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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황순원 시인 / 석별(惜別)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2.

황순원 시인 / 석별(惜別)

 

 

말없이 가로(街路)로 걷던 두 사람의 심사,

침묵(沈黙) 속에서 서로의 뜻을 통(通)케 하려던 마음이어.

공장에 울리는 싸이렌도 하늘에 반짝이는 별도 무심하구나.

친구의 나누임, 애타는 이별(離別).

 

군은 여러번 자살(自殺)을 도모(圖謀) 했었지?

철도(鐵道), 강(江)물, 독약(毒藥), 칼날, 농끈,―이 주마등(走馬燈) 같이 군의 뇌(腦)를 잡어 흔들었나니,

세상의 헛됨을 분통(憤痛)히 여김이 아니였던가.

그러나 자살(自殺)은 약자(弱者)의 짓이라는 것을 깨달었을 때,

다시금 군의 앞에는 `삶의 힘'이 닥쳐 오곤 하였었다.

 

그러던 군이 이제 별다른 포부(抱負)를 갖고,

가난뱅이 집, 아니 평양을 떠나게 되었다.

처음엔 상경(上京), 다음에는 발닿는 곳으로 가겠다고?

그렇다 군의 말처럼 타락(墮落)은 말고, 승리(勝利)의 깃발을 잡도록만 해다고.

 

그러면 군아, 양(梁)군아,

가가, 떠나가라.

눈물 젖은 나의 수건을 바라보며, 떠나가거라.

―이 눈물은 헤여짐에 있어서 갑 없는 줄은 알면서도

어찌할 수 없이 속으로 솟는 것을, 아하 쏟아지는 것을……

 

자, 군아 용기를 내라, 나는 마지막으로 합장(合掌)하여 바란다.

군이 세상에 나선 이상 그 물결에 거슬려 서라도, 누가 네게 반대(反對)를 한대도

꾹 잡은 신념(信念)만을 변치 마라.

그리고, 우리가 할 일을 잊지 말아다고.

 

오호, 떠남이어.

…………

오호, 기억하라, 만날 날을……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압록강(鴨綠江)의 밤이어

 

 

물, 물, 물.

흐른다, 눈에 충혈(充血) 되 듯이 붉은 흙물이 흐른다.

성난 듯이,우는 듯이,압록강(鴨綠江)아, ―

 

길 떠나는 나그네의 심회(心懷)를 욱여내는 국경(國境)의 밤하늘,

뵈누나, 저 어렴픗한 배전의 등(燈)들이,

들리누나, 저 물쏘리가, 그리고 국경순경(國境巡警)의 발소리가.

내 홀로 늦은 봄 강가에 서서 마음을 가다듬고 있나니,

압록강(鴨綠江)의 밤경치에 새로운 맛을 찾고 있나니.

 

이곳은, 바로 탁류(濁流)가 밤공기를 짜개는 이곳은,

소란한 말굽소리가 대지(大地)를 흔들어 놓을 때마다

이적(夷狄)의  창(槍)과  화살을  막어,  물리치든  자연(自然)의  대참호(大塹濠) 엿고,

아침햇빛 맞은 지붕에 입 맞추고 있는 한쌍의 비둘기에 눈을 줄만한 평화(平和)한 때면

가을달 나린 물 우에 천만 사랑의 노래를 불러 띄워 보내든 곳이다.

한데, 아 마땅히 숭엄(崇嚴)함에 머리를 숙일만 한데, 이것이 웬 일일까,

한번 싸움에 진 수탉이 항상 쫓기우듯이

오늘에는 다못 서러운 눈물의 수탄장(愁嘆場)이 되고 말았단 말이.

 

그랬더니 정성을 놓고 다시 마음을 살폈더니만,―

나제, 꾸릿빛 옷 등을 벗어제친 노동자군(勞動者群)은

염천(炎天)에  양식(糧食)을 날러  드리는  개아미떼나 된  듯이  양강반(兩江畔)을배회(徘徊)하엿고,

떼목 타고 나려 올 남편을 위하여 빨래질 하든 여인(女人)은

첫아이 죽인 어머니의 초췌(憔悴)한 얼굴이 되여 수심을 지코 있지 안엇든가.

