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일 시인 / 나무는 나뭇잎이 꾸는 꿈, 나는 네가 꾸는 꿈
계절과 계절의 갈피에 바람과 바람의 사이에 서로 잊고 떠돌던 새털같은 나뭇잎들이 한 날 한 시 한 곳에 다시 함께 모이는 꿈을 꿨다.
나무는 나뭇잎이 꾸는 꿈. 꿈에서 깨면 나무가 사라지는 꿈. 지구는 나무들이 꾸는 꿈. 꿈에서 깨면 지구가 사라지는 꿈. 누구도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꿈.
나는 지금, 옥상 바람에 헝클어진 내 머리카락이 꾸는 꿈. 지금 나는, 무수한 내 머리카락 같은 날들을 함께한 네가 꾸는 꿈. 내 손을 잡은 네 두 팔, 열 손가락이 꾸는 꿈. 내게 오는 네 두 다리, 무수한 발걸음이 꾸는 꿈. 꿈이 깨면 내가 사라지는 꿈. 나는 네게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꿈.
슬픔이 막 지나간 무방비 상태의 내 눈언저리를 너의 잠이 소처럼 두터운 혀로 핥는다. 식탁 앞에서 입안에 침이 돌 듯 눈언저리에 눈물이 고인다.
나무는 나뭇잎이 꾸는 꿈. 나무를 놓칠까봐 꼭 붙잡으려, 바람은 일 년 내내 온 힘을 짜내 나뭇잎들을 구부려 왔다. 결국에 떨어진 나뭇잎들을 밟지 않기로 한다. 서로를 꿈꿨던 일들을 하나도 잊지 않으려, 나뭇잎을 밑창에 붙이고는 나는 죽은 자 산 자 다 같이 살아가는 이 시 속을 한 걸음도 나가지 않기로 한다.
계간 『모:든시』 2018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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