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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심훈 시인 / 뻐꾹새가 운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1.

심훈 시인 / 뻐꾹새가 운다

 

 

오늘 밤도 뻐꾹새는 자꾸만 운다

깊은 산 속 빈 골짜기에서

울려 나오는 애처로운 소리에

애끊는 눈물은 베개를 또 적시었다.

 

나는 뻐꾹새에게 물어 보았다

`밤은 깊어 다른 새는 다 깃들였는데

너는 무엇이 설기에 피나게 우느냐' 라고

뻐꾹새는 내게 도로 묻는다

`밤은 깊어 사람들은 다 꿈을 꾸는데

당신은 왜 울며 밤을 밝히오' 라고.

 

아 사람의 속 모르는 날짐승이

나의 가슴 아픈 줄을 제 어찌 알까

고국은 멀고 먼데 임은 병들었다니

차마 그가 못 잊어 잠 못드는 줄

더구나 남의 나라 뻐꾹새가 제 어찌 알까.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상해(上海)의 밤

 

 

우중충한 농당(弄堂)* 속으로

훈둔*장사 모여들어 딱딱이 칠 때면

두 어깨 웅숭그린 년놈의 떠드는 세상

집집마다 마작(麻雀)판 뚜드리는 소리에

아편에 취(醉)한 듯 상해(上海)의 밤은 깊어 가네.

 

발 벗은 소녀(少女), 눈먼 늙은이를 이끌며

구슬픈 호궁(胡弓)의 맞춰 부르는 맹강녀(孟姜女) 노래,

애처롭구나 객창(客窓)에 그 소리 창자를 끊네.

 

사마로(四馬路) 오마로(五馬路) 골목 골목엔

`이래양듸', `량쾌양듸' 인육(人肉)의 저자

침의(寢衣) 바람으로 숨바꼭질하는 야아지*의 콧상둥이엔

매독(梅毒)이 우굴우굴 악취(惡臭)를 풍기네.

 

집 떠난 젊은이들은 노주(老酒)잔을 기울려

걷잡을 길 없는 향수(鄕愁)에 한숨이 길고

취(醉)하고 취(醉)하여 뼛속까지 취(醉)하여서는

팔을 뽑아 장검(長劍)인듯 내두르다가

채관 쏘파에 쓰러지며 통곡(痛哭)을 하네.

 

어제도 오늘도 산란(散亂)한 혁명(革命)의 꿈자리!

용솟음치는 붉은 피 뿌릴 곳을 찾는

`까오리'* 망명객(亡命客)의 심사를 뉘라서 알꼬

영희원(影戱院) 산데리아만 눈물에 젖네.

 

* 농당(弄堂): 세(貰) 주는 집

** 훈둔: 조그만 만두속 같은 것을 빚어 넣은 탕(湯)

** 야아지: `야계(野鷄)' 매소부(賣笑婦) 중(中)에도 저급(低級)한 종류(種類)

** 까오리: 고려(高麗)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생명(生命)의 한 토막

 

 

내가 음악가(音樂家)가 된다면

가느다란 줄이나 뜯는

제금가(提琴家)는 아니 되려오.

High te.까지나 목청을 끌어 올리는

`카루소'같은 성악가(聲樂家)가 되거나

`샬랴핀'만치나 우렁찬 베이스로

내 설음과 우리의 설음을 버무려

목구멍에 피를 끓이며 영탄 노래를 부르고 싶소.

 

장자(腸子) 끝이 묻어나도록 성량(聲量)껏 내뽑다가

설음이 복받쳐 몸 둘 곳이 없으면

몇만(萬) 청중(聽衆) 앞에서 거꾸러져도 좋겠소.

 

내가 화가(畵家)가 된다면

`피아드리'처럼 고리삭고

`밀레'처럼 유한(悠閑)한 그림은 마음이 간지러워서 못 그리겠소.

뭉툭하고 굵다란 선(線)이 살아서

구름 속 용(龍)같이 꿈틀거리는

`반․고호'의 필력(筆力)을 빌어

나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리고 싶소.

 

꺼멓고 싯붉은 원색(原色)만 써서

우리의 사는 꼴을 그려는 보아도,

대대손손(代代孫孫)이 전(傳)하여 보여 주고 싶지는 않소.

그 그림은 한칼로 찢어버리기를 바라는 까닭에……

 

무엇이 되든지 내 생명(生命)의 한 토막을

짧고 굵다랗게 태워 버리고 싶소!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선생님 생각

 

 

날이 몹시도 춥습니다.

방 속에서 떠다 놓은 숭늉이 얼구요,

오늘밤엔 영하(零下)로도 이십도(二十度)나 된답니다.

선생님께서는 그 속에서 오직이나 추우시리까?

얼음장 같이 차디찬 마루방 위에

담요 자락으로 노쇠(老衰)한 몸을 두르신

선생님의 그 모양 뵈옵는 듯합니다.

 

석탄(石炭)을 한 아궁이나 지펴 넣은 온돌(溫突) 위에서

홀로 딩굴며 생각하는 제 마음 속에

오싹오싹 소름이 돋습니다그려.

아아 무엇을 망설이고 진작 따르지 못했을까요?

남아 있어 저 한 몸은 편하고 부드러워도

가슴 속엔 성에가 슬고 눈물이 고드름 됩니다.

 

선생님 저희는 선생님보다 나이가 젊은데요

어째서 벌써 혈관(血管)의 피가 말랐을까요?

이 한밤엔 창(窓) 밖에 고구마 장사의 외치는 소리도

떨리다가는 길 바닥에 얼어 붙고

제 마음은 선생님의 신변(身邊)에 엉기어 붙습니다.

그 마음이 스러져가는 화로(火爐) 속에 깜박거리는

한 덩이 숯[木炭]만치나 더웠으면 합니다.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沈熏) 시인 / 소설가.영화인) 1901년-1936년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 출생. 아버지 심상정(沈相珽)의 3남 1녀 중 3남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