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 시인 / 이 세월도 헛되이
아, 이 세월도 헛되이 물러서는가
38도라는 술집이 있다. 낙원이라는 카페가 있다. 춤추는 연놈이나 술 마시는 것들은 모두 다 피 흐르는 비수를 손아귀에 쥐고 뛰는 것이다. 젊은 사내가 있다. 새로 나선 장사치가 있다. 예전부터 싸움으로 먹고 사는 무지한 놈들이 있다. 내 나라의 심장 속 내 나라의 수채물 구멍 이 서울 한복판에 밤을 도와 기승히 날뛰는 무리가 있다. 다만 남에게 지나는 몸채를 가지고 이 지금 내 나라의 커다란 부정을 못 견디게 느끼나 이것을 똑바른 이성으로 캐내지 못하여 씨근거리는 젊은 사내의 가슴과 내둥 양심껏 살 양으로 참고 참다가 이제는 할 수 없이 사느냐 죽느냐의 막다른 곳에서 다시 장삿길로 나간 소시민의 반항하는 춤맵시와 그리고 값싼 허영심에 뻗어 갔거나 여러 식구를 먹이겠다는 생활고에서 뛰쳐나갔거나 진하게 개어 붙인 분가루와 루―쥬에 모든 표정을 숨기고 다만 상대방의 표정을 좇는 뱀의 눈같이 싸늘한 여급의 눈초리 담요때기로 외투를 해 입는 자가 있다. 담요때기로 망또를 해 두른 놈이 있다. 또 어떤 놈은 권총을 희뜩희뜩 비치는 자도 있다. 이런 곳에서 목을 매는 중학생이 있다. 아 그러나 이제부터 얼마가 지나지 않은 해방의 날! 그 즉시는 이들도, 서른여섯 해 만에 스물여섯 해 만에 아니 몇살 만이라도 좋다. 이 세상에 나 처음으로 쥐어 보는 내 나라의 깃발에 어쩔 줄 모르고 울면서 춤추던 그리고 밝고 굳세인 새날을 맹서하던 사람들이 아니냐. 아 이 서울 내 나라의 심장부, 내 나라의 똥수깐, 남녘에서 오는 벗이여! 북쪽에서 오는 벗이여! 제 고향에서 살지 못하고 쫓겨 오는 벗이여! 또는 이곳이 궁금하여 견디지 못하고 허턱 찾아오는 동무여! 우리 온몸에 굵게 흐르는 정맥의 노리고 더러운 찌꺼기들이여! 너는 내 나라의 심장부, 우리의 모든 피검불을 거르는 염통 속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많은 우리의 백혈구를 만나지 아니했느냐.
아, 그리고 이 세월도 속절 없이 물러서느냐.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오장환 시인 / 장마철
나는 보았다. 철마다 강기슭에서 큰물이 갈 때에……
아 모든 것은 이냥 떠내려가는가 시뻘건 물 위에 썩은 용구새 그 위에 날았다 다시 앉고 날았다는 다시 앉는 참새떼.
어쩌면 나의 설움은 이처럼 여럿이 함께 외치고 싶은가.
나는 자랐다. 메마른 강기슭에 나날이 울어예는 여울가에서
*
꿈 아시 아슬하게 높이는 흰구름.
아 모든 것은 이냥 흘러만 가는가 내 노래에 젖은 내 마음 내 입성에 배인 내 몸매 다만 소리 없는 흰나비로 자취 없이 춤추며 사라질 것인가
꽃비늘 어지러이 흘러가는 여울가에서 온통 숨차게 흔들리는 가슴 속
그러나 이것은, 어디로서 오는 두려움인가 아니, 어디에서 복받치는 노여움인가.
나는 보았다. 철마다 강기슭에서 큰물이 갈 때에……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오장환 시인 / 전설
느티나무 속에선 올빼미가 울었다. 밤이면 운다. 항상, 음습한 바람은 얕게 나려앉았다. 비가 오든지, 바람이 불든지, 올빼미는 동화 속에 산다. 동리 아이들은 충충한 나무 밑을 무서워한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시인 / 절정(絶頂)의 노래
탑(塔)이 있다. 누구의 손으로 쌓았는가, 지금은 거치른 들판 모두다 까―맣게 잊혀진 속에 무거운 입 다물고 한(限)없이 서 있는 탑(塔), 나는 아노라. 뭇 천백(千百)사람, 미지(未知)와 신비(神秘) 속에서 보드라운 구름 밟고 별과 별들에게 기울이는 속삭임.
순시(瞬時)라도 아, 젊은 가슴 무여지는 덧없는 바래옴 탑(塔)이어, 하늘을 지르는 제일 높은 탑(塔)이어! 언제부터인가 스스로 나는 무게, 아득―한 들판에 홀로 가없는 적막을 누르고……
몇차레나 가려다는 돌아서는가. 고이 다듬는 끌이며 자자하던 이름들 설운 이는 모두 다 흙으로 갔으나 다만 고요함의 끝 가는 곳에
이제도 한 층 또 한 층 주소로 애처로운 단념의 지붕 위에로 천년(千年) 아니 이천년(二千年) 발돋음하듯 탑(塔)이어, 머리 드는 탑신(塔身)이어, 너 홀로 돌이어! 어느 곳에 두 팔을 젓는가.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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