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시인 / 우리의 가슴은 위대하나니
옥순아, 가난과 고생에 차혀 커가던 옥순아! 너는 아직 그때를 잘 기억하고 있겠지? 궂은 비 나리는 밤, 빗방울이 처마 끝을 구을러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국경(國境)을 넘은 아버지 어머니가 몹시 그립다고, 나의 무릎에 눈물 젖은 얼굴을 파묻고 가슴에 맺힌 몽아리를 풀어 보려 하던 때를…… 지금 생각 하면 까마득한 옛날의 한 이야기와도 같건만. 옥순아! 그러던 네가 또한 이 젖은 곳을 떠나게 되었을 때, 삶의 사슬에 얽매어 그해 봄 서로 헤어지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을 때 비록 몸은 갈라서도 한 뜻을 품고 나아가는 동생이라는 것을 믿자고 젖빛 안개 낀 새벽 촌역(村驛)에서 외친 목소리, 언제까지나 이 귀에 쟁쟁히 들리는구나. 그때도 너는 마음 약한 쳐녀애가 아니었다.
사랑하는 누나―옥순아! 요새는 우리에게 더 한층 괴로운 여름철이다. 나는 항상 너의 원대로 튼튼한 몸으로 있다만 여기서도 몸이 약하던 네가 지금껏 고생에 질려 얼마나 더 얼굴이 핼쑥해졌니, 파리해졌니? 그 크던 눈이 더욱 크게 되여 나타나 뵈는구나. 그러나,옥순아! 우리는 어데까지든지 지금의 고통을 박차고 마음을 살려야 한다, 또 지켜야 한다. 그리고 늘 한때의 감정(感情)을 이겨야 한다. 헤친 우리의 가슴은 위대하나니, 위대하나니.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우주(宇宙)를 향하여 호령 하나니
한때에 주인을 만나 해빛을 보았고, 지금은 할일 없이 벽에 걸리운 칼― 그러나 무섭게 빛 변한 핏줄기! 아직껏 남은 부러진 칼날의 힘! 우리는 오날 그 칼의 마음을 잘 아나니 어젯날 일을 생각코 안타까워 함을……
무너진 성벽(城壁) 밑에 이끼 낀 비석, 부러진 칼을 사랑하든 투사(鬪士)의 무덤이어. 일을 채 못 이루고 칼자루를 남길 줄 뉘라서 믿었으며 생각이나 하였을까. 뜻 않았던 화살에 심장(心臟)을 맞고서 꺾인 칼날을 뒷사람에게 맡겼나니.
이렇듯이 많은 쓰라림을 품고 있는 칼―. 굳게 닫았던 성문도 깨여진 지 오래고, 지키든 장사는 뼈까지 썩었으며 먹을 것을 찾는 가마귀떼는 저녁 하늘을 울고 헤매이는데, 석양(夕陽)빗긴 벽 위에서 칼은 옛꿈을 꾸고 있구나.
무섬 없이 칼날을 휘날리며 용감히 싸우든 지난날의 장군― 우리의 어버이를 생각할 때, 맹렬(猛烈)히 불타는 가슴을 억제키 어려워 두 팔목을 부르것고 성(城) 돌에 올라 힘있게 부러진 칼을 높이 드나니, 우주(宇宙)를 향하여 호령 하나니 참다운 젊은이가 있거들랑 뛰여 나와다고.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이역(異域)에서 부른 노래
빼앗긴 것 없이 빈듯한 마음, 찬 것 없이 무득한 가슴, 관대(寬大)한 우주(宇宙)의 애인(愛人)과 껴안고 입맞추겠다던 큰 생각이 때로 이는 자칫한 외로움에 갈래갈래 찢기운다.
더구나 피빨린듯이 창백한 조각달이 찬 적요(寂寥)를 도웁고, 더듬는 안마(按摩)의 쇠피리 소리가 흰 고독(孤獨)에 숨여들 때 눈 우에 갈팡질팡하는 거지애의 거름결 같이도 젊은이의 환상(幻想)은 드높은 하늘에 닿고, 속깊은 지심(地心)을 뚫고, 더북한 숲속에서 노숙(露宿)하고, 황망한 사해(砂海)를 걷고, 개척자(開拓者)의 구가(謳歌)를 부르고, 유랑민(流浪民)의 비가(悲歌)를 외인다.
