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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장환 시인 / 초봄의 노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1.

오장환 시인 / 초봄의 노래

 

 

내가 부르는 노래

어디선가 그대도 듣는다면은

나와 함께 노래하리라.

`아 우리는 얼마나 기다렸는가'……하고

 

유리창 밖으론

함박눈이 펑 펑 쏟아지는데

한겨울

나는 아무데도 못 가고

부질없은 노래만 불러 왔구나.

 

그리움도 맛없어라

사모침도 더디어라

 

언제인가 언제인가

안타까운 기약조차 버리고

한 동안 쉴 수 있는 사랑마저 미루고

저마다 어둠 속에 앞서던 사람

 

이제 와선 함께 간다.

함께 간다.

어디선가 그대가 헤매인대도

그 길은 나도 헤매이는 길

 

내가 부르는 노래

어디선가 그대가 듣는다면은

나와 함께 노래하리라.

`아 우리는 얼마나

기다렸는가'……하고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오장환 시인 / 팔월(八月) 십오일(十五日)의 노래

 

 

기폭을 쥐었다.

높이 쳐들은 만인의 손 위에

깃발은 일제히 나부낀다.

 

`만세!'를 부른다. 목청이 터지도록

지쳐 나서는

군중은 만세를 부른다.

 

우리는 노래가 없었다.

그래서

이처럼 부르짖는 아우성은

일찍이 끓어 오던 우리들 정열이 부르는 소리다.

 

아 손에 손에 깃발들을 날리며

큰길로 모이는 사람아

우리는 보았다.

이곳에 그냥 기쁨에 취하고, 함성에 목메인 겨레를……

그리고

뒤끓는 환희와 깃발의 꽃바다 속에

무수히 따라가는 아동과 근로하는 이들의 행렬을……

 

춤추는 깃발이여!

나부끼는 마음이여!

이들을 지키라.

 

너희들은, 자랑스런 너희들 가슴으로

해방이 주는 노래 속에서

또 하나의 검은 쇠사슬이 움직이려 하는 것을……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오장환 시인 / 할렐루야

 

 

곡성이 들려온다. 인가(人家)에 인가(人家)가 모이는 곳에.

 

날마다 떠오르는 달이 오늘도 다시 떠 오고

 

누―런 구름 쳐다보며

망또 입은 사람이 언덕에 올라 중얼거린다.

 

날개와 같이

불길한 사족수(四足獸)의 날개와 같이

망또는 어둠을 뿌리고

 

모―든 길이 일제히 저승으로 향하여 갈 제

암흑의 수풀이 성문을 열어

보이지 않는 곳에 술 빚는 내음새와 잠자는 꽃송이.

 

다만 한 길 빛나는 개울이 흘러……

 

망또 우의 모가지는 솟치며

그저 노래 부른다.

 

저기 한 줄기 외로운 강물이 흘러

깜깜한 속에서 차디찬 배암이 흘러…… 사탄이 흘러……

눈이 따갑도록 빨간 장미가 흘러……

 

헌사, 남만서방, 1939

 

 


 

 

오장환 시인 / 해수(海獸)

 

 

    사람은 저 빼놓고 모조리 짐승이었다

 

항구야

계집아

너는 비애를 무역하도다.

 

모―진 비바람이 바닷물에 설레이던 날

나는 화물선에 엎디어 구토를 했다.

 

뱃전에 찌프시 안개 끼는 밤

몸부림치도록 갑갑하게 날은 궂은데

속눈썹에 이슬을 적시어 가며

항구여!

검은 날씨여!

내가 다시 상륙하던 날

나는 거리의 골목 벽돌담에 오줌을 깔겨 보았다.

 

컴컴한 뒷골목에 푸른 등불들,

    붕―

붕―

자물쇠를 채지 않는 도어 안으로, 부화(浮華)한 웃음과 비어의 누른 거품이 북어 오른다.

 

야윈 청년들은 담수어처럼

힘없이 힘없이 광란된 ZAZZ에 헤엄쳐 가고

빨간 손톱을 날카로이 숨겨 두는 손,

코카인과 한숨을 즐기어 상습하는 썩은 살덩이

 

나는 보았다.

       항구,

항구,

       들레이면서

수박씨를 까바수는 병든 계집을―

바나나를 잘라내는 유곽 계집을―

 

49도, 독한 주정(酒精)에 불을 달구어

불타오르는 술잔을 연거푸 기울이도다.

보라!

질척한 내장이 부식한 내장이, 타오르는 강한 고통을,

펄펄펄 뛰어라! 나도 어릴 때에는

입가생이에 뾰롯한 수염터 모양, 제법 자라나는 양심을 지니었었다.

 

발레제(製)의 무디인 칼날, 얼굴이 뜨거웠다.

면도를 했다.

극히 어렸던 시절

 

항구여!

눈물이여!

