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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소월 시인 / 하다못해 죽어 달래가 옳나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14.

김소월 시인 / 하다못해 죽어 달래가 옳나

 

 

아주 나는 바랄 것 더 없노라

빛이랴 허공이랴,

소리만 남은 내 노래를

바람에나 띄워서 보낼 밖에.

하다못해 죽어 달래가 옳나

좀 더 높은 데서나 보았으면!

 

한세상 다 살아도

살은 뒤 없을 것을,

내가 다 아노라 지금까지

살아서 이만큼 자랐으니

예전에 지내 본 모든 일을

살았다고 이를 수 있을진댄!

 

물가의 닳아져 널린 굴 꺼풀에

붉은 가시덤불 뻗어 늙고

어둑어둑 저문 날을

비바람에 울지는 돌무더기

하다못해 죽어 달래가 옳나

방의 고요한 때라도 지켰으면!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해 넘어가기 전(前) 한참은

 

 

해 넘어가기 전 한참은

하염없기도 그지없다,

연주홍물 엎지른 하늘 위에

바람의 흰 비둘기 나돌으며 나뭇가지는 운다.

 

해 넘어가기 전 한참은

조마조마하기도 끝없다,

저의 맘을 제가 스스로 늦구는 이는 복 있나니

아서라, 피곤한 길손은 자리잡고 쉴지어다.

 

까마귀 좇닌다

종소리 비낀다.

송아지가 `음마' 하고 부른다.

개는 하늘을 쳐다보며 짖는다.

 

해 넘어가기 전 한참은

처량하기도 짝없다

마을 앞 개천가의 체지(體地) 큰 느티나무 아래를

그늘진 데라 찾아 나가서 숨어 울다 올꺼나.

 

해 넘어가기 전 한참은

귀엽기도 더하다.

그렇거든 자네도 이리 좀 오시게

검은 가사로 몸을 싸고 염불이나 외우지 않으랴.

 

해 넘어가기 전 한참은

유난히 다정도 할세라

고요히 서서 물모루 모루모루

치마폭 번쩍 펼쳐 들고 반겨오는 저 달을 보시오.

 

미발표, 소월시초, 1939

 

 


 

 

김소월 시인 / 황촉(黃燭)불

 

 

황촉불, 그저도 까맣게

스러져 가는 푸른 창을 기대고

소리조차 없는 흰 밤에,

나는 혼자 거울에 얼굴을 묻고

뜻 없이 생각 없이 들여다보노라.

나는 이르노니, `우리 사람들

첫날밤은 꿈 속으로 보내고

죽음은 조는 동안에 와서,

별 좋은 일도 없이 스러지고 말아라.'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시인 / 희망

 

 

날은 저물고 눈이 내려라

낯설은 물가으로 내가 왔을 때.

산 속의 올빼미 울고 울며

떨어진 잎들은 눈 아래로 깔려라.

 

아아 숙살(肅殺)스러운 풍경이여

지혜의 눈물을 내가 얻을 때!

이제금 알기는 알았건마는!

이 세상 모든 것을

한갓 아름다운 눈어림의

그림자뿐인 줄을.

 

이울어 향기 깊은 가을밤에

우무주러진 나무 그림자

바람과 비가 우는 낙엽 위에.

 

진달래꽃, 매문사, 1924

 

 


 

김소월 [金素月 1902∼1934] 시인

1902년 평안북도 구성에서 출생했다. 본명은 정식이다. 오산 학교 중학부를 거쳐 배재 고보를 졸업하고 도쿄 상대를 중퇴했다. 당시 오산 학교 교사였던 안서 김억의 지도와 영향아래 시를 쓰기 시작하였으며, 1920년에 「낭인의 봄」, 「그리워」 등을 발표하여 시인이 되었다. 1922년에 「금잔디」, 「엄마야누나야」, 「닭은 꼬꾸요」 등을 '개벽'지에 발표하였으며, 이어 같은 잡지 7월호에 떠나는 님을 진달래로 축복하는 한국 서정시의 기념비적 작품인 「진달래꽃」 을 발표하여 크게 각광받았다.

7·5조의 정형률을 바탕으로 한시를 많이 써서 한국의 전통적인 한을 노래한 시인이라고 평가받으며, 짙은 향토성을 전통적인 서정으로 노래한 그의 시는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저서로는 1925년에 그의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이 매문사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