○
그렇다, 이역(異域)의 고독(孤獨).― 인제는 이 곳의 야릇한 낭만적(浪漫的) 동경(憧憬)도, 허달뜬 사나이의 정열(情熱)을 빼먹는 도회(都會)의 매력(魅力)도, 투명(透明)한 가을 바람에 가랑잎 날듯이 과거(過去)로 굴러가버렸다. `안전지대(安全地帶)'에 서서도 오히려 마음이 놓이지 않는 이 곳, 그 속에서 젊은이는 향수(鄕愁)의 고적(孤寂)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가파로운 바위에 붙은 등산자(登山者)같이 긴장(緊張)된 마음이, 단두대(斷頭臺)에 나아가는 용사(勇士)의 최후(最後)같이 단순(單純)한 마음이 고향(故鄕)의 전신을 휘잡아 흔들 때, 휘잡아 흔들 때. 그럼, 창 밑을 두드리는 빗소리에 실려 자꾸만 자꾸만 하늘 저 편 구름 솟는 곳으로 날으는 가슴, 거기서 늙어빠진 부부(夫婦)의 참혹한 꼴을 발견했다고 백합화(百合花)를 보는 듯한 안일(安逸)을 찾아 돌아올 텐가, 그리고 주춧돌마저 없어지려는 옛집터에 여우가 드나들게 됐다고 다시 풀잎에 눈물을 뿌리며 돌아올 텐가. 헤웠다 놓으면 퉁기는 탄력성(彈力性) 잇는 고무와 같이 백만 번 두들겨도 반발(反撥)할 젊은이의 속가슴이.
이 밤에 뛰어나가 망향가(望鄕歌)를 부르고 싶구나, 미친 여인(女人)같이 뒷골목을 싸돌며 망향가(望鄕歌)를 부르고 싶구나.
○
그러나, 그러나 젊은이는 또한 다시 한 번 이역(異域)의 애수(哀愁)를 찢은 후 히멀뚝한 이 곳 가을 하늘에서 새 힘을 얻고, 몰려온 무리와 함께 새 마음을 굳게 만들 수 없는가.
가엾은 겨레의 눈물의 형상― 이 날의 대도회(大都會)의 정맥혈(靜脈血)이나 된 듯이 일을 찾아 힘없는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이 날의 대도회(大都會)의 수없는 기아(棄兒)나 된 듯이 빈민촌(貧民村) 우리 속에 우물거리는 미이라들, 그들에게는 고향(故鄕)이 그립지 않고, 여수(旅愁)의 쓰라림이 없을 것인가. 아니다, 골골이 쑤심을 받은 그들의 가슴은 몇 갑절의 강렬(强烈)한 향수(鄕愁)의 불길이 혀를 채고 있다. 그렇지만 그날 그날의 삶에 쫄리운 가련한 무리, 못내 귀향의 값있는 희열을 바사트리고 마는 것이다.
포도(鋪道) 우에 쭈그러진 헌 구두짝을 보고 오늘의 그들의 송장같은 얼굴을 그려봄이어, 가로(街路)에 선 실버들이 밤바람에 시든 것을 보고 닥쳐 올 그들의 앞날을 염려함이어.
○
옳다. 젊은이는 이같이 덧없은 분위기 속에서, 깊은 바다속같은 헤매임에서 다시금 구름에 싸였던 태양―크나큰 빛을 발견했나니 뭇 나비가 꽃을 사모하는 듯한 아름다운, 또한 상제없는 상여를 보는 듯한 외로운 귀향(歸鄕)을 꾀함보다도 이역(異域)의 비애와 함께 고향의 참상(慘狀) 속에 묻혀 새롭게 빛나는 희망(希望)을 찾아내기로 했다. 한 계집을 새에 두고 다투는 두 사나이의 격분한 몸뚱이 같이 세찬 두 갈래의 괴로움이 젊은이를 뒤채이고 있으나, 젊은이를 뒤채이고 있으나.
이 날에 뛰어나가 고함을 치고 싶구나, 새벽 나팔(喇叭)같이 우주(宇宙)를 깨워 놓을 고함을 치고 싶구나.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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