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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형준 시인 / 家具의 힘

by 파스칼바이런 2019. 5. 6.

박형준 시인 / 家具의 힘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 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家具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나오는 오래 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家具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家具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法이다

  家具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ㅡ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의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지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家具論을 펼쳤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박형준(朴瑩浚) 시인

1966년 전북 정읍에서 출생.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명지대 문예창작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家具의 힘〉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나는 이제 소멸에 대해서 이야기하련다』(문학과지성사, 1994),『빵냄새를 풍기는 거울』(창비, 1997),『물속까지 잎사귀가 피어 있다』(창비, 2002),

『춤』(창비, 2005) 등과 산문집『저녁의 무늬』,『아름다움에 허기지다』가 있음. 제15회 동서문학상과 2009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수상. 제2회 시인광장문학상 수상. 현재 〈시힘〉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