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시인 / 家具의 힘
얼마 전에 졸부가 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은 나의 외삼촌이다 나는 그 집에 여러 번 초대받았지만 그때마다 이유를 만들어 한번도 가지 않았다 어머니는 방마다 사각 브라운관 TV들이 한 대씩 놓여 있는 것이 여간 부러운 게 아닌지 다녀오신 얘기를 하며 시장에서 사온 고구마순을 뚝뚝 끊어 벗겨내실 때마다 무능한 나의 살갗도 아팠지만 나는 그 집이 뭐 여관인가 빈방에도 TV가 있게 하고 한마디 해주었다 책장에 세계문학전집이나 한국문학대계라든가 니체와 왕비열전이 함께 금박에 눌려 숨도 쉬지 못할 그 집을 생각하며, 나는 비좁은 집의 방문을 닫으며 돌아섰다
家具란 그런 것이 아니지 서랍을 열 때마다 몹쓸 기억이건 좋았던 시절들이 하얀 벌레가 기어나오는 오래 된 책처럼 펼칠 때마다 항상 떠올라야 하거든 나는 여러 번 이사를 갔었지만 그때마다 장롱에 생채기가 새로 하나씩은 앉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집의 기억을 그 생채기가 끌고 왔던 것이다 새로 산 家具는 사랑하는 사람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만 봐도 금방 초라해지는 여자처럼 사람의 손길에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먼지 가득 뒤집어쓴 다리 부러진 家具가 고물이 된 금성 라디오를 잘못 틀었다가 우연히 맑은 소리를 만났을 때만큼이나 상심한 가슴을 덥힐 때가 있는 法이다 家具란 추억의 힘이기 때문이다 세월에 닦여 그 집에 길들기 때문이다 전통이란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것ㅡ 하고 졸부의 집에서 출발한 생각이 여기에서 막혔을 때 어머니의 밥 먹고 자야지 하는 음성이 좀 누그러져 들려왔다 너무 조용해서 상심한 나머지 내가 잠든 걸로 오해 하셨나 나는 갑지기 억지로라도 생각을 막바지로 몰고 싶어져서 어머니의 오해를 따뜻한 이해로 받아들이며 깨우러 올 때까지 서글픈 家具論을 펼쳤다
199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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