아아, 내 톱날에 잘려지는 외국산 나무들 외롭게 잘려서, 얼굴을 내놓는 김치, 깍두기, 차고 미끄러운, 된장국 시간(時間) 베니어는 잘려 나가고 무거운 내 머리, 어제 읽은 페이지가 잘려 나간다. 허리 부러진 흙의 이야기 활자(活字)들도 하나씩 기어서 달아나는 뒹구는 낱말, 그 밥알들을 나는 먹겠지 상을 물리고 건방진 책을 읽기 위하여 나는 잠시 아내를 멀리하면 바람이 차네요 그만 주무셔요 퍽 언짢은 자색(紫色) 이불 속에 누워 아내는 몇 차례 몸을 뒤채지만 젊은 아내여 내가 들고 오는 도시락의 무게를 구멍 난 내 바지가랑이의 시대(時代)를 그러나 나는 읽고 있다. 모두 서둘고, 침략처럼 활발한 저녁 철근공(鐵筋工), 십여 명 아낙네, 스스로의 해방(解放)으로 사라진 뒤 빈 공사장에 녹슨 서풍(西風)이 불어올 때 나도 일어서서 가야 한다면 계절은 몰래 와서 잠자고, 미움의 짙은 때가 쌓이고 돌아볼 아무런 역사(歷史)마저 사라진다. 목에 흰 수건을 두른 저 거리의 일꾼들 담배를 피워 물고 뿔뿔이 헤어지는 저 떨리는 민주(民主)의 일부(一部), 시민(市民)의 일부(一部) 우리들은 모두 저렇게 어디론가 떨어져 간다.
196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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