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 시인 / 신작로(新作路)
행객(行客)은 오고가고 가고옵니다. 자욱은 자욱밟아 티끌이외다, 바람부니 그나마 티끌 납니다. 님이어, 이 한 생(生)은 신작로(新作路)외까.
신작로(新作路)는 이내 맘 분주도 하이 밤낮으로 행객(行客)은 끊일 때 없네, 먼지 속에 발자욱 어지러우니 꿈타고 지내신 님 어이 찾을고.
행(幸)여나 님 오실까 닦은 신작로(新作路) 낯설은 행객(行客)들만 뭐라 오갈고 쓸데없는 자욱에 먼지만 일고 기두는 님 행차(行次)는 이 날도 없네.
신작로(新作路)엔 자동차(自動車) 달아납니다, 길도 없는 바다를 배는 갑니다, 빈 하늘 푸른 길엔 새가 납니다, 임이여 어느 길을 저는 가리까.
저기서 풀밭 속에 길 있습니다 외마디 자욱길로 어지럽쇠다, 아무도 안다니어 고요하외다, 임이여, 가십시다, 저 길이외다.
안서시초, 박문서관, 1941
김억 시인 / 실제(失題)
내 귀가 님의 노래 가락에 잡혔을 때에 그대가 고운 노래를 내 귀에 보내었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노래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내 눈이 님의 맘의 꽃밭에서 노닐 때에 그대가 그대의 맘의 꽃밭으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맘의 꽃밭은 보이지 않습니다.
내 입이 님의 보드라운 입술과 마주칠 때에 그대가 그대의 보드라운 입술로 불렀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입술은 닫히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코가 님의 스며나는 향(香)내에 취(醉)하였을 때에 그대가 그대의 스며나는 향(香)내를 보내었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향(香)내는 맡아지지 않았습니다.
내 꿈이 님의 무릎위에서 고요하였을 때에 그대가 그대의 무릎위로 내 꿈을 불렀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꿈은 깨지를 못하였습니다.
지금(只今) 내 맘이 깨어 두번 그대를 찾을 때에는 찾는 그대는 간 곳이 없고 임만 남았습니다, 아아 이렇게 살림은 밤낮으로 이어졌습니다.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십일월(十一月)의 저녁
바람에 불리우는 옷 벗은 나무수풀로 작은 새가 날아갈 때, 하늘에는 무거운 구름이 떠돌 며 저녁해는 고요히도 넘어라.
고요히 서서, 귀 기울이며 보아라, 어둑한 설은 회한(悔恨)은 어두워지는 밤과 함께, 안식(安息)을 기다리는 맘 위에 내려오며, 빛깔도 없이, 핼금한 달은 또다시 울지 않는가. 나의 영(靈)이여, 너는 오늘도 어제와 같이, 혼자 머리를 숙이고 쪼그리고 있어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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