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혜정 시인 / 스프링 위를 달리는 말
분홍빛 말이 나를 유혹했어요. 말을 타려고 하는데 해진 바지 사이로 무릎이 보이네요 말장사 아저씨가 입은 회색 점퍼 소매에도 누 런 솜털이 삐죽거려요 아까부터 아저씨는 저기 공장굴뚝처럼 기침을 토하고 있어요 나는 달리고 있었거든요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래도 나는 말 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어요 위로 솟으면 초록과 빨강 줄무늬 천막이 보이고 내려오면 내 바지처럼 군데군데 구멍난, 쓰레기더미 같은 판자집이 보였어요 연탄재들은 오늘 아침 차에 실려 떠났어요 말장사 아저씨는 네발 달린 의자에 안장처럼 앉아 있네요 아저씨가 움직일 때마다 의자가 삐그덕 소리를 냈어요 나는 달리고 있었거든요 달리는 말 위에서 달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말발굽 소리 대신 녹슨 스프링만 자꾸 삐그덕거렸어요 창호지 바른 우리집 창문에 불이 켜지네요 이제 말들이 리어커 바퀴에 실려 떠날 거에요 나는 달리고 싶었거든요 다리가 없는 분홍빛 말 위에서 나는 달리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엄마, 연탄재는 왜 또 내놓으세요?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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