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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황순원 시인 / 넋 잃은 그의 앞 가슴을 향하여...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0.

황순원 시인 / 넋 잃은 그의 앞 가슴을 향하여...

원제 : 넋 잃은 그의 앞 가슴을 향하여 힘있게 활줄을 당겨라

부제 : 잠 자는 대지(大地)를 향(向)하여 부르는 노래

 

 

피 흘릴 날이 오면 날리는 기폭을 둘러 싼 후

부러진 총대나마 어깨에 메겠다고,

기운차게 나오야 될 그 말소리를 지금은 잊었느냐, 힘을 잃었느냐,

그러치 안으면 뛰는 피를 빼앗겼느냐.

쓰라린 뒷날의 피묻은 과거(過去)를 가슴에 안고

그때 생각에 몸서리치며 외치나니

사나이의 마음이 더 한층 굳어지고, 뜨거워짐을 바람이다.

 

엉큼하게 뼈만 남은 해골(骸骨) 떼는

황폐(荒廢)한 성벽(城壁)밑  묘반(墓畔)에서 울고만 있으며

불없는 거리에 햇빛 찾는 무리는

칼자리에 왼몸이 피뭉치 되었구나

빛 잃은 눈동자(瞳子)여, 힘없는 입이여,

나팔 못 든 손이여, 못 걷는 발목이여.

 

아, 악착한 분위기(雰圍氣) 속에 헤매는 사나이들아,

그러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뿐이냐?

굳건한 의지(意志)까지 사라트리려는가?

아직 뼈 사이에 기름 방울이 남어 있거들랑

대지(大地)를 바라보며, 목이 터지도록 외쳐라, 발거름을 마춰라.

그리고 넋 잃은 그의 앞가슴을 향하여 힘있게 활줄을 당겨라, 당겨라.

맞은 심장(心臟)의 피가 용솟음 쳐서 놀래 깨기까지.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늙은 아버지를 보내며

 

 

일에 지친 쇠약한 몸뚱아리를 눕혀,

아들의 꿈틀거리는 팔목을 어루만지며 장엄한 과거(過去)에 눈감어 취하는 아버지,

인제는 그때 생각에 가슴이나 썩지 마시라, 눈물이나 흘리지 마시라

벌서 청춘(靑春)의 기염(氣焰)을 잃은 지 오래나니, 잃은 지 오래나니.

 

그러나 그날의 위자(偉姿)를 되풀이 하게 하는 듯한 흰 수염,

일만 군졸을 호령 하는듯한 입맵시,

철판(鐵板)을 뚫고도 오히려 남을 눈자위의 힘 자취―

모두가 옛날의 추억(追憶)을 새롭게 하는 씨로구나.

 

그도 한때는  원대(遠大)한 포부(抱負)와, 영웅적(英雄的)  기상(氣象)과, 희생(犧牲)의 정신(精神)을 가졌고,

세상을 쥐흔들 큰 야심(野心)을 가졌었다.

그러나 때는 그를 허락지 않았고, 그는 때를 만나지 못했나니,

법열(法悅)에 찼던 그의 희망(希望)은 여지 없이 부서지고 말았다.

 

보라, 젊은아―아들아, 딸아,

여기서 인생(人生)의 덧없고, 거칠은 행로(行路)를 보라,

이같이 어버이의 온갖 능력(能力)은 빼앗겨 버렸나니

재만 남은 위력(威力)이어, 움직이는  미­라[木乃伊]여.

 

그러타, 아들은 아버지를 보내야 한다. 인생(人生)의 싸움터에서 제명(除名)을 당한어버이를 보내야 한다.

그리고 그의 눈에 어리운 새파란 환상(幻像)과 함께 옛힘을 보아야 한다.

어버이의 옆에 앉아 노쇠(老衰)한 몸의 맥(脈)을 짚고있는 자식아―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동무여 더 한층 의지(意志)가 굳세라

 

 

빈 주먹을 들어 큰 뜻과 싸우겠다고, 동무가 이곳을 떠나든 그날밤,

정거장 개찰구(改札口) 앞에서 힘있게 잡었던 뜨거운 손의 맥박(脈搏)

말없이 번뜻거리든 두 눈알의 힘!

프랫트폼에 떨고 있는 전등불 밑으로 걷던 뒷모양!

아하, 꼭 감은 눈앞에 다시 나타나는구나.

 

그것은 벌서 지난 겨울의 일,

지금은 검은 연기 속에 묻히어 희던 얼굴은 얼마나 껌어졌으며,

물렁물렁 하던 두 팔목은 어떻게나 굳어 졌는가.

이제는 그렇게 잘 울던 울음도 적어 졌겠지.

 

오늘은 또한 봄비 나리는 밤,

나는 가시마[貸間]한 구석에서 괴롬과 싸울 그대를 생각한다.

더러운 벽에는 노동복이 걸려 있고,

먼지 앉은 책상에는 변도곽이 놓여 있어

쓰라린 침묵(沈黙)에 사로 잡혔을 그대를, 아하, 그대를……

 

그러나 동무여,

나는 믿는다. 그대는 낙심(落心)치 않고 비명(悲鳴)을 내지 않고, 그리고 새 배움을

얻으리라는 것을.

나는 지금 다시 그대를 향하여 외치나니,

더 한층 의지(意志)가 굳세라, 굳세라.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소설가(黃順元, 1915 ~ 2000)

1915년 3월 26일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평양 숭덕학교 고등과 교사였던 찬영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만강(晩岡)이고 본관은 제안(齊安)이다. 1931년 “동광(東光)” 지에 시 ‘나의 꿈’을 발표하여 등단하였다. 1929년평양 숭덕소학교를 졸업하고 정주 오산중학교를 거쳐 1934년평양 숭실중학교를 졸업했다. 이 해에 일본에 건너가 도쿄의 와세다 제2고등학원에 진학했으며, 1936년 와세다대학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1939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향리인 대동군 재경면 빙장리 등에서 작품 활동을 하며 지내다가 1946년 월남하였다. 이후 서울중고등학교 교사, 경희대 문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쳤다. 1957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80년 경희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하였으며, 2000년 9월 14일 향년 86세로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