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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심훈 시인 / 태양(太陽)의 임종(臨終) 외 1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5.

심훈 시인 / 태양(太陽)의 임종(臨終)

 

 

나는 너를 겨누고 눈을 흘긴다.

아침과 저녁, 너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태양(太陽)이여, 네게는 운명(殞命)할 때가 돌아오지 않는가'하고.

 

억만년(億萬年)이나 꾸준히 우주(宇宙)를 밭 갈고 있는

무서운 힘과 의지(意志)를 가지고도 너는 눈이 멀었다

 

사람은 뒷간 속의 구데기만도 못한 대접을 받고

정의(正義)의 심장(心臟)은 미친 개의 잇발에 물려 뜯기되

못본 체하고 세기(世紀)와 세기(世紀)를 밟고 지나가는 너의 발자취!

 

너는 ○억만(億萬) 촉광(燭光)의

엄청난 빛을 무심(無心)한 공간(空間)에 발사(發射)하면서

백주(白晝)에 캄캄한 지옥(地獄) 속에서 울부짖는 무리에게는

반딧불만한 편광(片光)조차 아끼는 인색(吝嗇)한 놈이다.

 

네 얼굴에 여드름이 돋으면 지각(地殼)에 화산(火山)이 터지고

네 한 번 진노(震怒)하면 문명(文明)을 자랑하던 도시(都市)도

하루 아침에 핥어버리는 몇만도(萬度)의

잠열(潛熱)을 지배(支配)하는 위력(偉力)을 땅 속에 감추어 두고도

한 자루의 총칼을 녹일 만한 작은 힘조차

우리 젊은 사람에게 빌려주고저 하지 않는다.

 

해여 태양(太陽)이여!

대륙(大陸)에 매어달린 조그만 이 반도(半島)가

네 눈에는 쓸데 없는 맹장(盲腸)과 같이 보이는가?

우주(宇宙)를 창조(創造)하신 하나님도

이다지도 이다지도 짓밟혀만 살라고

악착한 운명(運命)의 부작(符爵)을 붙여서

우리의 시조(始祖)부터 흙으로 빚었더란 말이냐?

 

오오 위대(偉大)한 항성(恒星)이여,

일분(一分) 동안만 네 궤도(軌道)를 미끄러져

한 걸음만 가까이 지구(地球)로 다가오라!

그러면 우리는 모조리 타 죽고나 말리라.

그도 못하겠거던 한 걸음 뒤로 물러서라―

북극(北極)의 흰 곰들이나 우리의 시체(屍體) 위에서

즐거이 뛰놀며 자유(自由)롭게 살리라.

 

나는 너를 겨누고 눈을 흘긴다.

아침과 저녁 네가 지평선(地平線)을 넘은 뒤까지도

`차라리 너의 임종(臨終) 때가 돌아오지나 않는가' 하고―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토막 생각

 

 

날마다 불러 가는 아내의 배,

낳는 날부터 돈 들 것 꼽아 보다가

손가락 못 편 채로 잠이 들었네.

 

 

뱃속에 꼬물거리는 조그만 생명(生命)

`네 대(代)에나 기를 펴고 잘 살아라!'

한 마디 축복(祝福) 밖에 선사할 게 없구나.

 

 

`아버지' 소리를 내 어찌 들으리

나이 삼십(三十)에 해 논 것 없고

물려줄 것이라곤 `선인(鮮人)'밖에 없구나

 

 

급사(給仕)의 봉투 속이 부럽던

월급(月給)날도 다시는 안올상 싶다

그나마 실직(失職)하고 스무닷새 날.

 

 

전등(電燈) 끊어 가던 날 밤 촉(燭)불 밑에서

나어린 아내 눈물 지며 하는 말

`시골 가 삽시다, 두더지처럼 흙이나 파먹게요.'

 

 

오관(五官)으로 스며드는 봄

가을 바람인듯 몸서리 쳐진다.

조선(朝鮮) 팔도(八道) 어느 구석에 봄이 왔느냐.

 

 

불 꺼진 화로(火爐) 헤집어

담배 꼬토리를 찾아 내듯이

식어 버린 정열(情熱)을 더듬어 보는 봄 저녁.

 

 

옥중(獄中)에서 처자(妻子) 잃고

길거리로 미쳐난 머리 긴 친구

밤마다 백화점(百貨店) 기웃거리며 휘파람 부네.

 

 

선술 한 잔 내라는 걸

주머니 뒤집어 털어 보이고

돌아서니 카페의 붉고 푸른 불.

 

 

그만하면 신경(神經)도 죽었으련만

알뜰한 신문(新聞)만 펴 들면

불끈불끈 주먹이 쥐어지네.

 

 

몇 백년(百年)이나 묵어 구멍 뚫린 고목(古木)에도

가지마다 파릇파릇 새엄이 돋네

뿌리마저 썩지 않은 줄이야 파 보지 않은들 모르리.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沈熏) 시인 / 소설가.영화인) 1901년-1936년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 출생. 아버지 심상정(沈相珽)의 3남 1녀 중 3남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