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김영 시인 / 파이디아 1
산책을 끝낸 발자국에 아직도 식지 않은 호흡이 찰랑거립니다.
내가 매정하다구요? 메말랐다구요? 놀이의 방식이 좀 다를 뿐이랍니다.
세상의 모든 샘이 바닥까지 마르고 비틀려도, 나는 물을 놓지 않아요. 샅샅이 뭉개지는 순간까지 물을 간직하지 않는 바위는 바위가 아니랍니다. 바람과 나의 파우스트적 계약은 비밀이에요. 매순간 단단해지고 매순간 부드러워지는 일에 집중해요. 물컹거리고 딱딱한 습관들을 재조립하고 있지요.
구름과 황무지. 낙타 울음을 고밀도로 압축하여 저장하지만, 나는 누구에게도 압축을 풀어줄 의도가 없어요. 숲은 이미 누군가가 부지런히 풀어놓은 파일들로 넘쳐나거든요.
변환이 자유로운 당신은 모래보다 더 잘게 엎드려 사막을 건너지요. 어떤 날은 당신을 헤적거려 만든 소용돌이에 당신이 갇히기도 하지요. 날마다 신념이 신념을 생산하지요.
나는 빗장을 닫아걸고 카르마와 트라우마의 도플갱어인 얼굴을 부르곤 해요. 부엉이는 제 울음소리 때문에 방랑을 들키죠. 내 아우성은 너무 검어 당신에게 닿지 않아요. 당신은 흐르고 흘리고 나는 머무르고 멋모르죠.
그렇게 흐름에 진지한 당신도, 머무름에 천착하는 나도, 결국은 항우울제 복용량을 줄이려는 의도겠죠.
괜찮아요. 흐르지 않아도 굴절을 온몸으로 느끼니까요. 이미 여러 생을 흘러왔을 테니까요. 이번 생은 흐르는 것에 대해 최대한의 예의로 함묵하고 싶으니까요.
달을 품에 안은 당신의 탁족을 권하는 늦가을 밤, 나는 이마를 씻습니다.
우리 잠시 한 풍경이 되었어도, 한 사람은 방심하고 한 사람은 집착하고 서로를 오독하지요. 투명하거나 불투명한 상대를 오래오래 정독하지만 고독으로 귀결되지요.
삶은 규칙 없는 놀이라는 개론으로, 당신과 나, 서로 다른 문장 안에 가지런히 신발을 벗어두고 들어갑니다.
당신이 식히고 있는 바위는 제 울음의 가장자리로 들쭉날쭉 날아드는 되새 떼입니다.
* paidia :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벌이는 아이들의 난장판 같은 놀이, 소란스럽고 즉흥적인 놀이.
월간 『현대시』 2018년 5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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