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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오장환 시인 / 심동(深冬)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16.

오장환 시인 / 심동(深冬)

 

 

눈 쌓인 수풀에

이상한 산새의

시체가 묻히고

 

유리창이 모두 깨어진

양관(洋館)에서는

샴페인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언덕 아래

저기 아, 저기 눈쌓인 새냇가에는

어린 아이가 고기를 잡고

 

눈 위에 피인 숯불은

빨―갛게

죽음은, 아, 죽음은 아름다웁게 불타 오른다.

 

헌사, 남만서방, 1939

 

 


 

 

오장환 시인 / 싸늘한 화단(花壇)

 

 

싸늘한 제단(祭壇)이로다

젖은 풀잎이로다

 

해가 천명(天明)에 다다랐을 때

뉘 회한의 한숨을 들이키느뇨

 

짐승들의 울음이로라

잠결에서야

저도 모르게 느끼는 울음이로라

 

반추하는 위장과 같이

질긴 풍습이 있어

내 이 한밤을 잠들지 못하였노라

 

석유 불을 마시라

등잔 아울러 삼켜 버리라

미사 종소리

보슬비 모양 흐트러진다

 

죄그만 어둠을 터는 숫닭의 날개

싸늘한 제단이로다

기온이 얕은 풀섶이로다

 

언제나 쇠창살 밖으론

떠 가는 구름이 있어

야수들의 회상과 함께 자유롭도다

 

헌사, 남만서방, 1939

 

 


 

 

오장환 시인 / 양(羊)

 

 

양아 어린 양아

조이를 주마.

어째서 너마저

울 안에 사는지

 

양아 어린 양아

보드라운 네 털

구름과 같구나.

 

잔디도 없는

쓸쓸한 목책(木柵) 안에서

양아 어린 양아

너는 무엇을 생각하느냐.

 

양아 어린 양아

조이를 주마.

보낼 곳 없이

그냥 그리움에 내어친 사연

 

양아 어린 양야

샘물같이 맑은 눈

포도알모양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 좀 보아라

가냑한 목책(木柵)에 기대어 서서

양아 어린 양아

나마저 무엇을 생각하느냐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오장환 시인 / 어린 동생에게

 

 

술취한 사나이

위태로운 걸음걸이를

부축이듯,

사랑이여! 아니

나를 사랑하는 스승이여! 동무여!

또 나어린 동생아!

너희들이다

―몸 가누지 못하는 내 마음을

바른 길로 이끎은……

 

걷잡을 수 없는 세월 속에서

어린 동생아

너는 강철 같은 규율, 열화 같은 의지에조차

동방(東紡)에서

경전(京電)에서

철도 노조에서

화신(和信) 쟁의단 속에서,

눈에 뵈지 않는 곳곳에서

근로하는 인민들의 눈을 띄우고

그것이 또한 온 인류의 눈을 띄우는 것이기도 할 때

나는

오늘도 보았다

 

7월 3일 피로 물든

저녁 훈련원 앞에

조선 화물

수천의 종업원이 생사의 문제를 위하여

그 속에는

자기의 몸이 화차에 깔리우며

숨이 끊어질 때까지, 정당한 요구를 위하여

싸운 사람이 있다.

 

육십여 명의 중경상자

총대를 던지고 직업을 팽개치는 사나이

길거리에서 날라 온

무수한 유리병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지

아 나어린 동생아

나는 피할 길 없이 후끈거리는 네 입김에 온몸이 바작바작 마른다

 

따로 떼어 놓고 보면

무한히 어수룩하고

어려 보이는 너희들

어디서 나오는 거친 힘이냐

 

성낸 말같이 너희들을 앞으로 앞으로 달리게 하는 힘이

강철 같은 규율―

불타는 의지라 하면

끝없이 연약한 기운, 예릿예릿한 사랑만이

                  나를,

몸 가누지 못하는 나를,

그 뒤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아 이처럼 말하려는 나

이처럼

발 빼려는 나,

 

너의 뜨거운 사랑을

육친이란 묵은 생각에서 느끼던

다만 옳다는 그것만이

냉혹한 현실에서 합치던,

너의 불붙는 의지로

가물거리는

참으로 가물거리는 내 사랑의 심지에

폭발되게 하여라!

 

강철 같은 규율―

열화 같은 의지,

아 이런 것이

불붙기 비롯하는 내 가슴에

끝없는 내 것으로 만들어 달라

 

백제, 1947. 2

 

 


 

오장환 시인[吳章煥, 1918.5.5 ~ 미상]

본관은 해주(海州). 충청북도 보은에서 출생.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전문부 중퇴. 1933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朝鮮文學(조선문학) ≫에 〈목욕간〉을 발표하며 등단. 1936년 서정주(徐廷柱)·김동리(金東里)·여상현(呂尙玄)·함형수(咸亨洙) 등과 〈詩人部落(시인부락)〉 동인으로 본격적인 詩作 활동 시작. 시집으로 『성벽 城壁』(1937)·『헌사 獻辭』(1939)·『병(病)든 서울』(1946)·『나 사는 곳』(1947) 등과 번역시집 『에세닌 시집(詩集)』(動向社, 1946)이 있음. 월북 이후 시집 『붉은 깃발』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