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시인 / 패강(浿江)의 우수(憂愁)에 눈물을... 원제 : 패강(浿江)의 우수(憂愁)에 눈물을 짓지 마라
장류(長流)의 패강(浿江), 그는 뵈지 안는 역사(歷史)의 한 구절. ― 첫 문화(文化)가 흘러나린 그의 살졌든 염통은 지난 백성이 마음과 함께 흰옷을 빨아 입든 곳이며, 아침 저녁, 위엄있게 솟은 성벽(城壁)의 그림자를 따라 씩씩한 젊은이가 말에게 물을 먹이든 곳이다. 아하, 아까운 이야기의 자최여, 거룩한 흐름이어.
패강(浿江)은 또한 세상의 절경(絶景)― 부벽루(浮碧樓)는 처녀와 같은 능라도(綾羅島)와 추파를 건니고 있고, 주암산(酒岩山) 밑을 핥고 내린 물은 청류벽(淸流壁) 앞을 감돌며, 대동문(大同門)의 보초병(步哨兵)인 연광정(練光亭)은 깊은 물 속을 드려다 보고있다. 금파은류(金波銀流)에 배띄워 마음껏 나려가 볼까, 최승대(最勝臺), 을밀대(乙密臺)에 올라 굽어 물줄기를 살피여나 볼까. (미(美)의 여신(女神)이어, 그대의 첨단(尖端)을 거른 기교(技巧)을 자랑하라.)
그러나, 이제 내 슬퍼 한다, 치를 떨며 슬퍼한다. 비단결 같은 봄바람이 온 우주(宇宙)를 애무(愛撫)할 때 한편 요리(料理)배로는 세상(世上) 잊은 남녀(男女)의 웃음이 흩어지는데 석탄(石炭)실은 깜정 사람들이 묵직한 노(櫓)에 숨차 하지 안는가. 그리고 밤묵는 떼목꾼의 노래ㅅ가락 처량하고, 여울탁에서 조개줍는 아낙네의 눈이 흐려져 있다. 더구나, 베니스의 곤도라와 비길 매생이의 모양이 알뜰도 하건만 겨울날 어름 우에 떨고 섰는 처자(妻子) 더욱 가엽구나.
이다지고 마음의 어두움을 던져주는 패강(浿江), 그럼 모든 것이 헛이냐, 네 가장 거룩하다는 그 흐름이, 그럼 모든것이 거짓이냐, 네 가장 아름답다는 그 전양(全樣)이. 모를꺼라, 그 속마음은 우수(憂愁)에 잠긴 그 속마음은…… 아하, 생각 하두새 가슴 짜갬이어.
그러나, 그러나 안된다. 초생달 아래 휘파람 불며 모래판을 지나는 사나이 같이 젊은 우리가 패강(浿江)의 우수(憂愁)에 눈물을 지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역(異域)에 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마음이 되여, 패강(浿江)의 속 우수(憂愁)를 간절히 살펴, 풀어내야 한다.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황해(荒海)를 건너는 사공아
먹장 같은 구름이 휘날고 우주(宇宙)를 저주(咀呪)하는 번개, 우뢰는 천지(天地)를 흔든다. 이제 사오나운 폭풍우(暴風雨)는 몰려 올 것이며 만경파원(萬頃波原)에 늘어선 파도(波濤)는 날 뛸 것이다. 사공아, 치를 잡은 사공아, 등대(燈臺) 없는 바다나마 앞으로 나아 가는가. 그러치 안으면 쫓겨 뱃머리 돌리려는가 깊은 밤중, 향방(向方) 잃은 나침판(羅針盤)만 바라보는 사공의 마음이여.
선인(先人)들이 흘리고 간 눈물의 자취는, 앙상한 바람에 갸웃거리는 갈숲을 벗하여 흘러 흘러 나려간 상처(傷處) 바든 옛터는 황해(荒海)를 건너는 젊은 사공의 눈앞에 다가 오나니 그대도 높이 춤추는 물굽이를 딸아 값없는 눈물을 뿌리려는가, 뿌리려는가.
아니다, 아니다. 아사지도록 악문 사공의 이 사이로는 금석(金石)을 녹일듯한 뜨거운 입김이 새여 나오며 잿빛 하늘을 치어다 보는 눈동자(瞳子)에서는 암시(暗示)의 불타는 빛을 발견했나니 엄숙(嚴肅)한 얼굴은 태풍(颱風)에 스치어 껌어 졌고, 뻗친 팔목은 날뛰는 물결에 시달려 철편(鐵片)같이 굳어졌다. 지금 무엇이 그에게 무섭고, 또한 거리낄 것인가. 패배(敗北)의 눈물도 그의 뺨에서 마른 지 벌써 오래다.
그러타면 젊은 사공아, 미다운 일꾼아 번쩍 고개를 돌려 바라 보아라. 이미 수많은 동지(同志)를 잡어갔고 또 잡어갈 바다는, 사나운 물즘생이 입을 딱 벌리고 사공의 힘 빠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바다는 출렁 출렁 대지(大地)를 울려 그대를 비웃고 있지 않느냐? 황해(荒海)를 건너는 사공아, 피끓는 젊은아, 어서 손빨리 풍파(風波)와 싸울 준비를 하여라. 돛을 내리고 닻을 감어라, 다시 앞만 보고 치를 힘있게 잡어라 그리고 나아가자, 이 노도(怒濤), 광풍(狂風)을 뚫고 앞으로 앞으로―.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황혼(黃昏)의 노래
미끄러운 습기(濕氣)가 우주(宇宙)를 나려 깔고, 뽀르릉 뽀르릉 적은 참새떼 깃 찾아 안개 속을 헤엄칠 때 그 안개 속 뭉키는 저녁 연기(煙氣)를 따라 날씬한 황혼(黃昏)이 도시(都市)우에 잠자리를 편다.
이맘 때, 어여쁜 황혼(黃昏)이 지구(地球)와 귓속말을 할 때, 북극(北極) 얼음 섞인 황량(荒凉)한 야원(野原)에는 암 찾는 껌정 곰이 미칠 듯이 설레일 것이며, 남해(南海)의 고도(孤島), 노을 빛 빗긴 야자수(椰子樹) 그늘 속엔 나체(裸體)의 토인처녀(土人處女)가 아지 못할 웃음을 짓고 있을 것이다. 황혼(黃昏)아, 거문고에 손을 얹어 사랑의 노래를 부르자.
하거든, 감상시인(感傷詩人)이 유원(幽遠)한 명상(瞑想)에 눈감을 때어든, 어째서 저 늙은이 죽은 자식을 부둥켜 안고 울고 있는가, 어째서 저 헐벗은 애 돌자개에 발이 터져 넘어 졌는가, 아하,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다시 황혼(黃昏)의 가슴을 짚어본다.
더구나, 이런 때 생각키우는 곳은, 마음이 달리는 곳은, 고향(故鄕)의 황혼(黃昏), 시냇물 소리에 새드는 황혼(黃昏), 햇빛에 타서 깜해진 가마귀떼 그냥 태양(太陽)의 뒤를 쫓고,
방앗간 지붕 우에 박꽃이 웃는, 그 고운 황혼(黃昏),― 그러나 그곳에도 고역(苦役)에 깐 어버이의 얼굴이 있었고, 굶어 맥없이 자빠진 어린 동생이 있지 안았던가.
황혼(黃昏)아, 나는 노래를 부른다, 애상(哀傷) 가득한 목청을 찢고, 비분(悲憤)의 노래를…… 너도 거문고줄을 끊고 나의 노래소리에 귀 기울이라.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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