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 시인 / 탈춤
여러분, 살음의 즐거움을 맛보려거든, `도덕(道德)'의 예복(禮服)과 `법률(法律)'의 갓을 묘(妙)하게 쓰고 다 이곳으로 들어옵시요, 이곳은 인생(人生)의 `이기(利己)'의 탈춤 회장(會場)입니다. 춤을 잘 추어야 합니다, 서툴러 넘어지면 운명(運命)이라는 놈의 함정(陷穽)에 들어갑니다, 하면 `행복(幸福)의 명부(名簿)'에서는 이름을 어이며, 다시는 입장권(入場券)인 인생관(人生觀)을 얻지 못합니다. 인생(人生)은 짧고 춤추는 시간(時間)은 깁니다, 한 분(分)만 잃으면, 한 분(分)만큼한 행복(幸福)의 춤이 없어지게 됩니다, 선(善)은 빨리 해야 합니다. 자 그러면 빨리 춥시다, 좋다 좋다, 얼씨구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풀밭 위
맡으면 향(香)내나는 풀밭 위에 황금색(黃金色)의 저녁볕이 춤추며 들벌레소리가 어지러울 때, 또다시 나는 혼자 누워서 구름끝에 생각을 보내고 있노라.
떠서는 잠겨드는 심사(心思)와도 같이 저 멀리 구름 속에 이동(移動)이 잦을 때, 어디선지 저녁 종(鐘)이 빗겨 울리어, 저 멀리 먼 곳으로 야속케도 심사(心思)가 끌려라.
달은 혼자서 방향(方向) 없이 아득이면서 하늘길을 걷고 있어라.
고요한 밤거리에는 잃어진 꿈과도 같게 곱게도 등(燈)불이 졸고 있어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피리
빈 들을 휩쓸어 돌으며, 때도 아닌 낙엽(落葉)을 최촉(催促)하는 부는 바람에 좇기어, 내 청춘(靑春)은 내 희망(希望)을 버리고 갔어라.
저멀리 검은 지평선(地平線) 위에 소리도 없이 달이 오를 때, 이러한 때에 나는 고요히 혼자서 옛 곡조(曲調)의 피리를 불고 있노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해마다 생각나는
해마다 연분홍 살구꽃이 피어 가없는 봄맘이 끌릴 때가 되면 다시금 안 잊히는 실없던 작란(作亂),
때는 사월(四月)의 아름다운 어느 날, 동무들과 꽃밭에 나는 갔노라. 어이하랴, 고운 꽃 냄새 맑길래,
한송이 꺾어 손에다 들었노라, 그러나 얼마 안해 꽃은 시들고 냄새만 한갓되이 남돌던 것을.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김억 시인 / 황해(黃海)의 첫봄
1
양지(陽地)귀 잔디밭에 속잎 푸르고 바다엔 얼음 풀려 오가는 흰 돛 어야데야 배소리 하늘에 찼소
하늘 중천(中天) 내 천자(川字) 행렬(行列)을 지어 넓은 들을 날도는 기럭 그기럭 기러기는 왔노라 잘도 울것다.
2
십리포구(十里浦口) 질펀타 두둥실 뜬 배 고기잡이 노래에 포구(浦口) 아씨네 제 속은 딴 데 두고 웃지만 마소
무심(無心)타 갈매기도 한(限)껏 목놓아 여저기 노래노래 쌍쌍(雙雙)이 돌며 새라 새 봄 제 흥(興)에 잘도 놀것다.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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