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시인 / 소야악(小夜樂)
달빛같이 창백(蒼白)한 각광(脚光)을 받으며 흰 구름장같은 드레쓰를 가벼이 끌면서 처음으로 그는 세레나아드를 추었다.
`챠이코프스키'의 애달픈 멜로디에 맞춰 사뿟 사뿟 떼어 놓는 길고 희멀건 다리는 무대(舞臺)를 바다 삼아 물생선처럼 뛰었다.
그 멜로디가 고대로 귀에 젖어 있다. 두 손을 젖가슴에 얹고 끝마칠 때의 포오즈가 대리석(大理石)의 조각(彫刻)인 듯 지금도 내 눈 속에 새긴 채 있다.
그때까지 그는 참으로 깨끗한 소녀(少女)였다. 돈과 명예(名譽)와 사나이를 모르는 귀여운 처녀(處女)였다. 나의 청춘(靑春)의 반(半)을 가져 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송도원(松濤園)
뛰어라 창랑(滄浪) 우에 굴러라 백사장(白沙場)에 여름이 한철이니 기를 펴고 뛰놀아라 아담과 이브의 후예(後裔)어니 무슨 설음 있으랴.
○
물 넘어 지는 해에 흰 돛이 번득이고 백구(白鷗)도 돌아들 제 뭍[陸]에 오른 비너스 송풍(松風)에 머리 말리며 파도(波濤) 소리 듣더라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심야과황하(深夜過黃河)
별그림자……그믐밤의 적막(寂寞)을 헤치며 화차(火車)는 황하(黃河)의 철교(鐵橋) 위를 달린다 산(山) 하나 없는 양안(兩岸)의 묘망(渺茫)한 평야(平野)는 태고(太古)의 신비(神秘)를 감춘 듯 등(燈)불만 깜박이고 황하(黃河)는 장사(長蛇)와 같이 꿈틀거리며 중원(中源)의 복판을 뚫고 묵묵(黙黙)히 흐른다.
찬란(燦爛)한던 동방(東方)의 문명(文明)은 이 강(江)의 물줄기를 따라 일어났고 사억(四億)이나 되는 중화(中華)의 족속(族屬)은 이 연안(沿岸)에서 역사(歷史)의 첫 페지를 꾸몄거니.
이제 천년(千年) 만년(萬年)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는 싯누렇게 지쳐 늘어지고 이 물을 마시고 자라난 백성(百姓)들은 아직도 고달픈 옛 꿈에 잠이 깊은데 난데없는 우렁찬 철마(鐵馬)의 울음소리! 무심(無心)한 나그네를 싣고 화차(火車)는 황하(黃河)를 건넌다.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어린것에게
고요한 밤 너의 자는 얼굴을 무심코 들여다볼 때, 새근새근 쉬는 네 숨소리에 귀를 기울일 때 아비의 마음은 해면(海綿)처럼 사랑에 붇[潤]는다. 사랑에 겨워 고사리 같은 네 손을 가만히 쥐어도 본다.
이 손으로 너는 장차 무엇을 하려느냐 네가 씩씩하게 자라나면 무슨 일을 하려느냐, 붓대는 잡지 마라, 행여 붓대만은 잡지 말아라 죽기 전 아비의 유언이다 호미를 쥐어라! 쇠망치를 잡아라!
실눈을 뜨고 엄마의 젖가슴에 달려 붙어서 배냇짓으로 젖 빠는 흉내를 내는 너의 얼굴은 평화의 보드러운 날개가 고히 고히 쓰다듬고 잠의 신(神)은 네 눈에 들락날락 하는구나.
내가 너를 왜 낳아 놓았는지 나도 모른다. 네가 이 알뜰한 세상에 왜 태어났는지 너도 모르리라 그러나 네가 땅에 떨어지자 으아 소리를 우렁차게 지를 때 나는 들었다 그 뜻을 알았다. 억세인 삶의 소리인 것을!
(이하(以下) 십이행(十二行) 략(略))
조선 사람의 피를 백대(百代)나 천대(千代)나 이어 줄 너이길래 팔 다리를 자근자근 깨물고 싶도록 네가 귀엽다. 내가 이루지 못한 소원을 이루고야 말 우리 집의 업둥이길래 남달리 네가 귀엽다 꼴딱 삼키고 싶도록 네가 귀여운 것이다.
모든 무거운 짐을 요 어린것의 어깨에만 지울 것이랴 온갖 희망을 염체 네게다만 붙이고야 어찌 살겠느냐 그러나 너와 같은 앞날의 일군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든든하구나 우리의 뿌리가 열 길 스무 길이나 박혀 있구나.
그믐 밤에 반딧불처럼 저 하늘의 별들처럼 반득여라 빛나거라 가는 곳마다 횃불을 들어라. 우리 아기 착한 아기 어서 어서 저 주먹에 힘이 올라라 오오 우리의 강산은 온통 꽃밭이 아니냐? 별투성이가 아니냐!
(1932. 9. 4. 재건이 낳은 지 넉달 열흘 되는 날)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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