아하, 어부(漁夫)의 안해가 광풍(狂風)에 가슴 떨듯이

겹겹히 싸히여 줄지여 달리는 생각생각에 몸서리 친다.

 

압록강(鴨綠江),압록강(鴨綠江),압록강(鴨綠江)의 밤이어,

그러면 그대는 변함없이 달빛까지 흐리게할 눈물을 품어야 하고,

새길을 못 찻겠다고 쏘다놋는 찬 한숨만을 가저야 올흔가.

안이다.

눌리워 쫄어 들엇든 우리의 가슴이 터지는때, 아하, 그때

그대는 이쪽 움쏙에서 갓난애의 힘찬 울음 소리를 들을 것이다.

 

물, 물, 물.

흐른다, 눈에 충혈(充血)이 되 듯이 붉은 흙물이 흐른다.

성난 듯이, 우는 듯이, 아하, 압록강(鴨綠江)아,―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우리 안에 든 독수리

 

 

세상의 평화(平和)를 상징(象徵) 하 듯이

넓으나 넓은 하늘에서 자유로이 나래 펴는 독수리,

그러나, 얼마의 날즘생이 그 사오나운 발톱에 피를 흘리다

그 날카로운 주둥이에 골이 패워 죽었던가.

날센 몸집도 힘 있거니와 불쏘는 눈알 더욱 무섭구나.

잔악한 존재(存在)여, 날즘생의 통제자(統制者)여.

 

때로, 그는 한낮의 작란으로, 잔인성(殘忍性)의 발로(發露)로,

어미 찾는 귀연 적은 새를 잡어다 농락하였고,

바위에 앉아서는 독한 소리를 질러 질러

멀리 있는 어미새의 마음을 공포(恐怖)에 떨게 하였다.

그는 가저야  할 애련(愛憐)의  눈물을 못가진  대신에 폭력(暴力)만을  믿는 것이다.

 

한데, 이렇듯한 그에게도 슬픈 때가 왔다, 그날이 왔다.

지나친 욕망(慾望)을 채우던 그는 덧에 치우고 말았나니

모든 규계(規誡)는 그에게서 온갖 자유(自由)를 빼앗아 버렸다.

늘어진 날개죽지는 서리맞은 풀잎같이 생기를 잃었고,

반쯤 감은 눈자위에서는 이 힘을 찾아 볼 수 없구나.

아하, 쇠사슬에 억매우듯이 우리 안에 자치움이어, 쇠잔(衰殘)해 진  권력자(權力者)의 말로(末路)여.

 

그러면, 다시 수건으로 닦은 듯한 푸른 하늘이 그립고,

단숨에 만리(萬里)라도 내달을 기상(氣象)을 갖고 싶다고,

이날에 철망(鐵網)을 피가 나도록 물어 뜯은들 무엇하며,

오히려 비감(悲感)을 자아내는 함성(喊聲)을 질러 무엇하랴.

한갓 이슬 사라지듯 달아나 버린 그날의 영화(榮華)인 것을.

 

그렇다. ―

수많은 날즘생의 조소(嘲笑)를 받고  있는 독수리, 빼낼 수 없는 욕을 당하고 있는독수리,

이젤랑 초록빛 옛 꿈에 가슴이나 태우지 마라,

다만 어젯날을 조상하는 듯한 풀죽은 몸집만이

다가온 값없는 죽음을 말하고 있나니, 말하고 있나니.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소설가(黃順元, 1915 ~ 2000)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평양 숭덕학교 고등과 교사였던 찬영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만강(晩岡)이고 본관은 제안(齊安)이다. 1931년 “동광(東光)” 지에 시 ‘나의 꿈’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29년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정주 오산중학교를 거쳐 1934년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이 해에 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와세다 제2고등학원에 진학했으며, 1936년 와세다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향리인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서울중고등학교 교사,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