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영 시인 / 무궁화
뒷동산에 핀 꽃은 흰빛 무궁화 개울 앞에 핀 꽃은 보라 무궁화 피고 피고 또 피어 수를 놓나니 금수강산 삼천리 아름답고나
하루 새에 사꾸란 다 떨어져도― 숲속에서 귀뚜리 울 때까지도 피고 피고 또 피는 우리 무궁화― 씩씩하게 뻗어날 우리 맘일세―
꽃은 피어 그날 일 간직을 하고― 꽃은 져도 천만 년 씨를 남기는― 거룩하다 무궁환 조국의 마음― 만세 만세 만만세 무궁화 동산―
별나라, 1945. 12
박세영 시인 / 바다의 여인
바다의 바람은 송림을 울리고 갈매기 미칠 듯이 날아 헤매는 구름 낀 낮은 세상을 모르는 젊은 놈의 가슴을 우울하게 만들어 구름이 벗어지기를 기다리는지 나체의 흑인과 같이 하늘을 쳐다본다 도시의 ××××× 아들들은 한 녀석 두 녀석씩 나와서―
구름은 검은데 더 검어 바다는 금방에 폭풍우가 일어 들어 갈매기도 쫓겨든다 숲으로 한 놈씩 두 놈씩 그리하여 저들의 향락장(享樂場)은 대포를 맞는 도시와도 같이 깨어진다 무너진다 저기압에 눌려 호흡조차 할 수 없는 이 바다에 바다를 가르려는 소리 송림을 쓰러뜨리는 소리 파도에 쫓기는 소리 이 어지러운 움직임은 우리의 마음과 이같이도 같단 말이냐
그러나 어부의 아내가 어제까지도 바닷가 해당화 덤불에 숨어 그 녀석의 꼬임에 빠져 이같이 말하였단다 "서울 손님 나는 당신이 그리워요" 그럴 때마다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바다의 시악씨여 어여쁜 시악씨여" 그 녀석은 이 같이 외쳤단다
저기 숲 속에 보이는 건 어부의 집 세상이 무너지거나 달아나거나 저희들은 다만 고요한 속삭임에 열중되어 오늘의 낮을 보내고 있다 바다는 이미 수라장이 되고 유물(遺物)을 깨뜨리고 말았을 때 밤이 되어 숲 사이로 창빛이 빗기는데도 어느 틈엔지 그 녀석은 여인과 함께 아메리카 영화와도 같이 지랄을 한다
숨이 죽은 바닷가의 밤은 냉혈류(冷血類)의 탄식으로 찼을 때 그 녀석은 아낙네의 험한 손을 놓을 줄 모르고 그 말에 마음을 모조리 빼앗기었다 "나를 서울로 가게 하여주세요 당신이 나는 그리워요 비린내 나는 사나이 나는 싫어요"
"나는 영원히 그대를 사랑하리라" 이 같은 말은 그 녀석에서 백 번이나 나왔다 그럴 때마다 그 여인은 도시의 환락을 꿈꾸었다 미구에 잊혀질 저의 괴로움을 기뻐하여 내일로 떠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녀석은 이튿날 아침 그 여인도 몰래 좀도둑같이 달아났다
전적(戰跡)과 같은 바닷가의 모양 전일과 같이 해당화 덤불에 나타나는 그 여인의 야윈 모양도 마치 폭풍우에 시달린 해빈(海濱)과 같구나 저희들의 향락장은 모두가 파멸된 채 강렬한 늦은 아침의 태양을 쏘이고 있을 때 트렁크 들고 돌아가는 녀석들 제방의 길은 자동차로 분잡하였다
그러나 어부의 아내의 빙수와 같은 탄식을 누가 알랴 "배불뚝이 그 녀석은 속임쟁이 나는 부끄럽다 어찌 또 내 사나이를 보랴 그 녀석의 말을 참으로 알았던 나는 차라리 바다 저 깊이 빠질까 보다 그놈은 내 몸을 휘정거리고 달아났으니 아― 분하구나 그러나 나는 목숨이 있을 때까지 싸우리라 그놈들을 개로 알리라 저희들은 거짓 세상에서 길러지고 또 익숙해져서 가는 곳 사귀는 곳마다 거짓을 정말로 행세하는 놈들이구나 내 한번 속았지 또 속으랴 오―저기서 흰 돛단배가 오는구나 낯익은 저 배! 아마도 나의 사나이가 돌아오는 게다 타는 별에 지지리 탄 내 사나이 그리고 거짓이란 깨알만큼도 모르는 씩씩한 사나이를 나는 왜 차려 들었나 저 배에서 노도와 싸우며 집이라고 아내라고 돌아오는 그이가 오직 내 사나일 뿐이다 세상의 가난한 계집은 이때까지 얼마나 그놈들에게 짓밟히었니 나는 맞으리라 깨끗한 마음 불타는 마음으로 나의 남편을 맞으리라"
지금에 그 여인은 쏠려오는 파랑(波浪)을 거슬러 돌아오는 어선을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저도 모르게 나간다 배에서 북소리 둥둥 붉은 기가 펄펄 날릴 때―
음악과 시, 1930. 8
박세영 시인 / 봄피리
모든 새들은 노래를 배우러 가서 아직도 안 돌아온 때, 뒷동산에선 봄의 노래가 들려와 해쓱했던 세상에 봄이여, 오라고 부르오니 마을의 따님들은 버들피리만 불어서.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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