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근대)

심훈 시인 / 고독(孤獨) 외 3편

by 파스칼바이런 2019. 10. 16.

심훈 시인 / 고독(孤獨)

 

 

진종일(盡終日) 앓아 누워 다녀 간 것들 손꼽아 보자니

창(窓)살을 걸어간 햇발과 마당에 강아지 한 마리

두 손길 펴서 가슴에 얹은 채 임종(臨終) 때를 생각해 보다.

 

그림자하고 단 둘이서만 지내는 살림이어늘

천장이 울리도록 그의 이름은 왜 불렀는고

쥐라도 들었을사라 혼자서 얼굴 붉히네.

 

밤 깊어 첩첩(疊疊)히 닫힌 덧문(門)밖에 그 무엇이 뒤설레는고

미닫이 열어 젖히자 굴러드느니 낙엽(落葉) 한잎새

머리맡에 어루만져 재우나 바시락거리며 잠은 안 자네.

 

값 없는 눈물 흘리지 말자고 몇 번이나 맹서(盟誓)했던고

울음을 씹어서 웃음으로 삼키기도 한 버릇 되었으련만

밤중이면 이불 속에서 그 울음을 깨물어 죽이네.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고루(鼓樓)의 삼경(三更)

 

 

눈은 쌓이고 쌓여

객창(客窓)을 길로 덮고

몽고(蒙古)바람 씽씽 불어

왈각달각 잠 못드는데

북이 운다 종(鐘)이 운다.

대륙(大陸)의 도시(都市), 북경(北京)의 겨울 밤에―

 

화로(火爐)에 메취ㄹ[煤炭]도 꺼지고

벽(壁)에는 성애가 슬어

얼음장 같은 촹* 위에

새우처럼 오그린 몸이

북소리 종(鐘)소리에 부들부들 떨린다.

지구(地球)의 맨 밑바닥에 동그마니 앉은 듯

마음조차 고독(孤獨)에 덜덜덜 떨린다.

 

거리에 땡그렁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호콩 장사도 인제는 얼어 죽었나 보다.

입술을 꼭꼭 깨물고 이 한밤을 새우면

집에서 편지나 올까? 돈이나 올까?

만터우* 한 조각 얻어먹고 긴 밤을 떠는데

고루(鼓樓)에 북이 운다 종(鍾)이 운다

 

* 촹은 나무 침상(寢床), 만터우는 밀가루떡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고향(故鄕)은 그리워도

 

 

나는 내 고향(故鄕)에 가지를 않소.

쫓겨난 지가 십년(十年)이나 되건만

한 번도 발을 들여 놓지 않았소,

멀기나 한가, 고개 하나 넘어연만

오라는 사람도 없거니와 무얼 보러 가겠소?

 

개나리 울타리에 꽃 피던 뒷동산은

허리가 잘려 문화주택(文化住宅)이 서고

사당(祠堂)헐린 자리엔 신사(神社)가 들어 앉았다니,

전하는 말만 들어도 기가 막히는데

내 발로 걸어 가서 눈꼴이 틀려 어찌 보겠소?

 

나는 영영 가지를 않으려오

오대(五代)나 내려오며 살던 내 고장이언만

비렁뱅이처럼 찾아가지는 않으려오

후원(後園)의 은행(銀杏)나무나 부둥켜안고

눈물을 지으려고 기어든단 말이요?

 

어느 누구를 만나려고 내가 가겠소?

잔뼈가 굵도록 정(情)이 든 그 산(山)과 그 들을

무슨, 낯짝을 쳐들고 보더란 말이요?

번접하던 식구는 거미같이 흩어졌는데

누가 내 손목을 잡고 옛날 이야기나 해 줄상 싶소?

 

무얼 하려고 내가 그 땅을 다시 밟겠소?

손수 가꾸던 화단(花壇) 아래 턱이나 고이고 앉아서

지나간 꿈의 자최나 더듬어 보라는 말이요?

추억(追憶)의 날개나마 마음대로 펼치는 것을

그 날개마저 찢기면 어찌하겠소?

 

이대로 죽으면 죽었지 가지 않겠소

빈손 들고 터벌터벌 그 고개는 넘지 않겠소

그 산(山)과 그 들이 내닫듯이 반기고

우리 집 디딤돌에 내 신을 다시 벗기 전(前)엔

목을 매어 끌어도 내고향(故鄕)엔 가지 않겠소.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곡(哭) 서해(曙海)

 

 

온 종일(終日) 줄줄이 내리는 비는

그대가 못 다 흘리고 간 눈물 같구려

인왕산(仁旺山) 등성이에 날만 들면 이 비도 개련만……

 

어린것들은 어른의 무릎으로 토끼처럼 뛰어다니며

`울아버지 죽었다'고 자랑삼아 재잘대네

모질구려, 조것들을 남기고 눈이 감아집니까?

 

손수 내 어린것의 약(藥)을 지어다 주던 그대여

어린것은 나아서 요람(搖籃) 위에 벙글벙글 웃는데

꼭 한 번 와 보마더니 언제나 언제나 와 주시려오?

 

그 유모러스한 웃음은 어디 가서 웃으며

그 사기(邪氣) 없는 표정(表情)은 어느 얼굴에서 찾드란 말이요?

사람들 반기는 그대의 손은 유난히도 더웠습넨다.

 

입술을 깨물고 유언(遺言) 한 마디 아니한 그대의 심사(心思)를

뉘라서 모르리까 어느 가슴엔들 새겨지지 않았으리까

설마 그대의 노모약처(老母弱妻)를 길바닥에 나앉게야 하오리까

 

사랑하던 벗이 한 걸음 앞서거니 든든은 하오마는

삼십(三十) 평생(平生)을 숨도 크게 못 쉬도록 청춘(靑春)을 말려 죽인

살뜰한 이놈의 현실(現實)에 치(齒)가 떨릴 뿐이외다!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沈熏) 시인 / 소설가.영화인) 1901년-1936년

본명은 심대섭(沈大燮). 본관은 청송(靑松). 호는 해풍(海風). 아명은 삼준 또는 삼보. 서울 출생. 아버지 심상정(沈相珽)의 3남 1녀 중 3남이다. 1915년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7년 왕족인 이해영(李海暎)과 혼인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투옥, 퇴학당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