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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장환 시인 / 정문(旌門)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20.

오장환 시인 / 정문(旌門)

부제: 염락․열녀불경이부(廉洛․烈女不更二夫) 충신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

 

 

열녀를 모셨다는 정문(旌門)은 슬픈 울 창살로는 음산한 바람이 스미어들고 붉고 푸르게 칠한 황토 내음새 진하게 난다. 소저(小姐)는 고운 얼굴 방안에만 숨어 앉아서 색시의 한시절 삼강오륜 주송지훈(朱宋之訓)을 본받아왔다. 오 물레 잣는 할멈의 진기한 이야기 중놈의 과객의 화적의 초립동이의 꿈보다 선명한 그림을 보여 줌이여. 시꺼먼 사나이 힘세인 팔뚝 무서운 힘으로 으스러지게 안아 준다는 이야기 소저에게는 몹시는 떨리는 식욕이었다. 소저의 신랑은 여섯 해 아래 소저는 시집을 가도 자위하였다. 쑤군, 쑤군 지껄이는 시집의 소문 소저는 겁이 나 병든 시에미의 똥맛을 핥아 보았다. 오 효부라는 소문의 펼쳐짐이여! 양반은 조금이라도 상놈을 속여야 하고 자랑으로 누르려 한다. 소저는 열아홉. 신랑은 열네 살 소저는 참지 못하여 목 매이던 날 양반의 집은 삼엄하게 교통을 끊고 젊은 새댁이 독사에 물리려는 낭군을 구하려다 대신으로 죽었다는 슬픈 전설을 쏟아 내었다. 이래서 생겨난 효부 열녀의 정문 그들의 종친은 가문이나 번화하게 만들어 보자고 정문의 광영을 붉게 푸르게 채색하였다.

 

시인부락, 1936. 제 1호

 

 


 

 

오장환 시인 / 종(鍾)소리

 

 

울렸으면……종소리

그것이 기쁨을 전하는

아니, 항거하는 몸짓일지라도

힘차게 울렸으면……종소리

 

크나큰 종면(鍾面)은 바다와 같은데

상기도 여기에 새겨진 하늘 시악시

온몸이 업화(業火)에 싸여 몸부림치는 거 같은데

울리는가, 울리는가,

태고서부터 나려오는 여운―

 

울렸으면……종소리

젊으디 젊은 꿈들이

이처럼 외치는 마음이

울면은 종소리 같으련마는……

 

스스로 죄 있는 사람과 같이

무엇에 내닫지 않는가,

시인이여! 꿈꾸는 사람이여

너의 젊음은, 너의 바램은 어디로 갔느냐.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오장환 시인 / 찬가

 

 

한때, 우리는 해방이 되었다 하였고 또 온 줄로 알았다.

그러나

사나운 날씨에

조급한 사나이는

다시금,

뵈지 않는 쇠사슬 절그럭거리며

막다른 노래를 부르는구나

 

아 울음이여! 울음이여!

신음 속에 길러 오던

너의 성품이,

넘쳐나는 기쁨에도 샘솟는 것을

아주 가까운 이마즉

우리는 새날을 통하여 배우지 아니했느냐.

 

젊은이여! 벗이여!

손과 발에…… 쇠사슬 늘이고

억눌린 뱃전에

스스로 노를 젓던

그 옛날, 흑인의 부르던 노래

어찌하여 우리는 이러한 노래를

다시금 부르는 것이냐.

 

뵈지 않는 쇠사슬

마음 안에 그늘지는 검은 그림자에도

내 노래의 갈 곳이

막다른 길이라 하면

아, 젊음이여!

헛되인 육체여!

너는 또 보지 아니했느냐.

8월 15일

아니 그보다도 전부터

우리들의 발길이 있은 뒤부터

항거하는 마음은 그저

무거운 쇠줄에 몸부림칠 때

온몸을 피투성이로 이와 싸우던 투사를……

 

옥에서

공장에서

산 속에서

지하실에서 나왔다.

몇천 길을 파고 들어간 땅속 갱도에서도―

땅 위로 난 모든 문짝은 뻐개지고

구멍이란 구멍에서 이들은 나왔다.

그리고

나와 보면 막상 반가운 얼굴들

함께 자란 우리의 형제 우리의 동무

 

K가 나왔다.

또 하나의 K가 나왔다.

A가 나왔다.

P가 나왔다.

그 속에는 먼― 남의 나라까지 찾아가 원수들 총부리에,

우리의 총부리를 맞들이댄 동무도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전부터 부르는 나즉한 노래를

이제는 더욱 소리 높여 부를 뿐이다.

 

뵈지 않는 쇠사슬 절그럭거리며

막다른 노래를

노래 부르는 벗이여!

전에는 앞서가며 피 흘리던 이만이

조용조용 부르던 노래

이제는 모두 합하여

우리도 크게 부른다.

`비겁한 놈은 갈려면 가라'

 

곳곳에서 우렁차게 들리는 소리

아, 이 노래는

한 사람의 노래가 아니다.

성낸 물결모양 아우성치는 젊은 사람들……

더욱 세찬 이 바람은 귀만을 찌르는 것이 아니라,

애타는 가슴 속

불을 지른다.

 

아 영원과 사랑과 꿈과 생명을 노래하던 벗이여!

너는 불타는 목숨을

그리고

불타면 꺼지는 목숨을 생각한 적이 있느냐

모두 다 앞서가던 선구자의 죽음 위에

스스로의 가슴을 불지르고 따라가는 동무들

 

우렁찬 우렁찬 노래다.

모두 다 합하여 부르는 이 노래

그렇다.

번연히 앞서보다 더한 쇠줄을

배반하는 무리가 가졌다 하여도

우리들 불타는 억세인 가슴은

젊은이 불을 뿜는 노래는

이런 것을 깨끗이 사뤄버릴 것이다.

 

우리들의 귀는 한 번에 두 가지를 들을 수 없다.

우리들의 마음은 한 번에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없다.

벗이여! 점점 가까워 온다.

얼마나 얼마나 하늘까지 뒤덮는 소리냐

`비겁한 놈은 갈려면 가라'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오장환 시인 / 체온표(體溫表)

 

 

어항 안

게으른 금붕어

 

나비 같은 넥타이를 달고 있기에

나는 무엇을 하면 옳겠습니까

 

나래 무거운 회상에 어두운 거리

하나님이시여! 저무는 태양

나는 해바라기모양 고개 숙이고 병든 위안을 찾아 다니어

 

고층의 건축이건만

푸른 하늘도 창 옆으로는 가까이 오려 않는데

탁상에 힘없이 손을 내린다.

먹을 수 없는 탱자열매 가시나무 향내를 코에 대이며……

 

주판알을 굴리는 작은 아씨야

너와 나는 비인 지갑과 사무를 바꾸며

오늘도 시들지 않느냐

화병에 한 떨기 붉은 장미와 히아신스 너의 청춘이, 너의 체온이……

 

헌사, 남만서방, 1939

 

 


 

오장환 시인[吳章煥, 1918.5.5 ~ 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중퇴.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朝鮮文學(조선문학) ≫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등단. 1936년 서정주(徐廷柱)·김동리(金東里)·여상현(呂尙玄)·함형수(咸亨洙) 등과 〈詩人部落(시인부락)〉 동인으로 본격적인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성벽 城壁』(1937)·『헌사 獻辭』(1939)·『병(病)든 서울』(1946)·『나 사는 곳』(1947) 등과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詩集)』(動向社, 1946)이 있음. 월북 이후 시집 『붉은 깃발』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