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억 시인 / 전원(田園)의 황씨(黃氏)
집이면 집마다 떠오르는 연기(烟氣), 서(西)녘 하늘에는 곱게도 물들인 붉은 구름, 공중(空中)으로 올라서는 헤매며 스러질 때, 나무가지에서는 비둘기가 울고 있어라.
안개는 숲속에서 생기는 듯이 스미어서는 조는 듯 고요히 누운 넓은 들을 덮으며, 어두워가는 밤속에서 새 꿈을 맺으려는 촌락(村落)에는 들벌레 소리가 어지러워라.
이리하야 핼금한 둥그런 달이 하염없는 곤피(困疲)의 걸음을 이을 때, 나무 아래에는 시비(是非)도 없는 농인(農人)의 한담(閒談), 저 산(山)기슭의 교회당(敎會堂)에서는 찬송의 노래,
깊어만 가는 밤에는 이것밖에 아무 것도 들림 없이 고요하여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조약돌
하소연 많은 열여덟 이내 심사(心思) 풀을 길 없이 선창(船倉)가 홀로 나가 하나둘 조약돌을 모으노라면 어느덧 여름날은 넘고 맙니다.
떠도는 배는 한바다의 저 먼 곳 외대백이 흰 돛대 행(幸)여 보일까 손작란(作亂) 삼아 조약돌 헤노라면 어느덧 외대백이 잊고 맙니다.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김억 시인 / 참살구
고소한 참살구씨라고 서로 아껴가며 짜먹던 것이, 나중에는 두알밖에 안남았을 때에 이것은 심었다가 종자(種子)를 하자고, 네 살 위되는 누이님이 나를 권(勸)했소.
살구씨를 심은 지가 몇 해나 되었는지, 해마다 진달래꽃이 진 뒤에는 그 살구나무에 하얀 꽃이 피게 된 지도 오래었소.
맛있는 참살구라고 어린 동생(同生)들을 귀(貴)해 하며, 해마다 늦은 보리가 익었을 때에 그들은 종자(種子)하자는 말도 없이, 야단을 하면서 번(番)갈아 따먹소.
누이님이 돌아가신 지 몇 해나 되었는지, 해마다 살구꽃이 진 뒤에는 그 무덤에 이름모를 꽃이 피게 된 지도 오래었소.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코스모스
하이얀 코스모스 혼자 피어서 늦가을 찬 바람에 시달리우네 불서러운 그 경상(景狀) 하도 애연해 손잡으니 가엽다, 꽃지고 마네.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김억 시인 / 탄실이
지나간 삼월(三月)에 이별(離別)한 평양(平壤) 탄실이는 아직도 나를 믿고 그대로 있을까.
바람에 떠서 도는 뜬 몸이길래 살뜰이도 못 내그려 예도록 안 잊힌다.
예도록 안 잊는 몸을 불쌍이나 생각하고 아직도 탄실이는 그대로 있을까.
안서시초, 박문서관,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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