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시인 / 뻐꾹새가 운다
오늘 밤도 뻐꾹새는 자꾸만 운다 깊은 산 속 빈 골짜기에서 울려 나오는 애처로운 소리에 애끊는 눈물은 베개를 또 적시었다.
나는 뻐꾹새에게 물어 보았다 `밤은 깊어 다른 새는 다 깃들였는데 너는 무엇이 설기에 피나게 우느냐' 라고 뻐꾹새는 내게 도로 묻는다 `밤은 깊어 사람들은 다 꿈을 꾸는데 당신은 왜 울며 밤을 밝히오' 라고.
아 사람의 속 모르는 날짐승이 나의 가슴 아픈 줄을 제 어찌 알까 고국은 멀고 먼데 임은 병들었다니 차마 그가 못 잊어 잠 못드는 줄 더구나 남의 나라 뻐꾹새가 제 어찌 알까.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상해(上海)의 밤
우중충한 농당(弄堂)* 속으로 훈둔*장사 모여들어 딱딱이 칠 때면 두 어깨 웅숭그린 년놈의 떠드는 세상 집집마다 마작(麻雀)판 뚜드리는 소리에 아편에 취(醉)한 듯 상해(上海)의 밤은 깊어 가네.
발 벗은 소녀(少女), 눈먼 늙은이를 이끌며 구슬픈 호궁(胡弓)의 맞춰 부르는 맹강녀(孟姜女) 노래, 애처롭구나 객창(客窓)에 그 소리 창자를 끊네.
사마로(四馬路) 오마로(五馬路) 골목 골목엔 `이래양듸', `량쾌양듸' 인육(人肉)의 저자 침의(寢衣) 바람으로 숨바꼭질하는 야아지*의 콧상둥이엔 매독(梅毒)이 우굴우굴 악취(惡臭)를 풍기네.
집 떠난 젊은이들은 노주(老酒)잔을 기울려 걷잡을 길 없는 향수(鄕愁)에 한숨이 길고 취(醉)하고 취(醉)하여 뼛속까지 취(醉)하여서는 팔을 뽑아 장검(長劍)인듯 내두르다가 채관 쏘파에 쓰러지며 통곡(痛哭)을 하네.
어제도 오늘도 산란(散亂)한 혁명(革命)의 꿈자리! 용솟음치는 붉은 피 뿌릴 곳을 찾는 `까오리'* 망명객(亡命客)의 심사를 뉘라서 알꼬 영희원(影戱院) 산데리아만 눈물에 젖네.
* 농당(弄堂): 세(貰) 주는 집 ** 훈둔: 조그만 만두속 같은 것을 빚어 넣은 탕(湯) ** 야아지: `야계(野鷄)' 매소부(賣笑婦) 중(中)에도 저급(低級)한 종류(種類) ** 까오리: 고려(高麗)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생명(生命)의 한 토막
내가 음악가(音樂家)가 된다면 가느다란 줄이나 뜯는 제금가(提琴家)는 아니 되려오. High te.까지나 목청을 끌어 올리는 `카루소'같은 성악가(聲樂家)가 되거나 `샬랴핀'만치나 우렁찬 베이스로 내 설음과 우리의 설음을 버무려 목구멍에 피를 끓이며 영탄 노래를 부르고 싶소.
장자(腸子) 끝이 묻어나도록 성량(聲量)껏 내뽑다가 설음이 복받쳐 몸 둘 곳이 없으면 몇만(萬) 청중(聽衆) 앞에서 거꾸러져도 좋겠소.
내가 화가(畵家)가 된다면 `피아드리'처럼 고리삭고 `밀레'처럼 유한(悠閑)한 그림은 마음이 간지러워서 못 그리겠소. 뭉툭하고 굵다란 선(線)이 살아서 구름 속 용(龍)같이 꿈틀거리는 `반․고호'의 필력(筆力)을 빌어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
꺼멓고 싯붉은 원색(原色)만 써서 우리의 사는 꼴을 그려는 보아도, 대대손손(代代孫孫)이 전(傳)하여 보여 주고 싶지는 않소. 그 그림은 한칼로 찢어버리기를 바라는 까닭에……
무엇이 되든지 내 생명(生命)의 한 토막을 짧고 굵다랗게 태워 버리고 싶소!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선생님 생각
날이 몹시도 춥습니다. 방 속에서 떠다 놓은 숭늉이 얼구요, 오늘밤엔 영하(零下)로도 이십도(二十度)나 된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속에서 오직이나 추우시리까? 얼음장 같이 차디찬 마루방 위에 담요 자락으로 노쇠(老衰)한 몸을 두르신 선생님의 그 모양 뵈옵는 듯합니다.
석탄(石炭)을 한 아궁이나 지펴 넣은 온돌(溫突) 위에서 홀로 딩굴며 생각하는 제 마음 속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습니다그려. 아아 무엇을 망설이고 진작 따르지 못했을까요? 남아 있어 저 한 몸은 편하고 부드러워도 가슴 속엔 성에가 슬고 눈물이 고드름 됩니다.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보다 나이가 젊은데요 어째서 벌써 혈관(血管)의 피가 말랐을까요? 이 한밤엔 창(窓) 밖에 고구마 장사의 외치는 소리도 떨리다가는 길 바닥에 얼어 붙고 제 마음은 선생님의 신변(身邊)에 엉기어 붙습니다. 그 마음이 스러져가는 화로(火爐) 속에 깜박거리는 한 덩이 숯[木炭]만치나 더웠으면 합니다.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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