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순원 시인 / 꺼진 등대(燈臺)에 불을 켜자
별 없는 하늘에 번개가 부딪히고, 고운 달빛이 잔물결 우로 미끄러지는 사이에 쉬지 않고 바뀌는 태양(太陽)의 빛을 맛보며 회색(灰色) 바위에 높이 서 있는 등대(燈臺), 지금은 유탄(流彈) 맞은 성벽(城壁)같이 양쎈 힘을 잃어 버렸나니 무너지는 대벽(臺壁)이어, 깨여진 유리창이어, 산산히 부서진 등(燈)알이어, 녹슬은 쇠지붕이어.
바닷가에 솟은 검바위를 삼킬 듯한 날카로운 바람과 물결! 저어가는 배사공을 뒤 엎으려는 기운찬 대양(大洋)의 호흡(呼吸)! 이날에 이곳을 지나려는 나그네들 무엇을 바라보고 바로 치를 잡을 것인가.
더구나 넘치는 사랑으로 불켜든 늙은 등대수(燈臺守)는 선지피 묻은 입술을 꼭 물고 원한의 눈을 뜬 채로 넘어졌으며, 하늘에 뭉킨 구름떼, 땅에 줄달음치는 바다물까지가 간악한 적(敵)의 승리(勝利)를 알리는 때, 축하하는 때 해기운 저녁에 이름 모를 새의 우지짐이어, 아하, 떠러진 역사(歷史)의 한 절을 조상하고 있고나.
뜻있는 친구여, 억함에 가슴 뜯는 무리여 좀먹는 현실(現實)을 보고 슬퍼만 말라. 우리는, 참 사내는, 다시 등대(燈臺)의 불을 겨누아 뒷날 이곳을 지나는 사람의 기꺼워함을 아하, 가슴 깊이 안아야 하지 않는가, 안아야 하지 않는가.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나의 꿈
꿈, 어제밤 나의 꿈, 이상한 꿈을 꾸었다. 세계를 짓밟아 문지른 후 생명의 꽃을 가득히 심으고, 그 속에서 마음껏 노래를 불러 보았다.
그러다, 언제던지 잊지 못할 이 꿈은 깨어 흩어진 이내 머리에도 굳게 못 박혔다. 다른 모든 것은 세파(世波)에 스치어도 나의 동경(憧憬)의 꿈만은 영원(永遠)히 존재(存在)하느니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황순원 시인 / 나의 노래
나는 귀를 막았다. 어째서? ― 비명, 탄식, 애원, 호소, 저주! 그대로는 듣지 못할 부르짖음 행여나 아니 들릴까 하여. 그러나, 쟁쟁히 귓고막을 깨치고, 새여 들어오는 것을 어떻거나? 괴로우나마 내가 들어야 할 소린것 갓다.
나는 눈을 감았다. 왜 ― 거짓, 간사, 속임, 증오, 모순 ! 눈을 바로 뜨고 보지 못 할 현상을 멀리로 사라지게 하려고. 그러나, 더한층 똑똑히 눈앞에 나타나 머리 속을 산란케 하는 것을 어떡하나? 쓰라리나마 내가 보아야 할 증상인것 같다.
마침내 나는 길을 떠났다. 등에는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늘도 내일도 걸을 나그네의 길이다. 나의 진 짐이 무거우니 좀 쉬어 가라고? 아니다, 그것은 내가 원하지 않는다. 내가 바라고 기다리는 그 곳까지 가서 얽매인 신들매를 풀고, 그 짐을 내리려 한다.
방가(放歌), 동경학생예술좌 문예부, 1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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