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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근대)

김억 시인 / 전원(田園)의 황씨(黃氏) 외 4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16.

김억 시인 / 전원(田園)의 황씨(黃氏)

 

 

집이면 집마다 떠오르는 연기(烟氣),

서(西)녘 하늘에는 곱게도 물들인 붉은 구름,

공중(空中)으로 올라서는 헤매며 스러질 때,

나무가지에서는 비둘기가 울고 있어라.

 

안개는 숲속에서 생기는 듯이 스미어서는

조는 듯 고요히 누운 넓은 들을 덮으며,

어두워가는 밤속에서 새 꿈을 맺으려는

촌락(村落)에는 들벌레 소리가 어지러워라.

 

이리하야 핼금한 둥그런 달이

하염없는 곤피(困疲)의 걸음을 이을 때,

나무 아래에는 시비(是非)도 없는 농인(農人)의 한담(閒談),

저 산(山)기슭의 교회당(敎會堂)에서는 찬송의 노래,

 

깊어만 가는 밤에는 이것밖에

아무 것도 들림 없이 고요하여라.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조약돌

 

 

하소연 많은 열여덟 이내 심사(心思)

풀을 길 없이 선창(船倉)가 홀로 나가

하나둘 조약돌을 모으노라면

어느덧 여름날은 넘고 맙니다.

 

떠도는 배는 한바다의 저 먼 곳

외대백이 흰 돛대 행(幸)여 보일까

손작란(作亂) 삼아 조약돌 헤노라면

어느덧 외대백이 잊고 맙니다.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김억 시인 / 참살구

 

 

고소한 참살구씨라고

서로 아껴가며 짜먹던 것이,

나중에는 두알밖에 안남았을 때에

이것은 심었다가 종자(種子)를 하자고,

네 살 위되는 누이님이 나를 권(勸)했소.

 

살구씨를 심은 지가 몇 해나 되었는지,

해마다 진달래꽃이 진 뒤에는

그 살구나무에 하얀 꽃이 피게 된 지도 오래었소.

 

맛있는 참살구라고

어린 동생(同生)들을 귀(貴)해 하며,

해마다 늦은 보리가 익었을 때에

그들은 종자(種子)하자는 말도 없이,

야단을 하면서 번(番)갈아 따먹소.

 

누이님이 돌아가신 지 몇 해나 되었는지,

해마다 살구꽃이 진 뒤에는

그 무덤에 이름모를 꽃이 피게 된 지도 오래었소.

 

해파리의 노래, 조선도서주식회사, 1923

 

 


 

 

김억 시인 / 코스모스

 

 

하이얀 코스모스 혼자 피어서

늦가을 찬 바람에 시달리우네

불서러운 그 경상(景狀) 하도 애연해

손잡으니 가엽다, 꽃지고 마네.

 

안서시집, 한성도서주식회사, 1929

 

 


 

 

김억 시인 / 탄실이

 

 

지나간 삼월(三月)에 이별(離別)한

평양(平壤) 탄실이는

아직도 나를 믿고

그대로 있을까.

 

바람에 떠서 도는

뜬 몸이길래

살뜰이도 못 내그려

예도록 안 잊힌다.

 

예도록 안 잊는 몸을

불쌍이나 생각하고

아직도 탄실이는

그대로 있을까.

 

안서시초, 박문서관, 1941

 

 


 

김억(金億) 시인 [1893.11.30~?]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를 낸 시인. 주요저서 : 《오뇌의 무도》 《해파리의 노래》 《꽃다발》 《망우초》 호: 안서(岸曙). 본명: 희권(熙權). 평북 정주(定州) 출생. 오산중학(五山中學)을 졸업하고 일본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문과를 중퇴하였다. 모교인 오산중학과 평양 숭덕학교(崇德學校)에서 교편을 잡고 《동아일보》와 경성방송국에서도 근무하였다. 1941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조선문인협회 간사, 조선문인보국회평의원 등을 지내면서 친일활동을 하였다.

8 ·15광복 후에는 출판사에 몸담고 있다가 6 ·25전쟁 때 납북되었다. 20세 때인 1912년부터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고, 특히 투르게네프 ·베를렌 ·구르몽 등의 시를 번역 ·소개하여 한국 시단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초의 번역 시집 《오뇌의 무도》는 베를렌 ·보들레르 등의 시를 번역한 것으로서 한국 시단에 상징적 ·퇴폐적 경향을 낳게 하는 촉매적 역할을 하였다. 또한 타고르의 《기탄잘리》 《원정(園丁)》 《신월(新月)》 등을 번역하였고, 그 밖에 A.시몬즈 시집 《잃어버린 진주》와 한시의 번역 시집인 《꽃다발》 《망우초》 《중국 여류시선》 등이 있다. 1923년에 간행된 그의 시집 《해파리의 노래》는 근대 최초의 개인 시집으로서 인생과 자연을 7 ·4조, 4 ·4조 등의 민요조(民謠調) 형식으로 담담하게 노래한 것이 특징이다. 한편, 에스페란토의 선구적 연구가로서 1920년 에스페란토 보급을 위한 상설 강습소를 만들었는데, 한성도서에서 간행한 《에스페란토 단기 강좌》(1932)는 한국어로 된 최초의 에스페란토 입문서이다. 그는 특히 오산학교에서 김소월(金素月)을 가르쳐 그를 시단에 소개한 공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