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시인 / 가두로 울며 헤매는 자여
하로의 삶을 이으려고, 삶을 찾으려고
주린 창자를 웅켜쥔 후 거리 거리를 헤매는 군중(群衆), 때때로 정기(精氣)없는 눈에서는 두줄기의 눈물이 흐르며 피ㅅ기 없는 입술을 악물고 떨고 있나니 토막(土幕)에 있는 처와 자식이 힘없이 누워 있음을 생각함이다.
날카로운 세기(世紀)―. 팔목을 걷고 일만 하면은 살 수 있다는 도덕(道德)도 지나간 날의 한 썩어빠진 진리(眞理)가 안인가. 눈앞에 있는 순간적(瞬間的) 향락(享樂)에 도취(陶醉)되여 있는 무리, 빈 주먹을 들고 가두(街頭)로 울며 헤매는 무리. 술! 돈! 쾌락(快樂)! 피! 땀! 눈물! 아하, 너무나 지나친 간격(間隔)있는 대조(對照)여.
그러나, 그러나― 마음에 뜻 안했던 상처를 받고 가두(街頭)로 울며 헤매는 자(者)여! 지금의 원한을 가슴 깊이 묻어 두어라, 눈물을 갑없이 흘리지 마러라.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강(强)한 여성(女性)
자식은 아직 약(弱)하나, 그러나 그를 기를 어머니는 강(强)하다.
그렇게 목에 핏대줄을 세우고 울든 자식이 그래도 어머니의 팔목, 낯익은 손길에 쥐워 울음을 끊고 머나먼 별을 바라 본다. 이제껏 쌓였던 비애(悲哀)가 환희(歡喜)로 바뀌었다는 듯이, 머ㄹ리 지평선(地平線)끝, 해 돋는 쪽으로 향하였다.
그러면 그만한 자식이 왜 울었을까, 왜 달래는 어머니의 말도 안 듣고 눈물을 흘렸을까, 그보다도 강(强)한 어머니를 가진 그가 왜 무르게 생겼을까, 아니다,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는 지금까지 다른 어머니에게서 학대를 받고있었으니깐……
그렇다 해도, 그가 울지 않을 수 없어서 울었다 해도 우리는 그가 약(弱)하다 할 수 있다. 꺼먼 맨발로 가시 밭을 걷고, 돌쌀을 씹을 만치 되기까지는, 또한 자기를 낳지 않은 딴 어머니를 내쫓기까지는, 마지막으로 지금 자기를 끼고 있는 어머니를 위하여 팔을 걷고 나서기까지는, 약(弱)하다고할 수 있다.
그러나, 친어머니와 아들의 만남의 기꺼움이어, 강(强)한 여성(女性)인 자기 어머니의 품에 든 자식의 얼굴에는 벌서 명랑(明朗)한 희망의 웃음까지 떠오르고 있다.
자식은 점점 강(强)해지고, 강(强)한 여성(女性)인 그의 어머니의 마음은 넓어진다.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고향(故鄕)의 품에 안겨서
끝없는 바다, 잠자는 바다에 배부른 돛을 달고 임이 살고 있는 뭍을 찾아가는 한 척의 배, 그리고 믿음성 있게 엄마 품속에 포근히 안겨 조용히 행복된 꿈을 꾸며 발쪽이는 아가의 입술, 고향(故鄕)의 품에 안기려 할 때의 심정(心情)을 말하는듯 하나니 기꺼운 귀향(歸鄕)의 마음의 고동(鼓動)이어―사랑의 율동(律動)이어.
고향(故鄕)의 푸른 솔밭은 예전이나 다름 없이 묵직한 침묵(沈黙)에 잠겼으며 수차(水車)의 목쉰 소리는 여름의 논두덩을 울려 놓는다. 순박(純朴)한 시골 처녀(處女)애들이 머리 감는 앞시내의 물, 벅센 목동(牧童)애들이 소멕이고, 꼴베는 냇언덕의 벌판, 또 마을 동(東)쪽에 오뚝 솟은 교회당(敎會堂)의 헌 종각(鐘閣), 심지어 왼편에 바라뵈는 공동묘지(共同墓地)의 무덤까지 무럭무럭 끓어 오르는 수증기(水蒸氣)같은 평화(平和)를 자아내는구나.
그리고, 산(山)꼴짝 슬기러운 안개가 인가(人家)에 기여들 새벽이면 농기(農器) 든 농군(農軍)들이 가장 생기롭게 들판으로 헤여지며, (―이런 때, 고즈넉한 한낮에 집에 남은 사람, 즘생이라고는 늙은 할머니, 젖먹이 애, 애보는 계집애, 병든 사람, 그리고 지주(地主)집 사람들과 입맛 다시는 도야지, 집 보는 개, 멍이 쫓는 닭, 쌔김질 하는 소,…… 뿐.) 어두움이 저녁추기 나런 온마을에 퍼질 때면 그래도 안식처(安息處)를 향한 그들의 가볍다 할 발소리가 들린다.
(아하, 우리는 그들의 하루를 위하여 묵도(黙禱)를 올려볼까.)
그러나, 내 마음아, 저 찢긴 고향(故鄕)의 허파 속을 드려다 못 보는가.
쇠를 녹일 듯한 따가운 볕에 목욕하는 농민들,― 여름내 길러온 낱알을 힘적게 나려다 보는 눈알과 눈알, 버ㄹ서 전에 그들은 자연(自然)의 미(美)를 빼앗겼고, 신(神)을 버렸고, 오늘 최뚝에서 밤 달라 발버둥 치는 자식마저 잃어 버릴지 모른다. 아 밭이랑에서 호미질을 멈추고 김줌을 쥔 채 짬짬히 차돌빛 얼굴을 들어 마을쪽을 바라봄이어. 영양부족(營養不足) 때문에 앓고 누워 있는 식구를 생각함인가. 그러치 안으면 호박넝쿨 새로 가늘게나마 기어 오를 저녁 연기를 기다림인가. 저것 봐라, 잠시간에 두 눈이 흐려지는구나, 흐려 지는구나.
더구나 년년히 늘어 가는 우막들의 빈터는 쫄아든 각사람들의 공포(恐怖)를 파내고 있으며, 모혀 앉아 서로 주고 받는 세간사리 이야기 속엔 맨발로 어름우를 걷는 것같은 매움이 숨어 있지 안는가. 올해도 기러기 날으는 밤 타작(打作)터에서 통곡해야 하고, 눈포래 치는 밤 또 도망을 쳐야 하겠구나. 비나리는 항구(港口)의 가을밤 같은 서글픔이어, 소리 못내는 이땅의 울음 소리여.
고향(故鄕).
참말 어미닭의 품속을 파고드는 병아리같이 그리움에 사모쳐 고향(故鄕)의 품에 안기건만 그는 언제나 같은 눈물겨운 가슴을 헤쳐 놓는 것이다. 아하, 기름 마른 이곳, 정서(情緖) 빼앗긴 싸늘한 이곳에 누가 뛰쳐나와 괴롭단 큰 소리를 질러 보지 않는가.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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