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 시인 / 우정(友情)
사랑은 저문 봄날의 꽃보다도 가이 없고, 우정(友情)은 술잔에서 술잔으로 떠돌아가며 거짓의 울음과 값없는 웃음을 흘리다가는 어리운 담뱃내보다도 더 쉽게 스러지나니, 다음에 남는 설움이야 한(限)이나 있으랴.
사람아, 기운(氣運)있게 인생(人生)의 길을 밟는 우리의 맘과 맘과는 한번(番)조차 맞은 적이 없어라, 그러면, 늦은 봄날의 꽃도 지는 이 저녁에 나는 떠돌아가는 술잔을 입에 대이고 우정(友情) 가득한 그대의 얼굴을 혼자 보며 웃노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원산(元山)서
하이얀 흰 돛대는 넓은 바다 동해(東海)의 저 먼 곳에 떠돌고,
하이얀 흰 구름은 가없는 넓은 하늘 방향(方向) 없이 헤맬 제,
바닷가 모래밭 위 푸른 양산(陽傘) 아래선 누구를 기다릴까, 젊은 아씨 혼자서.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김억 시인 / 읽어지는 기억(記憶)
고요한 밤의, 고요히 쉬는 바다 위에 반듯거리는 별의 희미한 빛과도 같이, 아름다운 여름의 온갖 빛을 다 잃은 있을 듯 말 듯한 향(香)내를 놓는 꽃의 맘이여.
뒤설레는 바람의 하룻밤을 시달린 명일(明日)이면 말라 없어질, 생각의 꽃의 떨면서 헤치는 적은 향(香)내를 곱게도 맡으며, 바리운 맘이여, 사랑하여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입
온갖의 화병(禍病)은 입으로 들어가고, 온갖의 화복(禍福)은 입에서 생겨라, 그러하다, 나의 이 입으로 읊어진 노래는 세기(世紀) 끝에 생기는 Malady(멜라디)의 쓰린 신음(呻吟), 사랑의 사체(死體)를 파묻는 야릇한 숨소리러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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