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시인 / 만가(輓歌)
궂은 비 줄줄이 내리는 황혼(黃昏)의 거리를 우리들은 동지(同志)의 관(棺)을 메고 나간다. 만장(輓章)도 명정(銘旌)도 세우지 못하고 수의조차 못 입힌 시체(屍體)를 어깨에 얹고 엊그제 떼메어 내 오던 옥문(獄門)을 지나 철벅철벅 말없이 무학재를 넘는다.
비는 퍼붓듯 쏟아지고 날은 더욱 저물어 가등(街燈)은 귀화(鬼火)같이 껌벅이는데 동지(同志)들은 옷을 벗어 관(棺) 위에 덮는다 평생(平生)을 헐벗던 알몸이 추울상 싶어 얇다란 널조각에 비가 새들지나 않을까 하여 단거리 옷을 벗어 겹겹이 덮어 준다. (이하(以下) 육행(六行) 략(略))
동지(同志)들은 여전(如前)히 입술을 깨물고 고개를 숙인 채 저벅저벅 걸어간다. 친척(親戚)도 애인(愛人)도 따르는 이 없어도 저승길까지 지긋지긋 미행이 붙어서 조가(弔歌)도 부르지 못하는 산 송장들은 관(棺)을 메고 철벅철벅 무학재를 넘는다.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명사십리(明沙十里)
시푸른 성낸 파도(波濤) 백사장(白沙場)에 몸 부딪고 먹장구름 꿈틀거려 바다 위를 짓누르네 동해(東海)도 우울(憂鬱)한 품이 날만 못지 않구나.
○
풍덩실 몸을 던져 물결과 태껸하니 조알만한 세상 근심 거품 같이 흩어지네, 물가에 가재 집 지며 하루 해를 보내다.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무장야(武藏野)에서
초겨울의 무장야(武藏野)는 몹시도 쓸쓸하였다. 석양(夕陽)은 잡목림(雜木林) 삭장귀에 오렌지 빛의 낙조(落照)를 던지고 쌀쌀바람은 등어리에 우수수 낙엽(落葉)을 끼얹는데 나는 그와 어깨를 겯고 마른 풀을 밟으며 거닐었다.
두 사람의 시선(視線)은 아득히 고향(故鄕)의 하늘을 더듬으며 쏘프라노와 바리톤은 나직이 망향(望鄕)의 노래를 불렀다, 내 손등에 떨어진 한 방울의 따끈한 그의 눈물은 여린 정(情)에 아름다운 결정(結晶)이매 참아 씻지를 못했었다.
이윽고 나는 참다 못하여 끓어오르는 마음을 그의 가슴에 뿜고 말았다 손을 잡고 사랑을 하소연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며 말이 없었다 능금같이 빨개진 얼굴을 내 가슴에 파묻은 채……
그의 작은 가슴은 비 맞은 참새처럼 떨리고 그의 순진한 마음은 때아닌 파도(波濤)에 쓰러지는 해초(海草)와 같이 흔들렸을 것이다. 햇발이 우리의 발치를 지난 뒤에야 그는 조심스러이 입을 열었다. 내가 좀 더 자라거든요 인제 세상을 알게 되거든요
나는 입을 다문 채 무안에 취(醉)해서 얼굴을 붉혔다. 깨끗한 눈 위에다가 모닥불을 끼얹어 준 것 같아서…… 가냘픈 꽃가지를 꺾은 것처럼 무슨 큰 죄(罪)나 저지른 듯하여서…… 말없이 일어서 지향 없이 거닐었다. 쓸쓸한 황혼(黃昏)의 무장야(武藏野)를―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심훈 시인 / 박군(朴君)의 얼굴
이게 자네의 얼굴인가? 여보게 박군(朴君) 이게 정말 자네의 얼굴인가?
알콜병(甁)에 담가 논 죽은 사람의 얼굴처럼 마르다 못해 해면(海綿) 같이 부풀어 오른 두뺨 두개골(頭蓋骨)이 드러나도록 바싹 말라 버린 머리털 아아 이것이 과연(果然) 자네의 얼굴이던가?
쇠사슬에 네 몸이 얽히기 전(前)까지도 사나이다운 검붉은 육색(肉色)에 양미간(兩眉間)에는 가까이 못할 위엄(威嚴)이 떠돌았고 침묵(沈黙)에 잠긴 입은 한 번 벌리면 사람을 끌어당기는 매력(魅力)이 있었더니라.
사년(四年) 동안이나 같은 책상(冊床)에서 벤또 반찬을 다투던 한 사람의 박(朴)은 교수대(絞首臺) 곁에서 목숨을 생(生)으로 말리고 있고 C사(社)에 마주 앉아 붓을 잡을 때 황소처럼 튼튼하던 한사람의 박(朴)은 모진 매에 창자가 뀌어져 까마귀 밥이 되었거니.
이제 또 한사람의 박(朴)은 음습(陰濕)한 비바람이 스며드는 상해(上海)의 깊은 밤 어느 지하실(地下室)에서 함께 주먹을 부르쥐던 이 박군(朴君)은 눈을 뜬 채 등골을 뽑히고 나서 산송장이 되어 옥문(獄門)을 나섰구나.
박(朴)아 박군(朴君)아 ××아! 사랑하는 네 아내가 너의 잔해(殘骸)를 안았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동지(同志)들이 네 손을 잡는다 잇발을 앙물고 하늘을 저주(詛呪)하듯 모로 흘긴 저 눈동자 오! 나는 너의 표정(表情)을 읽을 수 있다.
오냐 박군(朴君)아 눈은 눈을 빼어서 갚고 이는 이를 뽑아서 갚아 주마! 너와 같이 모든 ×를 잊을 때까지 우리들의 심장(心臟)의 고동(鼓動)이 끊질 때까지
그날이 오면, 한성도서주식회사, 1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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