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소월 시인 / 하다못해 죽어 달래가 옳나
아주 나는 바랄 것 더 없노라 빛이랴 허공이랴, 소리만 남은 내 노래를 바람에나 띄워서 보낼 밖에. 하다못해 죽어 달래가 옳나 좀 더 높은 데서나 보았으면!
한세상 다 살아도 살은 뒤 없을 것을, 내가 다 아노라 지금까지 살아서 이만큼 자랐으니 예전에 지내 본 모든 일을 살았다고 이를 수 있을진댄!
물가의 닳아져 널린 굴 꺼풀에 붉은 가시덤불 뻗어 늙고 어둑어둑 저문 날을 비바람에 울지는 돌무더기 하다못해 죽어 달래가 옳나 방의 고요한 때라도 지켰으면!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해 넘어가기 전(前) 한참은
해 넘어가기 전 한참은 하염없기도 그지없다, 연주홍물 엎지른 하늘 위에 바람의 흰 비둘기 나돌으며 나뭇가지는 운다.
해 넘어가기 전 한참은 조마조마하기도 끝없다, 저의 맘을 제가 스스로 늦구는 이는 복 있나니 아서라, 피곤한 길손은 자리잡고 쉴지어다.
까마귀 좇닌다 종소리 비낀다. 송아지가 `음마' 하고 부른다. 개는 하늘을 쳐다보며 짖는다.
해 넘어가기 전 한참은 처량하기도 짝없다 마을 앞 개천가의 체지(體地) 큰 느티나무 아래를 그늘진 데라 찾아 나가서 숨어 울다 올꺼나.
해 넘어가기 전 한참은 귀엽기도 더하다. 그렇거든 자네도 이리 좀 오시게 검은 가사로 몸을 싸고 염불이나 외우지 않으랴.
해 넘어가기 전 한참은 유난히 다정도 할세라 고요히 서서 물모루 모루모루 치마폭 번쩍 펼쳐 들고 반겨오는 저 달을 보시오.
미발표, 소월시초, 1939
김소월 시인 / 황촉(黃燭)불
황촉불, 그저도 까맣게 스러져 가는 푸른 창을 기대고 소리조차 없는 흰 밤에, 나는 혼자 거울에 얼굴을 묻고 뜻 없이 생각 없이 들여다보노라. 나는 이르노니, `우리 사람들 첫날밤은 꿈 속으로 보내고 죽음은 조는 동안에 와서, 별 좋은 일도 없이 스러지고 말아라.'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희망
날은 저물고 눈이 내려라 낯설은 물가으로 내가 왔을 때. 산 속의 올빼미 울고 울며 떨어진 잎들은 눈 아래로 깔려라.
아아 숙살(肅殺)스러운 풍경이여 지혜의 눈물을 내가 얻을 때! 이제금 알기는 알았건마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한갓 아름다운 눈어림의 그림자뿐인 줄을.
이울어 향기 깊은 가을밤에 우무주러진 나무 그림자 바람과 비가 우는 낙엽 위에.
진달래꽃, 매문사,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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