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시인 / R씨(氏)의 초상(肖像)
내가 화가(畵家)여서 당신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린다면 지금 십년(十年)만에 대(對)한 당신의 얼굴을 그린다면 채색(彩色)이 없어 파레트를 들지 못하겠소이다. 화필(畵筆)이 떨려서 획(劃) 하나도 긋지 못하겠소이다.
당신의 얼굴에 저다지 찌들고 바래인 빛깔을 칠할 물감은 쓰리라고 생각도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이마에 수(數) 없이 잡힌 주름살을 그릴 가느다란 붓은 준비(準備)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물결 거칠은 황포탄(黃浦灘)에서 생선(生鮮)같이 날뛰던 당신이 고랑을 차고 삼년(三年) 동안이나 그 물을 뜨다니 될 뻔이나 한 일입니까 물푸레나무처럼 꿋꿋하고 물 오른 버들만치나 싱싱하던 당신이 때아닌 서리를 맞아 가랑잎이 다 될 줄 누가 알았으리까.
`이것만 뜯어 먹고도 살겠다'던 여덟 팔자(八字) 수염은 흔적(痕迹)도 없이 깎이고 그 터럭에 백발(白髮)까지 섞였습니다그려. 오오 그러나 눈만은 샛별인듯 전(前)과 같이 빛나고 있습니다. 불똥이 떨어져도 꿈쩍도 아니하던 저 눈만은 살았소이다!
내가 화가(畵家)여서 지금 당신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린다면 백호(百號)나 되는 큰 칸바쓰에 저 눈만을 그리겠소이다. 절망(絶望)을 모르고 끝까지 조금도 비관(悲觀)치 않는 저 형형(炯炯)한 눈동자만을 전신(全身)의 힘을 다하여 한 획(劃)으로 그리겠소이다.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가배절(嘉俳節)
팔이 곱지 않았으니 더덩실 춤을 못추며 다리 못 펴 병신(病身) 아니니 가로 세로 뛰진들 못하랴 벼이삭은 고개 숙여 벌판에 금(金)물결이 일고 달빛은 초가(草家)집 용마루를 어루만지는 이 밤에―
뒷동산에 솔잎 따서 송편을 찌고 아랫목에 신청주(新淸酒) 익어선 밥풀이 동동 내 고향(故鄕)의 추석(秋夕)도 그 옛날엔 풍성(豊盛)했다네 비렁뱅이도 한가위엔 배를 두드렸다네.
기쁨에 넘쳐 동네방네 모여드는 그날이 오면 기저귀로 고깔 쓰고 무둥서지 않으리 쓰레받기로 꽹가리치며 미쳐나지 않으리, 오오 명절(名節)이 그립구나! 단 하루의 경절(慶節)이 가지고 싶구나!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거리의 봄
지난 겨울 눈밤에 얼어 죽은 줄 알았던 늙은 거지가 쓰레기통 곁에 살아 앉았네. 허리를 펴며 먼 산(山)을 바라다보는 저 눈초리! 우묵하게 들어간 그 눈동자 속에도 봄이 비최는구나 봄빛이 떠도는구나.
원망스러워도 정(情)든 고토(故土)에 찾아드는 봄을 한번이라도 저 눈으로 더 보고 싶어서 무쇠도 얼어 붙는, 그 치운 겨울에 잇발을 앙물고 살아 왔구나 죽지만 않으면 팔다리 뻗어 볼 시절(時節)이 올 것을 점(占)쳐 아는 늙은 거지여 그대는 이땅의 선지자(先知者)로다.
사랑하는 젊은 벗이여, 그대의 눈에 미지근한 눈물을 걷우라! 그대의 가슴을 헤치고 헛된 탄식(歎息)의 뿌리를 뽑아 버리라! 저 늙은 거지도 기를 쓰고 살아 왔거늘 그 봄도 우리의 봄도, 눈앞에 오고야 말 것을 아아, 어찌하여 그대들은 믿지 않는가?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겨울밤에 내리는 비
뒤숭숭한 이상스러운 꿈에 어렴풋이 잠이 깨어 힘없이 눈을 뜬 채 늘어져 창 밖의 밤비 소리를 듣고 있다.
음습한 바람은 방안을 휘돌고 개는 짖어 컴컴한 성안을 울릴 제 철 아닌 겨울밤에 내리는 비! 나의 마음은 눈물비에 고요히 젖는다.
이 팔로 향기로운 애인의 머리를 안고 여름밤 섬돌에 듣는 낙수의 피아노 즐거운 속살거림에 첫닭이 울던 그윽하던 그 밤은 벌써 옛날이여라.
오 사랑하는 나의 벗이여! 꿈에라도 좋으니 잠깐만 다녀가소서 찬비는 객창에 부딪치는데 긴 긴 이밤을 아, 나 홀로 어찌나 밝히잔 말이냐.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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