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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장환 시인 /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17.

오장환 시인 /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탕아 돌아가는 게

아니라

늙으신 어머니 병든 자식을 찾아오시다.

 

―아 네 병은 언제나 낫는 것이냐.

날마다 이처럼 쏘다니기만 하니……

어머니 눈에 눈물이 어릴 때

나는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

 

―내 붙이, 내가 위해 받드는 어른

내가 사랑하는 자식

한평생을 나는 이들이 죽어갈 때마다

옆에서 미음을 끓이고, 약을 달인 게 나의 일이었다.

자, 너마저 시중을 받아라.

 

오로지 이 아들 위하여

서울에 왔건만

며칠 만에 한 번씩 상을 대하면

밥숟갈이 오르기 전에 눈물은 앞서 흐른다.

어머니여, 어머니시여! 이 어인 일인가요

뼈를 깎는 당신의 자애보다도

날마다 애타는 가슴을

바로 생각에 내닫지 못하여 부산히 서두르는 몸짓뿐.

 

―이것아, 어서 돌아가자

병든 것은 너뿐이 아니다. 온 서울이 병이 들었다.

생각만 하여도 무섭지 않으냐

대궐 안의 윤비는 어디로 가시라고

글쎄 그게 가로채였다는구나.

 

시골에서 땅이나 파는 어머니

이제는 자식까지 의심스런 눈초리로 바라보신다.

아니올시다. 아니올시다.

나는 그런 사람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 가슴에 넘치는 사랑이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이 가슴에 넘치는 바른 뜻이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모든 이의 가슴에 부을 길이 서툴러 사실은

그 때문에 병이 들었습니다.

 

어머니 서울에 오시다.

탕아 돌아가는 게

아니라

늙으신 어머니 병든 자식을 찾아오시다.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오장환 시인 / 어육(魚肉)

 

 

신사들은 식탁에 죽은 어육을 올려 놓고 입천장을 핥으며 낚시질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천기예보엔 일기도 검어진다는(승합마차가 몹시 흔들리는) 기절(氣節)을, 신사들은 바다로 간다고 떠들어 댔다. 천후(天候)일수록 잘은 걸려드는 법이라고 행랑아범더러 어류들의 진기한 미끼, 파리나 지렁이를 잡아오라고 호령한다. 점잖은 신사들은 어떠한 유희에서나 예절 가운데에 행하여졌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시인 / 어포(漁浦)

 

 

어포(漁浦)의 등대는 귀류(鬼類)의 불처럼 음습하였다. 어두운 밤이면 안개는 비처럼 나렸다. 불빛은 오히려 무서웁게 검은 등대를 튀겨 놓는다. 구름에 지워지는 하현달도 한참 자옥―한 안개에는 등대처럼 보였다. 돛폭이 충충한 박쥐의 나래처럼 펼쳐 있는 때, 돛폭이 어스름―한 해적의 배처럼 어른거릴 때, 뜸 안에서는 고기를 많이 잡은 이나 적게 잡은 이나 함부로 투전을 뽑았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시인 / 여수(旅愁)

 

 

여수에 잠겼을 때, 나에게는 조그만 희망도 숨어 버린다.

요령처럼 흔들리는 슬픈 마음이여!

요지경 속으로 나오는 좁은 세상에 이상스러운 세월들

나는 추억이 무성한 숲 속에 섰다.

 

요지경을 메고 다니는 늙은 장돌뱅이의 고달픈 주막꿈처럼

누덕누덕이 기워진 때묻은 추억,

신뢰할 만한 현실은 어디에 있느냐!

나는 시정배와 같이 현실을 모르며 아는 것처럼 믿고 있었다.

 

괴로운 행려 속 외로이 쉬일 때이면

달팽이 깍질 틈에서 문 밖을 내다보는 얄미운 노스타르자

너무나, 너무나, 뼈없는 마음으로

오―늬는 무슨 두 뿔따구를 휘저어 보는 것이냐!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시인 / 연안(延安)서 오는 동무 심(沈)에게

 

 

그 전날

이웃나라 동무들이

서금(瑞金)에서 연안으로 막다른 길을 헤치고 가듯

내 나라에서 연안으로

길 없는 길을

만여 리.

다만 외줄로 뚫고 간 벗이여!

 

동무, 이제 내 나라를 찾기에 앞서

벗에게 보내는 말

`동무여! 평안하신가.'

심(沈)이여,

아니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동무와 동무여!

나도 눈물로 외친다.

`동무여 평안하셨나.'

 

동무, 이제 벗을 찾기에 앞서

소식을 전하는 뜻

`부끄러워라. 쫓겨 갔던 몸 돌아옵니다.

내 나라에 끝까지 머무른 동무들의 싸움,

얼마나 괴로웠는가'

얼굴조차 없어라.

우리는 이제 무어라 대답하랴.

 

불타는 가슴,

피끓는 성실은 무엇이 다르랴

그러나 동무,

심(沈)이여!

아니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동무와 동무들이여!

우리들 배자운 싸움 가운데

뜨거이 닫는 힘찬 손이여!

동무, 동무들의 가슴, 동무들의 입, 동무들의 주먹,

아 모든 것은 우리의 것이다.

 

―1945. 12. 13, 김사량(金史良) 동무의 편으로 심(沈)의 안부를 받으며.

 

병든 서울, 정음사, 1946

 

 


 

오장환 시인[吳章煥, 1918.5.5 ~ 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중퇴.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朝鮮文學(조선문학) ≫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등단. 1936년 서정주(徐廷柱)·김동리(金東里)·여상현(呂尙玄)·함형수(咸亨洙) 등과 〈詩人部落(시인부락)〉 동인으로 본격적인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성벽 城壁』(1937)·『헌사 獻辭』(1939)·『병(病)든 서울』(1946)·『나 사는 곳』(1947) 등과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詩集)』(動向社, 1946)이 있음. 월북 이후 시집 『붉은 깃발』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