나는 종시(終是) 비애와 분노 속을 항해했도다.

 

계집아, 술을 따르라.

잔잔이 가득 부어라!

자조와 절망의 구덩이에 내 몸이 몹시 흔들릴 때

나는 구토를 했다.

삼면기사(三面記事)를,

각혈과 함께 비린내나는 병든 기억을……

 

어둠의 가로수여!

바다의 방향(方向),

오 한없이 흉측맞은 구렁이의 살결과 같이

늠실거리는 검은 바다여!

미지의 세계,

미지로의 동경,

나는 그처럼 물 위로 떠다니어도 바다와 동화치는 못 하여 왔다.

가옥(家屋) 안 짐승은 오직 사람뿐

나도 그처럼 완고하도다.

 

쇠창살을 붙잡고 우는 계집아!

바다가 보이는 저쪽 상정(上頂)엔 외인의 묘지가 있고

하얀 비둘기가 모이를 쪼으고,

장난감만하게 보이는 기선은 퐁퐁 품는 연기를 작별인사처럼 피워 주도다.

 

항구여!

눈물이여!

 

절망의 흐름은 어둠을 따라 땅 아래 넘쳐 흐르고,

바람이 끈적끈한 요기(妖氣)의 저녁,

너는 바다 변두리를 돌아가 보라.

오 이럴 때이면 이빨이 무딘 찔레나무도

아스러지게 나를 찍어 누르려 하지 않더냐!

 

이년의 계집,

5색,

7색,

영사관 꼭대기에 때 묻은 기폭은

그 집 굴뚝이 그려 논 게다.

지금도 절름발이 노서아의 귀족이 너를 찾지 않더냐.

 

등대 가까이 매립지에는

아직도 묻히지 않은 바닷물이 웅성거린다.

오―매립지는 사문장

동무들이 뼈다귀로 묻히어 왔다.

 

어두운 밤, 소란스런 물결을 따라

그러게 검은 바다 위로는

쑤구루루…… 쑤구루루……

부어 오른 시신, 눈자위가 해멀건 인부들이 떠올라 온다.

 

항구야,

환각의 도시, 불결한 하수구에 병든 거리여!

얼마간의 돈푼을 넣을 수 있는 조그만 지갑,

유독식물과 같은 매음녀는

나의 소매에 달리어 있다.

 

그년은, 마음까지 나의 마음까지 핥아 놓아서

이유 없이 웃는다. 나는

도박과

싸움,

흐르는 코피!

나의 등가죽으로는 뱃가죽으로는

자폭한 보헤미안의 고집이 시르죽은 빈대와 같이 쓸 쓸 쓸 기어다닌다.

 

보라!

어두운 해면에 어른거리는 검은 그림자,

짐승과 같이 추악한 모습

항시 위협을 주는 무거운 불안

그렇다! 오밤중에는 날으는 갈매기도 가마귀처럼 불길하도다.

 

나리는 안개여!

설움의 항구,

 

세관의 창고 옆으로 달음박질하는 중년 사나이의

쿨렁한 가방

방파제에는 수평선을 넘어온

해조음이 씨근거리고,

바다도, 육지도, 한 치의 영역에 이를 웅을거린다.

 

항구여!

눈물이여!

나는

못 쓰는 주권(株券)을 갈매기처럼 바닷가 날려 보냈다.

뚱뚱한 계집은 부―연 배때기를 헐덕거리고

나는 무겁다.

 

웅대하게 밀리쳐오는 오―바다,

조수의 쏠려옴을 고대하는 병든 거위들!

습진과 최악의 꽃이 성화(盛華)하는 항시(港市)의 하수구,

더러운 수채의 검은 등때기,

급기야

밀물이 머리맡에 쏠리어올 때

톡 불거진 두 눈깔을 희번덕이며

너는 무서웠느냐?

더러운 구덩이, 어두운 굴 속에 두 가위를 트리어 박고

 

뉘우치느냐?

게거품을 북적거리며

쏠려가는 조수를 부러이 보고

불평하느냐?

더러운 게거품을 북적거리며……

 

음협(陰狹)한 씨내기, 사탄의 낙륜(落倫),

너의 더러운 껍데기는

일찍

바닷가에 소꿉 노는 어린애들도 주워 가지는 아니하였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시인[吳章煥, 1918.5.5 ~ 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중퇴.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朝鮮文學(조선문학) ≫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등단. 1936년 서정주(徐廷柱)·김동리(金東里)·여상현(呂尙玄)·함형수(咸亨洙) 등과 〈詩人部落(시인부락)〉 동인으로 본격적인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성벽 城壁』(1937)·『헌사 獻辭』(1939)·『병(病)든 서울』(1946)·『나 사는 곳』(1947) 등과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詩集)』(動向社, 1946)이 있음. 월북 이후 시집 『붉은 깃발』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