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시인 / 넋 잃은 그의 앞 가슴을 향하여... 원제 : 넋 잃은 그의 앞 가슴을 향하여 힘있게 활줄을 당겨라 부제 : 잠 자는 대지(大地)를 향(向)하여 부르는 노래
피 흘릴 날이 오면 날리는 기폭을 둘러 싼 후 부러진 총대나마 어깨에 메겠다고, 기운차게 나오야 될 그 말소리를 지금은 잊었느냐, 힘을 잃었느냐, 그러치 안으면 뛰는 피를 빼앗겼느냐. 쓰라린 뒷날의 피묻은 과거(過去)를 가슴에 안고 그때 생각에 몸서리치며 외치나니 사나이의 마음이 더 한층 굳어지고, 뜨거워짐을 바람이다.
엉큼하게 뼈만 남은 해골(骸骨) 떼는 황폐(荒廢)한 성벽(城壁)밑 묘반(墓畔)에서 울고만 있으며 불없는 거리에 햇빛 찾는 무리는 칼자리에 왼몸이 피뭉치 되었구나 빛 잃은 눈동자(瞳子)여, 힘없는 입이여, 나팔 못 든 손이여, 못 걷는 발목이여.
아, 악착한 분위기(雰圍氣) 속에 헤매는 사나이들아, 그러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뿐이냐? 굳건한 의지(意志)까지 사라트리려는가? 아직 뼈 사이에 기름 방울이 남어 있거들랑 대지(大地)를 바라보며, 목이 터지도록 외쳐라, 발거름을 마춰라. 그리고 넋 잃은 그의 앞가슴을 향하여 힘있게 활줄을 당겨라, 당겨라. 맞은 심장(心臟)의 피가 용솟음 쳐서 놀래 깨기까지.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늙은 아버지를 보내며
일에 지친 쇠약한 몸뚱아리를 눕혀, 아들의 꿈틀거리는 팔목을 어루만지며 장엄한 과거(過去)에 눈감어 취하는 아버지, 인제는 그때 생각에 가슴이나 썩지 마시라, 눈물이나 흘리지 마시라 벌서 청춘(靑春)의 기염(氣焰)을 잃은 지 오래나니, 잃은 지 오래나니.
그러나 그날의 위자(偉姿)를 되풀이 하게 하는 듯한 흰 수염, 일만 군졸을 호령 하는듯한 입맵시, 철판(鐵板)을 뚫고도 오히려 남을 눈자위의 힘 자취― 모두가 옛날의 추억(追憶)을 새롭게 하는 씨로구나.
그도 한때는 원대(遠大)한 포부(抱負)와, 영웅적(英雄的) 기상(氣象)과, 희생(犧牲)의 정신(精神)을 가졌고, 세상을 쥐흔들 큰 야심(野心)을 가졌었다. 그러나 때는 그를 허락지 않았고, 그는 때를 만나지 못했나니, 법열(法悅)에 찼던 그의 희망(希望)은 여지 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보라, 젊은아―아들아, 딸아, 여기서 인생(人生)의 덧없고, 거칠은 행로(行路)를 보라, 이같이 어버이의 온갖 능력(能力)은 빼앗겨 버렸나니 재만 남은 위력(威力)이어, 움직이는 미라[木乃伊]여.
그러타, 아들은 아버지를 보내야 한다. 인생(人生)의 싸움터에서 제명(除名)을 당한어버이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눈에 어리운 새파란 환상(幻像)과 함께 옛힘을 보아야 한다. 어버이의 옆에 앉아 노쇠(老衰)한 몸의 맥(脈)을 짚고있는 자식아―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동무여 더 한층 의지(意志)가 굳세라
빈 주먹을 들어 큰 뜻과 싸우겠다고, 동무가 이곳을 떠나든 그날밤, 정거장 개찰구(改札口) 앞에서 힘있게 잡었던 뜨거운 손의 맥박(脈搏) 말없이 번뜻거리든 두 눈알의 힘! 프랫트폼에 떨고 있는 전등불 밑으로 걷던 뒷모양! 아하, 꼭 감은 눈앞에 다시 나타나는구나.
그것은 벌서 지난 겨울의 일, 지금은 검은 연기 속에 묻히어 희던 얼굴은 얼마나 껌어졌으며, 물렁물렁 하던 두 팔목은 어떻게나 굳어 졌는가. 이제는 그렇게 잘 울던 울음도 적어 졌겠지.
오늘은 또한 봄비 나리는 밤, 나는 가시마[貸間]한 구석에서 괴롬과 싸울 그대를 생각한다. 더러운 벽에는 노동복이 걸려 있고, 먼지 앉은 책상에는 변도곽이 놓여 있어 쓰라린 침묵(沈黙)에 사로 잡혔을 그대를, 아하, 그대를……
그러나 동무여, 나는 믿는다. 그대는 낙심(落心)치 않고 비명(悲鳴)을 내지 않고, 그리고 새 배움을 얻으리라는 것을. 나는 지금 다시 그대를 향하여 외치나니, 더 한층 의지(意志)가 굳세라, 굳세라.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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