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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심훈 시인 / 눈밤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18.

심훈 시인 / 눈밤

 

 

소리없이 내리는 눈, 한 치[寸], 두 치 마당 가뜩 쌓이는 밤엔

 

생각이 길어서 한 자[尺]외다, 한 길[丈]이외다.

 

편편(片片)이 흩날리는 저 눈송이처럼

 

편지나 써서 온 세상에 뿌렸으면 합니다.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돌아가지이다

 

 

돌아가지이다, 돌아가지이다.

동요(童謠)의 나라, 동화(童話)의 세계(世界)로

다시 한 번 이몸이 돌아가지이다.

 

세상 티끌에 파묻히고

살 길에 시달린 몸은

선잠 깨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어루만지던 엄마의 젖가슴에 안기고 싶습니다, 품기고 싶습니다.

그 보드랍고 따뜻하던 옛날의 보금자리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들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를 어찌하오리까

엄마의 젖꼭지는 말라 붙었고

제 입은 계집의 혀를 빨았습니다

엄마의 젖가슴은 식어 버리고

제 염통에는 더러운 피가 괴었습니다.

 

바람이 부더이다, 바람은 차더이다.

온 세상이 거칠고 쓸쓸하더이다.

가는 곳마다 차디 찬 바람을

등어리에 끼얹어 주더이다.

 

오오 와다오, 포근한 잠아!

하염없는 희망을 덮고

끊임없이 근심스러운 마음 위에

한 번 다시 그 잠이 와주려무나.

   `자장자장 잘두 잔다

    얼뚱아기 잘두 잔다

      자장골에 들어가니

       그 골에는 잠두 많어

   센둥이두 자드란다

     검둥이두 자드란다'

엄마도 이 노래를 부르시다가 꼬박꼬박 졸음이 와서

내 이마에다 이마뚝도 하셨었지.

 

노곤한 봄날

낮잠 주무시는 할아버지의

은실 같은 수염을 뽑아 가지고

개나리 회초리에 파리를 매어

    `잠자리 종조옹

      파아리 종조옹

    이리 오면 사느니라

      저리 가면 죽느니라……'

 

고초 자지 달랑거리고

논둑 건너 밭이랑 넘어

나비 같이 돌아다니던

귀여운 어린 천사(天使)야

아아 지금은 어디로 갔느냐?

 

함박눈이 울 안을 덮고

밭 전(田) 자 들창에 달빛이 물들 때

언니하고 자릿속에서 듣던

할머니의 까치 이야기는

어쩌면 그렇게도 재미가 있었을까요?

여우한테 물려 간 까치 새끼가

가엾고 불쌍해서 울었었지요

찾아다 달라고 떼를 쓰며 울었었지요.

 

아아 옛날의 보금자리에

이 몸을 포근히 품어 주소서.

하루도 열두번이나 거짓말을 시키고도

얼굴도 붉히지 말라는 세상이외다.

사람의 마음도 돈으로 팔고 사는

알뜰히도 더러운 세상이외다.

돌아가지이다, 돌아가지이다.

동요(童謠)의 나라, 동화(童話)의 세계(世界)로

한 번만 다시 돌아가지이다.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동우(冬雨)

 

 

저 비가 줄기줄기 눈물일진대

세어 보면 천만(千萬) 줄기나 되엄즉허이,

단 한 줄기 내 눈물엔 벼개만 젖지만

그 많은 눈물비엔 사태(沙汰)가 나지 않으랴.

남산(南山)인들 삼각산(三角山)인들 허물어지지 않으랴.

 

야반(夜半)에 기적(汽笛) 소리!

고기에 주린 맹수(猛獸)의 으르렁대는 소리냐

우리네 젊은 사람의 울분(鬱憤)을 뿜어 내는 소리냐

저력(底力) 있는 그 소리에 주춧돌이 움직이니

구들장 밑에서 지진(地震)이나 터지지 않으려는가?

 

하늘과 땅이 맞붙어서 멧돌질이나 하기를

빌고 바라는 마음 몹시도 간절하건만

단 한 길[丈] 솟지도 못하는 가엾은 이몸이여

달리다 뛰면 바단들 못 건너리만

걸음발 타는 동안에 그 비가 너무나 차구나!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마음의 낙인(烙印)

 

 

마음 한복판에 속 깊이 찍히진 낙인(烙印)을

몇 줄기 더운 눈물로 지어보려 하는가

칼끝으로 도려낸들 하나도 아닌 상처(傷處)가 가시어질 것인가

죽음은 홍소(哄笑)한다 머리맡에 쭈그리고 앉아서……

 

자살(自殺)한 사람의 시집(詩集)을 어루만지다 밤은 깊어서

추녀 끝의 풍경(風磬) 소리, 내 상여(喪輿)머리에 요령(搖鈴)이 흔들리는듯.

혼백(魂魄)은 시꺼먼 바닷속에 잠겨 자맥질하고

허무(虛無)히 그림자 악어(鰐魚)의 입을 벌이고 등어리에 소름을 끼얹는다.

 

 

쓰라린 기억(記憶)을 되풀이하면서 살아가는 앞길은

행복(幸福)이란 도깨비가 길라잡이 노릇을 한다.

꿈 속에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는 어릿광대들

개미떼처럼 뒤를 따라 쳇바퀴를 돌고 도는걸……

 

 

`캄풀' 주사(注射) 한 대로 절맥되는 목숨을 이어 보듯이

젊은이여 연애(戀愛)의 한 찰나(刹那)에 목을 매달려는가?

혈관(血管)을 토막토막 끊으면 불이라도 붙을상 싶어도

불 꺼져 재만 남은 화로(火爐)를 헤집는 마음이여!

 

 

모든 것이 모래밭 위의 소꼽장난이나 아닌 줄 알았더면

앞장을 서서 놈들과 겯고 틀어나 볼 것을

길거리로 달려나가 실컷 분(憤)풀이나 할 것을

아아 지금엔 희멀건 허공(虛空)만이 내 눈 앞에 티어 있을 뿐……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沈熏) 시인 / 소설가.영화인) 1901년-1936년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 출생. 아버지 심상정(沈相珽)의 3남 1녀 중 3남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