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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박세영 시인 / 무궁화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5.

박세영 시인 / 무궁화

 

 

뒷동산에 핀 꽃은 흰빛 무­궁화

개울 앞에 핀 꽃은 보라 무­궁화

피고 피고 또 피어 수를 놓­나니

금수강산 삼천리 아름답­고나

 

하루 새에 사꾸란 다 떨어­져도―

숲속에서 귀뚜리 울 때까­지도­

피고 피고 또 피는 우리 무­궁화―

씩씩하게 뻗어날 우리 맘­일세―

 

꽃은 피어 그날 일 간직을 하고―

꽃은 져도 천만 년 씨를 남­기는―

거룩하다 무궁환 조국의 마음―

만세 만세 만만세 무궁화­ 동산―

 

별나라, 1945. 12

 

 


 

 

박세영 시인 / 바다의 여인

 

 

바다의 바람은 송림을 울리고

갈매기 미칠 듯이

날아 헤매는 구름 낀 낮은

세상을 모르는 젊은 놈의 가슴을 우울하게 만들어

구름이 벗어지기를 기다리는지 나체의 흑인과 같이 하늘을 쳐다본다

도시의 ××××× 아들들은

한 녀석 두 녀석씩 나와서―

 

구름은 검은데 더 검어 바다는 금방에 폭풍우가 일어 들어

갈매기도 쫓겨든다 숲으로 한 놈씩 두 놈씩

그리하여 저들의 향락장(享樂場)은 대포를 맞는 도시와도 같이 깨어진다 무너진다

저기압에 눌려 호흡조차 할 수 없는 이 바다에

바다를 가르려는 소리 송림을 쓰러뜨리는 소리 파도에 쫓기는 소리

이 어지러운 움직임은 우리의 마음과 이같이도 같단 말이냐

 

그러나 어부의 아내가 어제까지도 바닷가 해당화 덤불에 숨어

그 녀석의 꼬임에 빠져 이같이 말하였단다

"서울 손님 나는 당신이 그리워요"

그럴 때마다 여인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바다의 시악씨여 어여쁜 시악씨여"

그 녀석은 이 같이 외쳤단다

 

저기 숲 속에 보이는 건 어부의 집

세상이 무너지거나 달아나거나

저희들은 다만 고요한 속삭임에 열중되어 오늘의 낮을 보내고 있다

바다는 이미 수라장이 되고 유물(遺物)을 깨뜨리고 말았을 때

밤이 되어 숲 사이로 창빛이 빗기는데도

어느 틈엔지 그 녀석은 여인과 함께

아메리카 영화와도 같이 지랄을 한다

 

숨이 죽은 바닷가의 밤은

냉혈류(冷血類)의 탄식으로 찼을 때

그 녀석은 아낙네의 험한 손을 놓을 줄 모르고

그 말에 마음을 모조리 빼앗기었다

"나를 서울로 가게 하여주세요

당신이 나는 그리워요

비린내 나는 사나이 나는 싫어요"

 

"나는 영원히 그대를 사랑하리라"

이 같은 말은 그 녀석에서 백 번이나 나왔다

그럴 때마다 그 여인은 도시의 환락을 꿈꾸었다

미구에 잊혀질 저의 괴로움을 기뻐하여

내일로 떠나자는 것이다

 

그러나 그 녀석은 이튿날 아침 그 여인도 몰래 좀도둑같이 달아났다

 

전적(戰跡)과 같은 바닷가의 모양

전일과 같이 해당화 덤불에 나타나는 그 여인의 야윈 모양도

마치 폭풍우에 시달린 해빈(海濱)과 같구나

저희들의 향락장은 모두가 파멸된 채

강렬한 늦은 아침의 태양을 쏘이고 있을 때

트렁크 들고 돌아가는 녀석들

제방의 길은 자동차로 분잡하였다

 

그러나 어부의 아내의 빙수와 같은 탄식을 누가 알랴

"배불뚝이 그 녀석은 속임쟁이

나는 부끄럽다 어찌 또 내 사나이를 보랴

그 녀석의 말을 참으로 알았던 나는

차라리 바다 저 깊이 빠질까 보다

그놈은 내 몸을 휘정거리고 달아났으니

아― 분하구나

그러나 나는 목숨이 있을 때까지 싸우리라

그놈들을 개로 알리라

저희들은 거짓 세상에서 길러지고 또 익숙해져서

가는 곳 사귀는 곳마다 거짓을 정말로 행세하는 놈들이구나

내 한번 속았지 또 속으랴

오―저기서 흰 돛단배가 오는구나 낯익은 저 배!

아마도 나의 사나이가 돌아오는 게다

타는 별에 지지리 탄 내 사나이

그리고 거짓이란 깨알만큼도 모르는 씩씩한 사나이를

나는 왜 차려 들었나

저 배에서 노도와 싸우며

집이라고 아내라고 돌아오는 그이가 오직 내 사나일 뿐이다

세상의 가난한 계집은 이때까지 얼마나 그놈들에게 짓밟히었니

나는 맞으리라 깨끗한 마음 불타는 마음으로 나의 남편을 맞으리라"

 

지금에 그 여인은 쏠려오는 파랑(波浪)을 거슬러 돌아오는 어선을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저도 모르게 나간다

배에서 북소리 둥둥 붉은 기가 펄펄 날릴 때―

 

음악과 시, 1930. 8

 

 


 

 

박세영 시인 / 봄피리

 

 

모든 새들은 노래를 배우러 가서

아직도 안 돌아온 때,

뒷동산에선 봄의 노래가 들려와

해쓱했던 세상에

봄이여, 오라고 부르오니

마을의 따님들은

버들피리만 불어서.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박세영 시인(朴世永.1902.7.7∼1989.2.28)

시인. 호는 백하(白河). 경기도 고양 출생. 가난한 선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1917년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송영(宋影) 등의 동기생들과 함께 소년문예구락부를 조직하고 동인지 [새누리]를 펴냈다. 졸업 후 중국으로 건너가 송영 등이 주도한 사회주의 문화단체인 염군사에 중국 특파원 자격으로 가담했다. 1924년 귀국한 박세영은 이호ㆍ이적효 등과 교유하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학습을 했으며, 1925년 연희전문학교에 편입하고 그해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가입했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46년 월북한 뒤로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출판부장 등을 거쳐 1948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67년 [조선작가동맹] 상임위원 등을 역임했다. 작품 활동은 1927년 [문예시대]에 <농부 아들의 탄식> <해빈의 처녀> 등을 발표하면서 비롯되었다. 이어 작품으로 <산골의 공장>(신계단.1932.11) <산제비>(낭만.1936.11) <위원회 가는 길>(우리문학.1946.1) 등이 있다. 주목할 만한 작품으로는 <산제비> <오후의 마천령> <타적>등이 있다. 1959년 북한의 애국가를 작사한 공로로 국기훈장 2급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