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영 시인 / 각서
내게 주는 모든 말은 사람이 싫어하는 말이건 다 하여 주시오.
설혹 잘함이 있더라도 꾸짖어 주시오, 못난이라 하여 주시오.
나를 추켜주는 말은 이는 독약을 마시게 함이나 같으오니 솟아오르는 싹을 분질러 버리는 폭풍우와 같으오니.
내게 주는 모든 말은, 비웃는 말이라도 하여주시오, 그것이 나를 살리는 말이 될 것이오니 아―친구여! 모든 선지자여!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박세영 시인 / 그이가 섰는 딸기나무로
익어서 자줏빛이 된 딸기나무로 그리운 이를 찾아갔다. 시냇가 딸기 열린 언덕으로.
조약돌, 바위, 험한 시냇가는 번듯하고 맑기도 하여라.
언덕에 열린 새빨간 딸기, 나의 마음은 선혈의 끓는 방울같이 그의 손은 딸기로 가득하다.
마음은 타오를 때, 그는 우울에 싸여 내일은 가신다지요, 그와 나는 시내를 떠날 줄 모르고.
붉은 딸기나무는 스러져가는 이슬처럼 성겨 가고 아니 보일 때, 그와 나는 옛을 추억하여 한숨 지고 말없이 설움의 하소연을 하다. 물은 흐르고 바위는 씻길 때, 우리는 사랑에 애태우는 설움에 싸인 청춘이 되어라.
시름 없는 걸음으로 가시넝쿨을 헤치고 나와, 우리는 또 헤어지게 되다, 그는 넋 잃은 것같이 언덕으로 넘어갈 때.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박세영 시인 / 다시 또 가는가
살을 에이는 추위에 도시도 언 듯이 비명할 때 너는 젊은 몸이 낯설은 땅에 누워 있어, 서러운 눈물에 베개가 젖고, 고향 생각에 앞이 흐렸으리라.
아하 하늘같이 이상이 높고, 봄날같이 보드랍던 네 기분을, 누가 다 앗아갔단 말이냐!
그래 너는 고향으로 다시 와, 네 재주를 굳게 믿고, 네 몸을 담아 줄 곳을 찾았지마는, 너는 그 추위가 풀리기도 전에 서 푼 짜리 벌이에 목숨을 걸고 다시 팔려가는 몸이 되지 않으면 아니 되는가?
그러면 가거라 젊은 청춘 네가, 조금도 원망치 않으며, 쓸쓸히도 겨울을 안고, 전사와 같이 떠나가는 오―그 마음이 사랑스럽고나.
너는 너의 이상을 불사른 지 오래였고, 유산(琉酸)을 뿌렸다고 생각했지만, 너의 이상은 타지도 않았고, 시들지도 않은 것을 나는 똑똑히도 본다.
나의 젊은 애야 가거라, 북극의 하늘이 너를 기다리고, 매운 바람이 너를 기다린다, 오―그리하여 너는 그곳에서 참 삶을 찾으리라.
산제비, 중앙인서관,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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