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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장환 시인 / 영원한 귀향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18.

오장환 시인 / 영원한 귀향

 

 

옛날과 같이 옛날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밤마다

바다는 희생을 노래 부르고

 

항상 돌이키고 다시 돌떠스는

고독과 무한한 신뢰에

바다여!

내 몸을 쓸어가는 성낸 파도

 

부두에 남겨둔 애상은 어떤 것인가

 

진정 나도 진정으로 젊은이를 사랑했노라.

왔다는 다시 갈 오― 영원한 귀향

 

계후조(季候鳥)는 떠난다.

암초에 쎈트 헤레나에 흰 새똥을 남기고.

 

헌사, 남만서방, 1939

 

 


 

 

오장환 시인 / 영회

 

 

후면에 누워 조용히 눈물지우라.

다만 옛을 그리어

궂은 비 오는 밤이나 왜가새 나는 밤이나

 

조그만 돌다리에 서성거리며

오늘밤도 멀―리 그대와 함께 우는 사람이 있다.

 

경(卿)이여!

어찌 추억 위에 고운 탑을 쌓았는가

애수(哀愁)가 분수같이 흐트러진다.

 

동구 밖에는 청랭(晴冷)한 달빛에

허물어진 향교(鄕校) 기왓장이 빛나고

댓돌 밑 귀뚜리 운다.

 

다만 울라

그대도 따라 울어라

 

위태로운 행복은 아름다웠고

이 밤 영회의 정은 심히 애절타

모름지기 멸하여 가는 것에 눈물을 기울임은

분명, 멸하여 가는 나를 위로함이라. 분명 나 자신을 위로함이라.

 

헌사, 남만서방, 1939

 

 


 

 

오장환 시인 / 온천지(溫泉地)

 

 

온천지에는 하루에도 몇 차례 은빛 자동차가 드나들었다. 늙은이나 어린애나 점잖은 신사는, 꽃 같은 계집을 음식처럼 싣고 물탕을 온다. 젊은 계집이 물탕에서 개구리처럼 떠 보이는 것은 가장 좋다고 늙은 상인들은 저녁상 머리에서 떠들어 댄다. 옴쟁이 땀쟁이 가지각색 더러운 피부병자가 모여든다고 신사들은 투덜거리며 가족탕을 선약하였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시인 / 월향구천곡(月香九天曲)

 

 

오랑주 껍질을 벗기면

손을 적신다.

향내가 난다.

 

점잖은 사람 여럿이 보이인 중에 여럿은 웃고 떠드나

기녀(妓女)는 호을로

옛 사나이와 흡사한 모습을 찾고 있었다.

 

점잖은 손들의 전하여 오는 풍습엔

계집의 손목을 만져 주는 것,

기녀는 푸른 얼굴 근심이 가득하도다.

하―얗게 훈기는 냄새

분 냄새를 지니었도다.

 

옛 이야기 모양 거짓말을 잘하는 계집

너는 사슴처럼 차디찬 슬픔을 지니었고나

 

한나절 태극선 부치며

슬픈 노래, 너는 부른다

좁은 보선 맵시 단정히 앉아

무던히도 총총한 하루 하루

 

옛 기억의 엷은 입술엔

포도물이 젖어 있고나.

 

물고기와 같은 입 하고

슬픈 노래, 너는 조용히 웃도다

 

화려한 옷깃으로도

쓸쓸한 마음은 가릴 수 없어

스란치마 땅에 끄을며 조심조심 춤을 추도다.

 

순백하다는 소녀의 날이여!

그렇지만

너는 매운 회초리, 허기찬 금식(禁食)의 날

오―끌리어 왔다.

 

슬픈 교육, 외로운 허영심이여!

첫사람의 모습을 모듬 속에 찾으려 헤매는 것은

벌―써 첫사람은 아니라

잃어진 옛날로의 조각진 꿈길이니

바싹 마른 종아리로

시들은 화심(花心)에

너는 향료를 물들이도다.

 

슬픈 사람의 슬픈 옛일이여!

값진 패물로도

구차한 제 마음에 복수는 할 바이 없고

다 먹은 과일처럼 이 틈에 끼여

꺼치거리는 옛 사랑

오―방탕한 귀공자!

기녀는 조심조심 노래하도다. 춤을 추도다.

 

졸리운 양, 춤추는 여자야!

세상은

몸에 이익하지도 않고

가미(加味)를 모르는 한약처럼 쓰고 틉틉하고나.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시인[吳章煥, 1918.5.5 ~ 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중퇴.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朝鮮文學(조선문학) ≫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등단. 1936년 서정주(徐廷柱)·김동리(金東里)·여상현(呂尙玄)·함형수(咸亨洙) 등과 〈詩人部落(시인부락)〉 동인으로 본격적인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성벽 城壁』(1937)·『헌사 獻辭』(1939)·『병(病)든 서울』(1946)·『나 사는 곳』(1947) 등과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詩集)』(動向社, 1946)이 있음. 월북 이후 시집 『붉은 깃발』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