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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억 시인 / 사계(四季)의 노래 외 2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13.

김억 시인 / 사계(四季)의 노래

 

 

고운 생각 가득한 나물광주리를 옆에 끼고

인생(人生)의 첫 이슬에 발을 적시는 봄철의 따님이여,

꽃을 우랴는 고운 바람에, 그대의 보드람은

가슴의 사랑의 꽃봉우리는 지금(只今) 떨고 있어라.

미칠듯한 열락(悅樂)에 몸과 맘을 다 잊고 뛰노는

황혼(黃昏)의 때 아닌 졸음을 그리워하는 여름의 맘이여,

행복(幸福)의 명정(酩酊), 음울(陰鬱)의 생각은 지금(只今) 그대를 둘러싸고

끝없는 꿈으로 병인(病因)한 `인생(人生)'을 곱게 하여라.

빛깔 없게도 고개를 숙이고, 묵상(黙想)에 고요한 가을이여,

냉락(冷落)을 소군거리는 낙엽(落葉)의 비노래가락은

들을 거쳐, 넓다란 맘의 세계(世界)에도 빗겨들어,

곳곳마다 `죽은 맘'의 장사(葬事)에 한갓 분주하여라.

흰옷을 입고, 고요히 누웠는 겨울의 베니스 여신(女神)이여,

건독(乾毒)만 남고, 눈물 흔적조차 없는 너의 눈가에는

아무리 잃어진 애인(愛人)을 그립게 찾는 빛을 띠었어도

쓸데조차 없어라, 한때인 사랑은 올 길이 없어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사랑의 때

 

 

첫째

 

어제는 자취도 없이 흘러갔습니다,

내일(來日)도 그저 왔다가 그저 갈 것입니다,

그러고, 다른 날도 그 모양으로 가겠지요,

그러면, 내 사람아, 오늘만을 생각할까요.

 

즐거운 때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고운 웃음도 잠깐 동안의 꽃이지요.

 

때는 한 동안 기쁨의 꽃을 피웠다가는

두르는 동안에 그 꽃을 가지고 갑니다,

곱고도 설건만은 때의 힘을 어찌합니까,

그러면, 내 사람아, 오늘만을 생각할까요.

 

즐거운 때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고운 웃음도 잠깐 동안의 꽃이지요.

 

둘째

 

물은 밤낮으로 흘러내리고

산(山)은 각각(刻刻)으로 무너집니다,

세상(世上)의 곱다는 온갓 것들은

나날이 달라가며 스러집니다.

 

그러면, 내사람아, 우리는

사랑과 함께 춤을 출까요.

 

아름다운 이 세상(世上)의 사랑에

몹쓸 때가 설움의 종자(種子)를 뿌립니다,

이 종자(種子)의 음을 따서 노래부르면

도리어 사랑을 모르던 옛날이 그립습니다.

 

그러면, 내 사람아, 우리는

사랑도 그만두고 말까요.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상실(喪失)

 

 

가을의

샛말간 하늘에

한 조각의 검은 구름이

무슨 일이나 생긴 듯이,

뜨다가는 스러지고

스러졌다가는 뜨고는 한다.

 

고요한 나의 맘바다의

고요한 한 복판에는

이름모를 무엇이

무슨 일이나 생긴 듯이,

구슬프게도 다만 혼자서

잔 물살을 내이고 있다.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金億) 시인 [1893.11.30~?]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를 낸 시인. 주요저서 : 《오뇌의 무도》 《해파리의 노래》 《꽃다발》 《망우초》 호: 안서(岸曙). 본명: 희권(熙權). 평북 정주(定州) 출생. 오산중학(五山中學)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를 중퇴하였다. 모교인 오산중학과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동아일보》와 경성방송국에서도 근무하였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평의원 등을 지내면서 친일활동을 하였다.

8 ·15광복 후에는 출판사에 몸담고 있다가 6 ·25전쟁 때 납북되었다. 20세 때인 1912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특히 투르게네프 ·베를렌 ·구르몽 등의 시를 번역 ·소개하여 한국 시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는 베를렌 ·보들레르 등의 시를 번역한 것으로서 한국 시단에 상징적 ·퇴폐적 경향을 낳게 하는 촉매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타고르의 《기탄잘리》 《원정(園丁)》 《신월(新月)》 등을 번역하였고, 그 밖에 A.시몬즈 시집 《잃어버린 진주》와 한시의 번역 시집인 《꽃다발》 《망우초》 《중국 여류시선》 등이 있다. 1923년에 간행된 그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으로서 인생과 자연을 7 ·4조, 4 ·4조 등의 민요조(民謠調) 형식으로 담담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에스페란토의 선구적 연구가로서 1920년 에스페란토 보급을 위한 상설 강습소를 만들었는데, 한성도서에서 간행한 《에스페란토 단기 강좌》(1932)는 한국어로 된 최초의 에스페란토 입문서이다. 그는 특히 오산학교에서 김소월(金素月)을 가르쳐 그를 시단에 소개한 공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