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시인 / 태양(太陽)의 임종(臨終)
나는 너를 겨누고 눈을 흘긴다. 아침과 저녁, 너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태양(太陽)이여, 네게는 운명(殞命)할 때가 돌아오지 않는가'하고.
억만년(億萬年)이나 꾸준히 우주(宇宙)를 밭 갈고 있는 무서운 힘과 의지(意志)를 가지고도 너는 눈이 멀었다
사람은 뒷간 속의 구데기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정의(正義)의 심장(心臟)은 미친 개의 잇발에 물려 뜯기되 못본 체하고 세기(世紀)와 세기(世紀)를 밟고 지나가는 너의 발자취!
너는 ○억만(億萬) 촉광(燭光)의 엄청난 빛을 무심(無心)한 공간(空間)에 발사(發射)하면서 백주(白晝)에 캄캄한 지옥(地獄) 속에서 울부짖는 무리에게는 반딧불만한 편광(片光)조차 아끼는 인색(吝嗇)한 놈이다.
네 얼굴에 여드름이 돋으면 지각(地殼)에 화산(火山)이 터지고 네 한 번 진노(震怒)하면 문명(文明)을 자랑하던 도시(都市)도 하루 아침에 핥어버리는 몇만도(萬度)의 잠열(潛熱)을 지배(支配)하는 위력(偉力)을 땅 속에 감추어 두고도 한 자루의 총칼을 녹일 만한 작은 힘조차 우리 젊은 사람에게 빌려주고저 하지 않는다.
해여 태양(太陽)이여! 대륙(大陸)에 매어달린 조그만 이 반도(半島)가 네 눈에는 쓸데 없는 맹장(盲腸)과 같이 보이는가? 우주(宇宙)를 창조(創造)하신 하나님도 이다지도 이다지도 짓밟혀만 살라고 악착한 운명(運命)의 부작(符爵)을 붙여서 우리의 시조(始祖)부터 흙으로 빚었더란 말이냐?
오오 위대(偉大)한 항성(恒星)이여, 일분(一分) 동안만 네 궤도(軌道)를 미끄러져 한 걸음만 가까이 지구(地球)로 다가오라! 그러면 우리는 모조리 타 죽고나 말리라. 그도 못하겠거던 한 걸음 뒤로 물러서라― 북극(北極)의 흰 곰들이나 우리의 시체(屍體) 위에서 즐거이 뛰놀며 자유(自由)롭게 살리라.
나는 너를 겨누고 눈을 흘긴다. 아침과 저녁 네가 지평선(地平線)을 넘은 뒤까지도 `차라리 너의 임종(臨終) 때가 돌아오지나 않는가' 하고―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토막 생각
날마다 불러 가는 아내의 배, 낳는 날부터 돈 들 것 꼽아 보다가 손가락 못 편 채로 잠이 들었네.
○
뱃속에 꼬물거리는 조그만 생명(生命) `네 대(代)에나 기를 펴고 잘 살아라!' 한 마디 축복(祝福) 밖에 선사할 게 없구나.
○
`아버지' 소리를 내 어찌 들으리 나이 삼십(三十)에 해 논 것 없고 물려줄 것이라곤 `선인(鮮人)'밖에 없구나
○
급사(給仕)의 봉투 속이 부럽던 월급(月給)날도 다시는 안올상 싶다 그나마 실직(失職)하고 스무닷새 날.
○
전등(電燈) 끊어 가던 날 밤 촉(燭)불 밑에서 나어린 아내 눈물 지며 하는 말 `시골 가 삽시다, 두더지처럼 흙이나 파먹게요.'
○
오관(五官)으로 스며드는 봄 가을 바람인듯 몸서리 쳐진다. 조선(朝鮮) 팔도(八道) 어느 구석에 봄이 왔느냐.
○
불 꺼진 화로(火爐) 헤집어 담배 꼬토리를 찾아 내듯이 식어 버린 정열(情熱)을 더듬어 보는 봄 저녁.
○
옥중(獄中)에서 처자(妻子) 잃고 길거리로 미쳐난 머리 긴 친구 밤마다 백화점(百貨店) 기웃거리며 휘파람 부네.
○
선술 한 잔 내라는 걸 주머니 뒤집어 털어 보이고 돌아서니 카페의 붉고 푸른 불.
○
그만하면 신경(神經)도 죽었으련만 알뜰한 신문(新聞)만 펴 들면 불끈불끈 주먹이 쥐어지네.
○
몇 백년(百年)이나 묵어 구멍 뚫린 고목(古木)에도 가지마다 파릇파릇 새엄이 돋네 뿌리마저 썩지 않은 줄이야 파 보지 않은들 모르리.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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