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 시인 / 석양
보리밭 고랑에 드러누워 솟치는 종다리며 떠가는 구름장이며 울면서 치어다 보았노라.
양지짝의 묘지는 사랑보다 다슷하고나
쓸쓸한 대낮에 달이나 뜨려무나 조그만 도회의 생철 지붕에……
헌사, 남만서방, 1939
오장환 시인 / 성묘하러 가는 길
솔잎이 모두 타는 칙한 더위에 아버님 산소로 가는 산길은 붉은 흙이 옷에 배는 강팍한 땅이었노라.
아 이곳에 새로운 길터를 닦고 그 위에 자갈을 져 나르는 인부들 매미 소리 풀기운조차 없는 산등성이에 고향 사람들은 또 어디로 가는 길을 닦는 것일까.
깊은 골에 남포소리, 산을 울리고 거칠은 동네 앞엔 예전부터 굴러 있던 송덕비.
아버님이여 이런 곳에 님이 두고 가신 주검의 자는 무덤은 아무도 헤아리지 아니하는 황토산에, 나의 가슴에……
무엇을 아뢰이러 찾아 왔는가, 개굴창이 모두 타는 가뭄 더위에 성묘하러 가는 길은 팍팍한 산길이노라.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오장환 시인 / 성벽
세세전대만년성(世世傳代萬年盛)하리라는 성벽은 편협한 야심처럼 검고 빽빽하거니 그러나 보수는 진보를 허락치 않아 뜨거운 물 끼얹고 고춧가루 뿌리던 성벽은 오래인 휴식에 인제는 이끼와 등넝쿨이 서로 엉키어 면도 않은 터거리처럼 지저분하도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시인 / 성씨보(姓氏譜)
오래인 관습―그것은 전통을 말함이다
내 성은 오(吳)씨. 어째서 오(吳)가인지 나는 모른다. 가급적으로 알리어 주는 것은 해주로 이사온 일(一) 청인(淸人)이 조상이라는 가계보의 검은 먹글씨. 옛날은 대국 숭배를 유―심히는 하고 싶어서, 우리 할아버니는 진실 이(李)가였는지 상놈이었는지 알 수도 없다. 똑똑한 사람들은 항상 가계보를 창작하였고 매매하였다. 나는 역사를, 내 성을 믿지 않아도 좋다. 해변가로 밀려온 소라 속처럼 나도 껍데기가 무척은 무거웁고나. 수퉁하고나. 이기적인, 너무나 이기적인 애욕을 잊으려면은 나는 성씨보가 필요치 않다. 성씨보와 같은 관습이 필요치 않다.
성벽(城壁), 풍림사, 1937
오장환 시인 / 성탄제(聖誕祭)
산밑까지 내려온 어두운 숲에 몰이꾼의 날카로운 소리는 들려오고, 쫓기는 사슴이 눈 위에 흘린 따뜻한 핏방울.
골짜기와 비탈을 따라 내리며 넓은 언덕에 밤 이슥히 횃불은 꺼지지 않는다.
뭇 짐승들의 등 뒤를 쫓아 며칠씩 산 속에 잠자는 포수와 사냥개, 나어린 사슴은 보았다 오늘도 몰이꾼이 메고 오는 표범과 늑대.
어미의 상처를 입에 대고 핥으며 어린 사슴이 생각하는 것 그는 어두운 골짝에 밤에도 잠들 줄 모르며 솟는 샘과 깊은 골을 넘어 눈 속에 하얀 꽃 피는 약초.
아슬한 참으로 아슬한 곳에서 쇠북소리 울린다. 죽은 이로 하여금 죽는 이를 묻게 하라.
길이 돌아가는 사슴의 두 뺨에는 맑은 이슬이 내리고 눈 위엔 아직도 따듯한 핏방울……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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