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장환 시인 / 불길(不吉)한 노래
나요. 오장환이요. 나의 곁을 스치는 것은, 그대가 아니요. 검은 먹구렁이요. 당신이요. 외양조차 날 닮았다면 얼마나 기쁘고 또한 신용하리요. 이야기를 돌리오. 이야길 돌리오. 비명조차 숨기는 이는 그대요. 그대의 동족뿐이요. 그대의 피는 거멓다지요. 붉지를 않고 거멓다지요. 음부 마리아모양, 집시의 계집애모양,
당신이요. 충충한 아구리에 까만 열매를 물고 이브의 뒤를 따른 것은 그대 사탄이요. 차디찬 몸으로 친친이 날 감아주시오. 나요. 카인의 말예(末裔)요. 병든 시인이요. 벌(罰)이요. 아버지도 어머니도 능금을 따먹고 날 낳았소.
기생충이요. 추억이요. 독한 버섯들이요. 다릿한 꿈이요. 번뇌요. 아름다운 뉘우침이요. 손발조차 가는 몸에 숨기고, 내 뒤를 쫓는 것은 그대 아니요. 두엄자리에 반사(半死)한 점성사(占星師), 나의 예감이요. 당신이요. 견딜 수 없는 것은 낼름대는 혓바닥이요. 서릿발 같은 면돗날이요. 괴로움이요. 괴로움이요. 피 흐르는 시인에게 이지(理智)의 프리즘은 현기로웁소 어른거리는 무지개 속에, 손가락을 보시오. 주먹을 보시오. 남빛이요―빨갱이요. 잿빛이요. 잿빛이요. 빨갱이요.
헌사, 남만서방, 1939
오장환 시인 / 붉은 산(山)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이따금 솔나무 숲이 있으나 그것은 내 나이같이 어리고나. 가도 가도 붉은 산이다. 가도 가도 고향뿐이다.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오장환 시인 / 비둘기 내 어깨에 앉으라
그리하야 내 마음에 평화(平和)로운 짐을 지우라.
그리움이어 속절없노라. 멀리 바라옴이어… 깊은 농 속에 숨겨 둔 향료(香料)와 같이 아, 그대 또한 흔적 없이 사라지려나
멀리서 오라. 아니 다만 먼 곳에 있으라. 이처럼 바라는 나의 마음이 복받히는 사랑이었든, 설음이든 끝없이 이끌리는 안타까움에 언제나 내 마음은 아름다웠다.
다가서라. 나의 비둘기 한동안 적은 새야 너 어디로 어디로 날 찾아 왔느냐 이제는 내 노래의 샘이 막히고 이제는 내 노래에 아무도 귀기울이지 아니하노라. 아침 이슬 밟고 오는 고 빨간 다리 비둘기 나와 함께 거닐자 깊은 밤 우리들 잠든 새에도 거리엔 낙엽(落葉)이 졌어라.
입맞추라 비둘기! 사랑하는 이의 이마에, 나의 뺨에, 나의 목에, 그리고 나의 가슴에…… 늬들 사랑에 못 이겨 구 구 구 울듯이
나 사는 곳, 헌문사, 1947
오장환 시인 / 상렬(喪列)
고운 달밤에 상여야, 나가라 처량히 요령 흔들며
상주도 없는 삿갓가마에 나의 쓸쓸한 마음을 싣고
오늘밤도 소리 없이 지는 눈물 달빛에 젖어
상여야 고웁다 어두운 숲 속 두견이 목청은 피에 적시어……
헌사, 남만서방,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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